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245화 (245/256)

제245화

“웃어?”

용현철이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상황이 어떤가? 이준규는 지금 독 안에 든 쥐다. 그리고 잠시 후 쌍끌이파가 이용하는 모처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어딘가에 조용히 묻힐 예정이다.

원래는 이런 생각까진 없었는데 조창혁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계획을 변경했다.

만약 이준규가 아니라 진짜 소하정이 누군가에 폭행을 당했다면, 과연 언론이 가만히 있을까?

범인은 누가 봐도 뻔하다. 용현철이거나 용현철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거나. 100%라고 확신하긴 어렵지만 99%는 용현철을 지목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사태 해결은커녕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된다.

이런 현실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려면 처음부터 소하정을 건드리지 말던가, 그게 아니면 아무도 모르게 완벽한 입막음을 해야 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보복을 포기하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소하정에 대한 원한이 너무나도 깊은 나머지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분노에 휩싸인 용현철이라고 해도 처음엔 꽤 망설였다. 그가 안하무인에 독한 성격인 건 맞지만 사람 목숨을 가지고 장난질을 쳐본 적은 없다. 그렇게 되면 장난은 더 이상 장난이 아니게 된다.

그렇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조창혁의 장담에 한참을 망설이던 용현철도 결국은 넘어가고 말았다.

그런데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어도 시원찮을 소하정의 얼굴에 울음이 아니라 웃음이 걸렸다.

대체 왜?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파악 못 할 정도로 멍청이라서? 아니면 너무나도 공포에 질려 머리가 돌아버려서?

아니다, 아무리 봐도 둘 중에 정답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설마 하니 자신감이 넘쳐서 그럴 리는 없고.

용현철은 어디선가 겪어본 듯한 묘한 기시감이 들었지만 고개를 저으며 불안감을 떨쳤다.

“그럼 웃지, 울까?”

“뭐? 어허, 이 자식이 정말 무서워서 실성이라도 한 건가?”

옆에 있던 조창혁이 뒤늦게 이준규가 웃는 모습을 발견하고 발끈하며 나섰다.

“솔직히 하나만 물어보자.”

“두 개 물어봐도 돼.”

“내가 여기서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는다고 이대로 보내줄 거냐?”

“그건 아니지.”

“그러니까 네가 지금 내게 하려는 게 뭐야? 날 실컷 고문하다가 죽으면 땅에 묻어버리겠다는 거잖아.”

“딩동댕. 맞아, 정답! 다행히 실성은 안 한 모양이네. 난 정말 네가 미친 건가 싶었거든.”

용현철의 두 눈이 잔인하게 반짝였다.

“그딴 짓을 하겠다는데 내가 왜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하는데?”

“그렇게 안 하면 원래보다 더 한 고통을 받을 수도 있거든. 제발 죽여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이거 어쩌지. 죽으면 죽었지 너 같은 놈에게 그런 부탁을 하고 싶진 않은데.”

“새끼. 끝까지 센 척하네. 그럼 이건 어떨까? 네가 끔찍이도 아끼는 네 가족도 너와 똑같은 과정을 거친다면? 어때, 이래도 여유를 부릴 수 있어?”

“휴…. 넌 정말 구제불능의 쓰레기구나.”

가족까지 위협하는 치졸한 모습에 이준규는 더는 참지 못하고 사나운 본성을 드러냈다. 어차피 필요한 내용은 전부 녹화되었다. 여기서 더 눈치를 보며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 모인 놈들을 전부 죽도록 패주고 싶은데 오늘 계획은 그게 아니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구제불능 쓰레기? 이봐요, 조 사장님.”

“네, 도련님.”

“언제까지 계속 두고만 보고 있을 겁니까?”

“안 그래도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얘들아!”

“네.”

“일단 저 새끼가 더는 종알거리지 못하게 무릎 꿇려서 데려와.”

“알겠습니다, 사장님.”

조창혁의 지시에 다섯 명의 떡대들이 일제히 이준규에게 달려들었다. 제법 매서운 기세였다.

지금 이곳에는 조창혁이 가장 아끼는 쌍끌이파 조직원 열한 명이 동원되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겁에 질려 주저앉거나 죽을힘을 다해 도망가려고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이준규의 행동은 모두의 예상을 완전히 깨버렸다.

이준규는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으로 겁도 없이 조창혁에게 달려들었다. 물론 겁도 없다는 건 조창혁 입장에서의 생각이었다.

“이런 미친 새끼가.”

조창혁 옆에는 쌍끌이파 안에서도 최정예 조직원 세 명이 지키고 있었다.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했던 인간의 갑작스러운 반격에 당황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독 안에 든 쥐가 발악을 해봐야 찍찍거리는 수준밖에 안 된다.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이준규를 향해 사납게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을 휘두르던 사람도 지켜보던 사람들도 이준규가 한방에 나가떨어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준규는 이번에도 모두의 예상을 빗나가게 만들었다.

마치 연체동물이 된 것처럼 유연하게 몸을 비틀며 콧수염 남자의 주먹을 피했다. 그리고 곧장 조창혁 품 안으로 달려들었다.

다른 두 명이 뒤늦게 깜짝 놀라며 막으려고 애썼지만 이미 늦었다. 이준규의 몸은 어느새 조창혁 코앞까지 치달았다. 그리고는 곧장 날아올랐다. 표범이 연상될 정도로 빠르고 거침없었다. 또한 숨죽여야 할 정도로 맹렬했다.

모두들 생각지도 못한 황당한 상황에 어어 거리기만 했다.

당사자인 조창혁조차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준규가 그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씨발, 좆됐다!’

어느새 무릎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머리를 잡힌 상황이라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뒤이어 따라올 통증을 떠올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어라? 왜 아직?’

무릎에 찍혀도 열 번은 더 찍힐 시간이 지났는데 아무런 통증이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슬쩍 눈을 떴다.

이준규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수하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향해 있었다. 쪽팔렸다. 그래서 더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 어디로 갔어?”

“저, 저기로요.”

수하가 손으로 가리킨 곳은 조창혁의 뒤편이었다. 급하게 몸을 돌렸다. 그곳엔 이준규가 유유자적 모습으로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농락당했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었다.

“야, 이 새끼들아. 뭘 그렇게 보고만 있는 거야? 당장 저 새끼 안 잡아와!”

고함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떡대들이 이준규를 쫓았지만, 이준규는 구름을 밟듯 가벼운 발놀림으로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

“안녕하십니까, 시장님.”

“어서 오세요, 차 실장.”

이준규의 열연(?) 덕분에 모든 게 계획대로 마무리됐다. 차지훈은 하루 동안 직원들이 완벽하게 정리한 자료를 들고 장문오를 찾아갔다.

“대표님이 직접 오시고 싶어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두 분이 만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좋지 않을 것 같아 제가 대신 왔습니다. 대표님이 죄송하다고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죄송하다니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최 대표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 그런 말씀은 안 하셔도 된다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장님.”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이렇게 은밀하게 연락을 주신 건가요?”

“중요한 자료를 하나 가져왔습니다.”

“중요한 자료요? 지난번과 비슷한 선물인 건가요?”

“글쎄요. 폭탄인지 선물인지는 시장님이 판단하셔야 할 듯합니다.”

“이런! 말만 들어도 무서워집니다. 지난번에 주신 폭탄 같은 선물 덕분에 전국이 온통 시끄러워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일이 수습되기도 전에 또다시 폭탄인지 선물인지 모를 걸 가져오셨다고요?”

“혹시 부담되시면 열어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자료를 활용할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됩니다.”

“허허, 아닙니다. 그냥 엄살을 좀 피운 거지 절대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호의가 담긴 선물인데 거절할 수야 없죠.”

장문오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 나름대로 친근감의 표시였다.

“여기 있습니다. 확인해보고 좋은 일에 사용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차지훈은 품에 들어 있던 작은 봉투를 꺼내 장문오에게 건넸다.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그런데 차 실장님.”

“네, 실장님.”

“설마 지난번처럼 대형 폭탄은 아니겠죠?”

“음…. 뭐라고 확답드리긴 어렵지만 제가 생각할 때 정치적 이슈로 사용하기엔 지난번보다 못합니다.”

“아!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녹취록 공개 이후 우리도 기자들에게 엄청나게 시달렸거든요.”

“그런데.”

“그런데?”

“사회적 파급력으로만 따지면 지난 녹취록의 두 배 이상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차지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적이 흘렀다. 장문오가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믿기지 않는다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두… 배요? 그, 그게 정말입니까?”

“어디까지나 제 판단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차 실장 판단이라면 당연히 믿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대체 어떤 내용이 담겨 있길래요?”

“그건 제가 입으로 설명드리는 것보다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겁니다.”

“듣는 게 아니라 본다고요?”

“네, 이번엔 녹취록이 아니라 영상입니다. 주연 배우의 열연이 빛나서 영화를 보듯 흥미진진하실 겁니다.”

차지훈이 처음으로 보일락말락 하는 미소를 지었다.

“차 팀장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기대해봐야겠군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멀리 나가진 않겠습니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차지훈이 집무실을 떠나고 장문오는 팔짱을 끼고 앉아 그가 놓고 간 봉투를 응시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봉투를 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SD카드가 들어가 있었다. 64기가짜리였다. 지난번에 받았던 건 4기가였는데 무려 16배나 늘어났다.

굉장히 고화질 영성이 들어있겠구나 생각했다. 아무 의미 없이 용량을 늘였을 리가 없으니.

장문오는 익숙한 솜씨로 SD카드를 집무실 책상에 있는 노트북에 연결했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노트북이 SD카드를 인식했다. 폴더를 열자 네 개의 동영상 파일이 나타났다. 이름은 단순하게 용현철01부터 용현철04까지 붙여져 있었다.

“또 용현철이군.”

파일 이름이 모든 걸 말해주는 듯했다. 용현철이 관련이 없다면 파일 이름에 ‘용현철’이 들어갈 리가 없다.

장문오는 기계적으로 용현철01 파일을 더블클릭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왼쪽 손을 턱에 괸 채 동영상을 보던 장문오의 허리가 어느새 꼿꼿하게 섰다.

첫 번째 동영상 재생이 끝나자 곧바로 두 번째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세 번째 네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맙소사! 미치겠군. 용씨 집안에서 어떻게 이런 개망나니가 태어난 거지?”

삐익!

장문오는 재빨리 비서실을 호출했다.

“네, 시장님.”

“지난번에 나랑 가까운 의원들만 모아서 이야기 나눴던 식당 있지.”

“네, 알고 있습니다.”

“그쪽으로 오늘 저녁 8시까지 모두 모이라고 전해 줘. 긴급한 일이니까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참석해야 한다고도 하고.”

“알겠습니다, 시장님.”

***

차지훈이 장문오를 만날 때쯤 건우는 삼청동 모처에서 은밀하게 전명우를 만나고 있었다.

굳이 만날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 요청을 무시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약속 시각을 잡았다.

“어서 와요. 최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대통령님.”

“바쁜 사람을 여기까지 불러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아무리 바빠도 국내외 일을 모두 신경 쓰셔야 할 대통령님만큼 바쁘겠습니까? 당연히 제가 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알고 보면 그렇게 바쁘지 않습니다. 저보다는 아내가 바빴지.”

“아, 그게….”

너무나도 솔직한 전명우의 말에 건우는 순간 당황했다. 이럴 땐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당황할 것 없습니다. 사실을 말씀드린 거니까. 전 허수아비 대통령이 맞습니다. 용현철 그 철없는 망나니가 없는 말을 한 건 아닙니다.”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크죠. 정말 심려가 큽니다. 국민들에게 개망신당한 것도 부끄러웠지만 사실 아내가 나를 장난감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용현철이 과장되게 표현했을 수도 있습니다.”

“후훗. 아니요, 그 여자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입니다. 제가 최 대표님을 불러 놓고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지 궁금하시죠?”

“네, 조금은요.”

조금이 아니라 굉장히 많이 궁금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이번 일 배후에 최 대표님이 있다는 거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탁드립니다. 정부는 앞으로 절대 초이스 에듀를 적대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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