제243화
“함정?”
“어허, 척하면 척이어야지요. 우리 실장님 다 되셨네.”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무슨 함정을 팔 건지 풀어놔.”
고자성이 깐죽거리자 차지훈이 주먹을 들어보였다.
“제가 봤을 때 이놈 99% 사고 칩니다. 세상이 난리를 치던, 손가락질하던 자기 꼴리는 대로 해야 하는 놈이거든요.”
“나도 그럴 것 같다고 예상은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너무 빠른 것 아닌가?”
미리 소하정의 가족을 미국으로 보낸 것도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만약의 사태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지금이 아니라 좀 더 나중에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국민들의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상황이라면 최소한 자숙하는 척이라도 할 줄 알았다.
“그렇게 생각 있는 놈이었으면 소하정 씨를 찾아가서 그런 개소리를 내뱉지도 않았겠죠. 이 새끼는 뇌가 없는 놈이에요. 학습 능력도 없는 파블로프의 개보다 못한 새끼라니까요.”
“그래, 네 말이 사실이라고 치자. 그런데 그 자식 손에 무슨 카드가 있어서 일을 꾸며? 동심파는 이미 끝장이 났고, 용선재나 조순희가 그놈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잖아.”
“원래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쉽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나라 폭력조직이 동심파밖에 없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용현철이 지금까지 보여준 행적들을 보면 평소에 알고 지내는 조폭이 깡치 하나밖에 없을 리가 없죠. 그리고 용현철을 아는 조폭이라면 그다지 별 볼 일 없던 동심파가 어떻게 컸는지 잘 지켜봤을 테고요.”
“지금 상황에서 만약 용현철이 손을 내민다면 혹할 수도 있다?”
“그렇죠! 솔직히 그놈들이 생각할 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소하정 씨는 그놈들이 볼 땐 돈도 빽도 없는 그냥 일반인 아닙니까? 마음만 먹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언제든 처리할 수 있는 만만한 존재일 텐데, 아무리 상황이 이 모양이라도 욕심낼 만하죠.”
“그럼 네 생각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하는데 소하정 씨를 미끼로 쓸 생각이라면 버려. 이미 우리를 위해 큰일을 한 사람이야. 보상도 제대로 못 한 마당에 괜한 위험부담을 줄 순 없어.”
말은 이렇게 했지만 차지훈은 고자성의 말에 이미 혹했다.
“에이. 제가 바보도 아니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행히 소하정 씨가 운동선수 출신이라 체형이 우리 준규랑 비슷하게 탄탄합니다. 그러니까 준규를 소하정 씨처럼 꾸며서 지금 사는 집에 지내게 하면 금방 미끼를 물 것 같은데요?”
이준규는 초이스 시큐리티에서 무술 사범 일을 겸직할 정도로 격투에 탁월하다. 만약 용현철의 부탁을 받고 그를 노리는 조폭이 있다면 지옥 구덩이 속에 발을 내딛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 뭐, 준규라면 안심하고 이번 일을 진행할 수 있겠네.”
“그렇죠? 사실 제가 하고 싶었는데 제 체형이 워낙 짜리몽땅해서 어쩔 수 없이 준규가 하기로 한 겁니다.”
“키 차이가 얼만데 네가 대신할 생각을 해? 헛소리하지 말고 함정 이야기나 계속해. 이건 언제부터 시작할 거야?”
“바로 시작해야죠. 그놈 성격에 간 보고 그럴 것 같진 않거든요.”
“오케이. 그럼 그렇게 해. 그전에 소하정 씨 안전부터 완벽하게 챙기는 거 잊지 말고.”
“옛썰!”
차지훈의 허락이 떨어지자 신이 난 고자성이 거수경례를 하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
“이야기 좀 해요.”
“무슨 이야기?”
황금숙을 바라보는 전명우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여전히 잘생긴 남편의 얼굴이 이렇게 서늘해 보이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자존심이 상했다.
지금껏 남편은 자신의 눈치를 보기 바쁜 소심한 남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같이 이야기 나누는 것조차 싫다는 듯 냉담했다.
아무리 잘못했기로서니 그동안 자신이 남편을 위해 어떻게 했는데. 그걸 안다면 이렇게 나올 수 없는 법이다.
시도 때도 없이 손을 내미는 시댁 식구들에게 싫은 기색 한 번 안 하고 경제적 도움을 줬다. 원래라면 꿈도 못 꿀 상류층 사람과 만나 결혼할 수 있었던 것도 황금숙의 시댁이라는 단 하나의 타이틀 덕분이었다.
시댁만 도움을 받은 게 아니다. 남편은 어떤가?
얼굴 잘생긴 것 말고는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평범한 남자가 자신을 만난 이후 승승장구하며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런 고마움을 안다면 이런 게 나오면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남편의 냉담한 반응에도 화를 낼 수 없었다. 지금 아쉬운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 자신이었으니까.
친조카 이상으로 아꼈던 용현철이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주워담기는 이미 늦었다.
사태는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다. 다수의 언론과 여론이 황금숙과 조순희를 구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여당도 이미 등을 돌렸다. 그들은 사소한 불똥이라도 튈까 봐 사소한 연락조차 받지 않았다. 이대로 간다면 대한민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영부인 구속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상황이 이렇게 나빠졌다면 당연히 남편이 나서야 한다. 정부 인사들을 독촉하고 여당을 다독이고 정치적 쟁점이 일고 있는 현안을 양보해서라도 야당의 공세를 늦추는 게 그가 할 일이다.
그런데 전명우는 마치 지금 사태가 남의 일인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하고 있다.
남편의 이러한 행동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황금숙은 입술을 깨물며 화를 참았다.
어쩌겠나. 모두가 등을 돌린 상황에서 믿을 건 남편밖에 없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서 물어요? 이번 일 해결 안 하면 당신한테도 부담이에요.”
“부담? 무슨 부담? 어차피 난 당신에게 재미있는 장난감 아니었어? 난 그냥 인형처럼 앉아 있고 당신이 다 알아서 하는 건데 내가 부담될 게 뭐 있다고 그래?”
역시 이거였다.
지금까지 일부러 이 이야기를 피해왔건만 남편은 계속 그걸로 뚱해 있었던 것이다.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말을 할 것이지, 쪼잔하고 소심한 남편 같으니.
황금숙은 다시 한번 억지웃음을 지었다.
“여보, 그건 오해예요. 설마 현철이 말을 그대로 믿는 건 아니죠?”
“안 믿을 이유가 있나? 그놈이 멍청하고 허세끼가 있긴 해도 거짓말은 안 하잖아. 당신이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낼 이유도 없고.”
“그건 그냥 여자들끼리 하는 남편 험담 같은 거였어요.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결혼한 여자들이 모이면 제일 많이 하는 게 시댁이나 남편 험담이라고요. 정말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 수다를 떨면서 스트레스를 부는 거예요. 남자가 돼서 그 정도는 이해해줘야죠.”
“뭐라고? 나 말고 우리 집까지 험담했다고?”
전명우는 아내의 어떤 변명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소심한 남자였고, 돈이 많고 활동적인 성격의 아내에게 열등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감정이 용현철 녹취록 공개 이후 폭발하고 만 것이다.
“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말하자면 그렇다고요, 말하자면. 당신은 왜 자꾸 내 말을 꼬아서 들어요. 남자가 돼서.”
“남자가 어떤데? 대체 남자가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자꾸 남자 타령이야.”
전명우의 언성이 높아지자 황금숙이 그제야 아차 싶었다. 소심한 남편을 자극하면 안 됐는데, 자신도 모르게 평소 버릇이 나왔다.
그러나 한편으론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싶어 욱하는 마음이 끓어올랐다.
황금숙도 애초에 참을성이 많은 여자는 아니었다.
“그럼 수십 년을 같이 산 당신 와이프가 곤란한 지경에 빠졌는데 조금 서운한 말을 들었다고 삐쳐서 손 놓고 있는 게 남자가 할 행동이란 말이에욧? 아무리 서운해도 내가 당신을 위해 당신 가족을 위해 해온 일을 생각하면 이렇게 나오면 안 되죠.”
결국 참지 못하고 같이 화를 냈다. 그러나 평소라면 황금숙의 고성에 기가 죽고 고개를 숙여야 할 남편인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목은 여전히 꼿꼿했고 눈빛은 처음보다 훨씬 냉담해졌다.
“대체 어떤 게 날 위하고 내 가족을 위했다는 거지? 그게 정말 우리를 위해서였나, 당신 개인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뭘 모르는군. 머리 빗겨주고 예쁜 옷 입혀줬다고 인형이 고맙다며 인사하는 거 봤어?”
“여보!”
“사람들은 말이야 개의 성대를 자르고 고양이를 중성화시키면서도 그렇게 말을 해, 다 너를 위해서라고. 우리와 살려면 성대를 잘라야 해. 중성화 수술을 해야 건강하게 오래 산단다. 이런 걸 개나 고양이에게 물어봤어? 아니거든.”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뭘 어떻게야. 그냥 상식적으로 물어보는 건데. 당신은 오래 살 수 있다는 이유로 가슴을 자르고 자궁을 들어낼 수 있어? 아니잖아! 아니거든, 병에 걸렸다면 모를까 그전부터 지레 겁을 먹고 미리부터 그러는 사람은 거의 없어. 왜? 그냥 싫으니까. 나도 마찬가지야. 그냥 싫어. 당신이 나를 위해서 했다는 행위들이 그냥 싫다고. 그러니까 내 동의도 없이 당신 멋대로 한 일을 가지고 내게 생색내려고 하지 마. 그런 일에 고마워할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으니까.”
“정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전명우가 너무나도 단호하게 나오자 황금숙도 더는 비굴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부탁이 안 된다면 남은 건 협박이다.
“무슨 후회?”
“당신이 이렇게 나오면 나는 당신 가족에 대한 지원을 끊을 수밖에 없어요. 지금 당신 가족이 어떻게 사는 줄 알아요? 쥐뿔 버는 것도 없으면서 눈만 높아져서 웬만한 부자들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돈을 쓰고 다녀요. 그런데 갑자기 돈이 끊기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협박이야?”
“협박이 아니라 부탁이라고 해두죠.”
황금숙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남편이 너무 막무가내로 나와서 어쩔 수 없었다.
한편으론 마음이 후련했다. 그녀는 역시 이런 식으로 거래를 하는 게 본인 스타일에 맞았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한다면?”
“…정말 괜찮겠어요?”
“난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최소한 청와대에서 지내는 동안만큼은 밥도 나오고 먹을 것도 나오거든.”
“당신이 아니라 당신 가족이 문제죠. 사람을 너무 믿지 말아요. 돈은 마약만큼 중독성이 강해요. 흥청망청 쓰다가 갑자기 한 푼도 쓸 수 없게 되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을 걸요.”
“그래서?”
“그러다 보면 유혹에 약해지고 사고를 치겠죠. 대통령 친인척 비리가 그런 식으로 시작해요. 대통령 임기 말년에 그런 개망신을 당하고 싶은 거예요?”
“괜찮아. 아무리 비리를 저질러도 우리 가족은 간이 작아서 당신이 저지른 일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할 테니까. 그리고 개망신은 이미 당했잖아. 당신 덕분에 엄청나게. 온몸에 똥을 둘렀는데 먼지 몇 톨 내려앉는다고 티가 날 것 같아? 그건 백옥처럼 깨끗한 몸일 때나 통하는 협박이라고.”
전명우는 황금숙과 결혼한 이후 처음으로 속이 후련해지는 걸 느꼈다.
이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 줄 알았으면 그동안 그렇게 눈치 보며 살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이익! 기어코 당신 마음껏 하겠다는 뜻이죠?”
“지금까지 당신 마음대로 했잖아. 그러니 이번만큼은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
“좋아요. 나 없이 당신이 얼마나 잘 되는지 두고 보자고요. 내 손을 놓는 순간 당신이 믿고 있는 알량하기 짝이 없는 대통령 자리도 위태롭다는 걸 명심하는 게 좋아요.”
황금숙은 얼굴이 벌게진 채 대통령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Rrrr
아내가 나가는 걸 확인한 전명우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민정수석에게 연락을 넣었다.
- 네, 대통령님.
“최건우 대표 연락처 아나?”
- 개인적으로는 모릅니다만,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한번 알아볼까요?
“그래, 연락처 알아내서 나랑 조용히 만날 수 있게 약속을 잡아줘. 비서실 사람들도 모르게.
- 알겠습니다, 대통령님.
***
쌍끌이파는 강남과 서초 일대에서 활동하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폭력조직이다. 불과 다섯 명으로 시작했던 조직이 지금은 서른 명 이상으로 불어났으니 꽤 성공을 거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이 딱 한계였다. 더 크고 싶어도 다른 조직의 견제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제대로 크려면 조직의 명운을 걸고 전쟁을 벌여야 하지만, 요즘 세상에는 그런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왔다.
원래 비슷한 규모의 라이벌 관계였던 동심파가 사람 하나 잘 만나 승승장구하는 걸 보며 배가 아팠는데, 그 귀인이 먼저 자신들에게 연락을 준 것이다.
보스인 조창혁은 지금 이게 천재일우의 기회라는 걸 깨달았다.
의뢰자인 용현철의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긴 하지만, 다른 권력자들이 그렇듯 이번 일도 금방 수습될 거라고 믿었다.
어차피 세상은 힘 있는 사람들에게만 살기 좋은 곳이니까.
게다가 의뢰받은 일이 부담스럽거나 어려운 것도 아니다. 고작 평범한 일반인 하나 데려와서 손 좀 봐주는 게 전부다.
이 정도라면 설사 용현철이 잘못된다고 해도 쌍끌이파로써는 별 부담이 없었다.
“사장님. 애들은 등산로 입구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래? 놈이 등산 취미를 가지고 있어서 일이 쉽게 됐네.”
“의뢰인이게 연락해놓고, 우린 곧바로 출발하자.”
“네, 사장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