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4화
후드 재킷에 모자를 쓴 사람이 건물 입구에서 빠져나왔다.
두 명의 남자가 망원경으로 그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들이 지켜보는 사람은 소하정으로 분장한 이준규였다. 물론 초이스 시큐리티 소속 말고는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카메라가 있었다.
“크크크. 월척이로세.”
작전 지휘 차량인 초리티1 내부에 편안하게 앉아 모니터로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고자성이 히죽 웃었다.
망원경에 의존하는 조폭들과 달리 초이스 시큐리티는 모든 게 최첨단이다.
뛰어난 해커인 윤종수가 주변 CCTV를 모두 뚫어놨고, 그것도 부족해 숙소 주변과 함정을 파놓은 등산로 입구에는 별도의 카메라까지 설치해 놨다.
돌도끼를 든 사람에게 자동소총을 겨누며 싸우는 꼴이다. 싸움이 될 리가 없다.
긴장해야 할 현장에서 고자성이 여유를 부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놈들 참 겁대가리가 없네.”
키득거리는 고자성을 보며 차지훈이 쓴웃음을 지었다.
“조폭 애들이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머리는 없어도 깡으로 밀어붙이는 족속이니 사람 하나 납치하는 건 일도 아니겠죠.”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 CCTV가 도처에 깔려 있는데 저렇게 수상한 옷차림으로 태연하게 움직이는 꼬라지가 어이없어서 그런다. 이런 도심에서 저딴 망원경이 가당키나 하냐? CCTV에 찍히면 그게 전부 증거가 될 텐데 말이야.”
차지훈의 말처럼 이준규를 관찰하던 두 남자가 들고 있는 건 군대에서나 쓰는 꽤 커다란 망원경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 긴장은커녕 재미있는 첩보 놀이를 하는 아이들과 닮아 있었다.
너무나 수상한데 요즘은 밀리터리 덕후들이 많으니 사람들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가는 요상한 상황이랄까?
“설마 우리가 이렇게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다는 걸 저놈들이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남을 괴롭히기만 하고 당한 적이 없는 놈들이 항상 저런 식이잖아요.”
“그렇지? 역시 깡패 새끼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그나저나 저기는 여기보다 더하네.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차지훈이 가리킨 화면은 이준규가 등산을 시작할 예정인 등산로 초입이었다.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코스는 아니지만 도심지와 붙어 있는 등산로인 만큼 주차시설은 잘 정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검은색 옷을 입은 두 명의 남자가 주차장 입구에서 길을 막고 오는 차들을 전부 돌려보내는 중이었다.
공사 중이라는 식으로 좋게 돌려 말했는지 아니면 위협했는지 그건 알 수 없지만 간간이 오는 차들은 전부 두 남자에 의해 핸들을 틀어야 했다.
“위협이 일상적인 놈들답네요.”
“위협하는 걸까?”
“위협 반 설득 반이 아닐까요? 차 한 대 들여보내 볼까요?”
만약을 대비해 초이스 시큐리티 직원 중 절반 이상이 현장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조사 결과 이미 쌍끌이파가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혹시라도 조직원 전부를 동원했을 때 신속하고 완벽하게 제압하기 위한 인원 구성이었다.
“그래. 블랙박스로 대화 내용 전부 녹화하는 거 잊지 말고.”
“물론이죠.”
“준규는 등산로까지 얼마나 걸리지?”
“음…. 느긋하게 가기로 했으니 아마 15분에서 20분쯤 걸릴 것 같네요.”
“그 자식 설마 제 성질에 못 이겨 저기 있는 놈들 전부 두들겨 패는 건 아니겠지?”
“하하. 그럴 능력이야 되겠지만 설마 그러려고요. 오늘은 위협당하는 장면만 찍고 도망가기로 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사실 이번 일 끝나고 따로 쌍끌이파를 혼내주기로 했거든요. 안 그래도 오늘 일 끝나고 보고하려고 했어요.”
현역 때는 조폭들 괴롭히는 게 고자성과 이준규의 취미생활이었다. 그러다가 걸려서 정보국 일을 그만둔 것이고.
정보국을 나온 데는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때 그 사건이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어쩐지, 웬일로 네가 이번 작전에 참가 안 하고 여유롭게 앉아 있는가 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갈 리가 없지.”
“흐흐흐. 오랜만에 동심파 애들 만져주면서 잊었던 재미를 다 깨달았다고 할까요?”
“적당히 해, 적당히. 대표님에게 누가 되지 않게.”
“당연하죠. 우리도 그때 그 일이 있고 나서 반성 많이 했습니다.”
“끝까지 안 하겠다는 소리는 안 하네.”
“그래도 예전하고는 많이 달라졌어요. 진짜 악랄한 놈들만 손봐줄 거거든요.”
“그래, 진짜 악취 나는 쓰레기들은 치워줘야지.”
오랫동안 같이 생활했는데 차지훈이 이들 마음을 모를 리가 없다.
“실장님도 끼워드릴까요?”
“안 돼, 나는 이미 얼굴이 팔렸잖아. 내가 대표님 사람인 거 이 바닥에서는 다 소문이 났는데 자중해야지. 나는 작전 차량 타고 구경하는 걸로 만족하련다.”
바로 그때 초리티1 내부 스피커로 현장 요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 주차장 입구에 들어갔더니 멧돼지가 출몰했다고 돌아가랍니다.
“뭐, 멧돼지? 기껏 생각해봐야 공사 중이라고 둘러댈 줄 알았는데 꽤 창의적이네. 그래서 그냥 돌아 나왔어?”
- 아니요. 그래도 상관없다고 들어가겠다고 했는데 한 새끼가 팔뚝에 용문신을 보여주면서 좋은 말 할 때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손봐주지 그랬어?”
- 네? 자, 작전은 어쩌고요?
“하하하. 놀라지 마, 농담이니까. 그래서 돌아와서 다시 대기 중인 거야?”
- 네, 팀장님.
“그래, 그럼 계속 대기하고 있어. 이미 들었겠지만 출동할 일은 거의 없을 거야. 저놈들이 이 팀장을 잡을 확률은 제로에 가까우니까.”
- 아무래도 그렇겠죠? 제가 봐도 신출귀몰한 이 팀장님을 잡기에 쟤네들이 너무 허접해 보이네요.
“그렇다고 너무 풀어져 있진 말고. 수신 끝.”
- 넵, 알겠습니다. 송신 끝.
“이야. 우리 자성이 이제 현장 총괄 지휘관 티가 제법 나는데.”
통신이 끝나자 차지훈이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고자성을 바라봤다.
초이스 시큐리티에는 팀장이 여러 명 있지만 그중 고자성이 가장 선임자이다. 차지훈의 부재 시 회사에서 진행하는 모든 작전 지휘권은 고자성에게 있다.
“그래요? 난 아직 어색하기만 한데.”
“금방 적응될 거야. 편하게 앉아 모니터만 보면서 지시를 내리는 게 답답할 수는 있겠지만. 어, 저기 준규 아니야?”
차지훈이 이야기하는 도중 오른쪽 끝에 있는 모니터에 이준규가 모습을 드러냈다. 현 지점에서 등산로에 있는 주차장까지 가려면 3분 정도 더 걸어야 하지만, 지금부터는 완전히 막다른 길이라서 사실상 작전 시작이 시작된 셈이다.
“맞네요. 시계 보니까 얼추 시간은 맞네요. 그럼 작전 시작하겠습니다. 전 대원 들어라. 미끼가 약속 지점에 들어섰다. 모두 하던 일 멈추고 무선에 집중하며 대기하고 있기 바란다.”
***
이준규가 경쾌한 걸음으로 등산로 입구를 향해 걸었다.
평범해 보이는 복장이지만 그 안에는 굉장히 값비싼 장비들이 장착되어 있다.
귀에는 송수신을 위한 좁쌀만 한 통신기가 들어가 있고, 그가 쓰고 있는 선글라스는 지금 상황을 모두 찍을 수 있는 카메라가 장착되어 있었다. 그리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옷과 등산화에는 위기 대처용 무기들을 숨겨뒀다.
“이제 곧 주차장으로 들어섭니다. 안에 있는 내부 상황은 어떻습니까?”
- 네가 들어가면 다섯 명 정도 되는 놈들이 네 뒤를 막을 거야. 그리고 세 놈은 등산로에 대기하는 중이고, 남은 세 명은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 방금 확인된 건데 차 안에 용현철도 같이 있다고 한다.
“오, 용현철이요? 그놈은 무슨 생각으로 여길 나타났대요? 기자들 눈도 있는데 조심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천천히 목표지점으로 이동하던 이준규가 쓴 웃음을 지었다.
- 그만큼 소하정 씨에 대한 원한이 깊다는 거 아니겠어? 아마 단단히 마음먹었을 거야. 지금 거긴 자기들밖에 없다고 생각할 거거든.
“그것참 재미있겠네요.
- 네 실력은 아는데 그래도 방심하지 말고.
“그럼요. 오늘은 싸우는 게 아니니까 별 탈 없이 끝날 겁니다. 그런데 용현철이면 아무리 변장했다고 해도 제가 소하정 씨가 아닌 걸 알 수도 있지 않습니까?”
- 괜찮아 모자랑 선글라스만 안 벗으면 못 알아볼 거야.
지금 이준규가 착용한 선글라스는 등산객들도 많이 애용하는 오클리 제품이라서 딱히 의심받을 일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진입합니다. 통신은 계속 유지하겠습니다.”
- 오케이.
대화를 끝내고 마지막 오르막을 오르자 꽤 널찍한 주차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준규에게는 익숙한 곳이었다. 그동안 용현철을 낚기 위해 꾸준히 같은 시간에 들락거린 덕분이다.
등산을 입구로 가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며 주차장을 가로 질렀다. 그러자 고자성의 예상처럼 다섯 명의 덩치 좋은 남자들이 그의 뒤를 막아서며 나타났다.
“네가 소하정이냐?”
이준규가 당황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근처에 있던 검은색 그랜저 승용차 조수석에서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가 내리며 말을 걸었다.
“그런데 넌 누구야?”
“새끼. 고작 동네 산에 올라가면서 선글라스는 뭐냐? 누가 보면 히말라야라도 오르는 줄 알겠다.”
“그건 내 마음이고, 넌 대체 뭐하는 놈이야? 뒤에 있는 놈들도 너랑 일행인 거야?”
“새끼. 그런 간 큰 일을 벌이고도 무사하길 바란 거야?”
“무슨 간 큰 일?”
험상궂은 남자의 지적에 이준규는 모른 척 물었다. 지금 상황이 모두 녹화되고 있어서 최대한 많은 말을 끌어내는 게 그의 역할 중 하나다.
“우와, 뻔뻔한 놈. 모른 척 시치미 떼는 것 좀 보소.”
“사람들을 잔뜩 데려온 걸 보면 좋은 의도가 아니라는 걸 알겠는데, 너네가 나한테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는데?”
“일명 용현철 녹취록. 이래도 모르겠어?”
“서…설마 너희들 용현철이 보낸 거야?”
“서…설마. 크흐흐흐흐. 갑자기 말 더듬는 것 보소. 찔리긴 찔리는 갑지?”
남자가 웃자 이준규 주위를 막고 서 있던 다른 놈들도 같이 웃기 시작했다.
이 정도까지 몰아넣었으니 다 잡은 물고기라고 생각한 듯 여유를 부렸다.
“미친 새끼. 그놈은 기자들도 안 무섭데?”
“그럴 것 같아서 기자들 모르게 조용히 빠져나왔지. 여긴 우리 말고 아무도 없거든. 네가 세상 물정 모르고 열심히 등산하러 다녀준 덕분이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너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데 내가 다치면 이번 녹취록을 제보한 언론사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이 새끼 생각보다 순진하네. 장기로 치면 넌 졸이야. 그리고 녹취록 하나로 네 쓸모는 끝이야. 지금 당장 네가 없어진다고 그 사람들이 신경이나 쓸 것 같아?”
“아니야. 내가 제보한 언론사는 달라!”
이준규는 열정적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바로 그때 덜컥하며 그랜저의 뒷문이 열렸다. 그리고 용현철이 진득한 웃음을 지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선배.”
“아니, 넌! 네가 여길 어떻게?”
“어떻게 왔긴 졸라게 조심해서 왔지. 어때 나 보니까 반갑지?”
“미…미친 새끼.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이놈들까지 데리고 온 거야?”
“글쎄.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여길 왔을까? 참고로 여기 있는 분들은 되게 유명한 조폭들이셔. 마음만 먹으면 너 하나 정도는 쓱싹 해치우는 게 일도 아닌 분들이지.”
“어, 언론사에서 가만 안 있을걸?”
혼신을 다한 연기 덕분인지 이준규의 정체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용현철도 이준규를 소하정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아! 언론사.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궁금해서 내렸어. 녹취 파일은 민국당 국회의원들이 터트렸는데 제보는 언론사에 먼저 했다 이거지?”
“그런데 왜?”
“그렇다는 건 네가 제보한 언론사가 민국당이랑 친한 곳이라는 의미겠네?”
“나한테 묻지 마. 절대 말 안 할 테니까?”
“죽어도?”
“뭐?”
“귓구멍이 막혔나. 죽어도 말 안 할 거냐고?”
“너, 설마?”
“왜? 내가 선배 못 죽일 것 같아? 미꾸라지 같은 네놈 때문에 이모도 우리 집도 우리 집안도 모두 엉망이 됐어. 그 정도 사고를 쳤으면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각오는 했어야지. 아니야? 아니냐고! 말해봐, 말해보라고 이 새끼야!”
용현철은 소하정 때문에 겪은 고초가 생각났는지 갑자기 미친 듯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난 그냥 너무 화가 나서….”
“화가 나서 처음부터 끝까지 나랑 있었던 대화를 녹음했다 이거지? 개소리 한다. 누구 사주를 받았어?”
“뭐?”
“누구 사주를 받고 그런 일을 벌였느냐고?”
“무슨 소리야 그게. 그냥 나 혼자 꾸민 일이야.”
“역시 말로 해서는 안 되겠네. 조 사장님.”
“네, 도련님.”
“일단 자리를 옮기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괜찮은 장소는 잡아놓으셨죠?”
“고문해서 입을 열게 할 생각이신가 보군요. 다행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허름한 창고는 많이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한 군데 좀 빌립시다. 사람들도요.”
“물론입니다, 도련님.”
용현철의 말에 험상궂은 남자, 그러니까 쌍끌이파 보스인 조창혁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모두들 여유가 넘쳤다. 하지만 이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모니터로 편안하게 앉아서 구경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 캬아. 완벽하다, 완벽해. 준규 너 이제 이 일은 그만두고 영화계로 나가보는 거 어때?
고자성의 감탄에 이준규는 아무런 대꾸 없이 싱긋 웃기만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