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246화 (246/256)

제246화

초이스 시큐리티 사람들과 오늘 만남을 두고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짜봤다. 그러나 전명우가 이런 제안을 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건우는 조용히 전명우의 눈빛을 바라봤다. 그의 두 눈은 욕심을 내려놓은 듯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일단은 모른 척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렇게 시치미 뗄 것 없습니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아내에게 장난감 취급을 받는 한심한 남편이지만 그래도 일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입니다. 며칠 전에 국정원으로부터 재미난 분석보고서를 하나 받았습니다. 거기선 최 대표가 이번 사태의 주범일 확률이 높다고 하더군요.”

“금시초문이네요. 결정적인 증거라도 발견하신 겁니까?”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본 보고서에는 흥미로운 정황증거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번 사태의 최대 수혜자는 장문오 시장인데 그 양반을 지금 자리에 끌어올린 사람이 바로 최 대표님이더군요.”

“그래서 저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계속 아니라고 부정하실 생각입니까?”

“만약에 대통령님 말씀처럼 저라고 가정하면, 제가 이번 일을 왜 만든 것 같으십니까?”

국정원까지 동원했다는 말에 건우는 일단 한발 물러났다.

“불합리함에 대한 저항? 반발심? 그런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그동안 국가 권력이 과도하게 그리고 불합리하게 초이스 에듀를 압박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최 대표님이었으면 굉장히 억울했을 것 같습니다.”

“알고 계시긴 하셨군요. 그런데도 계속 방관하신 거고요.”

“그건 저도 굉장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당시 저는 아내의 행동을 말리기 힘든 위치였습니다.”

“저, 대통령님.”

“네, 최 대표님.”

“굉장히 비겁한 변명이십니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직접 나서서 막으셨어야죠. 이제 와서 ‘나는 몰라 아내가 다 한 일이야’라고 하면 제가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건우는 대통령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할 말을 다 쏟아냈다.

“최 대표님, 그건 정치적 문제였습니다. 내가 하려고 마음먹는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럴 거면 왜 대통령이 되셨습니까?”

“네?”

“정치적 문제라는 이유로 끌려 다니실 거면 뭐하러 계속 국회의원으로 계시지 대통령이 되셨습니까? 저는 대통령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게 녹록한 게 아닙니다.”

“그건 대통령님 사정이니 제게 강요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건우는 단호해도 너무나 단호했다. 대통령의 권위로 눌러보려고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전명우는 싫지 않았다. 저런 어린 나이에도 당당하게 자신의 주관을 말하는 모습이 부러울 뿐이었다.

진작 저렇게 했다면 자신도 아내에게 장난감 취급당하는 엿 같은 상황까진 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왜 저보고 이쯤에서 그만두라고 하신 겁니까?”

“그거야 이대로 가다간 서로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지금 수세에 밀려 있다고 만만하게 보면 안 됩니다. 여당과 용씨 가문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답변이 아니네요. 솔직한 말씀을 원했는데.”

“난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놨다고 생각하는데요?”

“정말 서로 파국으로 치달을까 봐 걱정하신 겁니까? 아니면 영부인 때문에 대통령 자리가 흔들리는 걸 막고 싶으신 겁니까?”

“최 대표님. 어떻게 그런 말을?”

“대통령님은 이 문제를 끝까지 정치적 문제로 끝내려고 하시네요. 정부와 용씨 가문의 힘이 세니까 잘못은 그들이 해도 이쯤에서 끝내자. 그럼 힘없는 저는 억울해도 고개를 숙이고 화해를 해야 하는 겁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 안 해봤습니까? 최 대표님은 이미 전 국민의 존경과 막대한 재산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게 이번 싸움으로 날아갈 수 있어요. 그게 아깝지 않습니까?”

전명우가 지금껏 살아온 과정이 더더욱 건우를 이해하기 힘들 게 만들었다. 삶에 임하는 자세부터가 달랐다.

“불합리함에 고개 숙이고 사느니 차라리 모든 걸 잃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빈털터리가 되도 저는 다시 시작할 능력이 있다고 믿으니까요.”

“휴우…. 역시 젊군요.”

“아니요. 젊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옳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념, 신념이라….”

“대통령님. 만약 지금까지 살아오신 삶이 후회되신다면 저를 바꾸려고 하지 마시고 대통령님이 바뀌십시오. 어린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린다고 건방지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행여 홀로서기 어려우시면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습니다.”

“허허. 최 대표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군요.”

건방진 이야기 맞다. 그런데 이상하게 전명우는 건우의 이야기에 설득되고 있는 걸 느꼈다.

“죄송합니다. 버릇없이 이런 이야기를 해서. 어쨌든 분명한 건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고, 저는 절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끝까지 가겠다는 거네요.”

“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려드리자면 그만두기엔 이미 늦었습니다. 지금쯤 제 직원이 장문오 시장에게 어마어마한 폭탄을 선물했을 것 겁니다.”

“어머어마한 폭탄? 용현철 그 망할 녀석 녹취록 말고도 또 있다는 뜻입니까?”

“네. 이르면 오늘 밤, 늦어도 내일 중에 터질 겁니다. 그리고 그게 터지는 순간 그들과 저는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가 되겠죠. 대통령님이 손 쓰시기엔 이미 늦었습니다.”

“아…!”

“그걸 보신다면 대통령님도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걸 느끼실 겁니다. 혹시 하실 말씀을 다 하셨다면 저는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건우에게 대통령은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마흔까지 살았던 기억 덕분에 나이 차이에서 오는 거리감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마치 친구에게 말하듯 편하게 툭 이야기를 던졌다.

“참 묘해. 이건 이십 대가 아니라 마치 또래와 이야기를 나눈 기분이 드는군, 그래. 대체 최 대표를 보고 누가 세상 물정 모르는 나이 어린 애송이라고 평가한 거야?”

전명우는 건우가 사라진 문 쪽을 바라보며 그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

[사회 지도층의 어두운 일면-충격 영상 공개]

얼마 전 일명 용현철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전국은 엄청난 폭풍의 소용돌에 들어갔다.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않는 모습에 많은 국민들이 분노를 표했고, 해당 비리의 또 다른 관련자인 황금숙과 조순희에 대한 구속 요구가 높아만 졌다.

그렇지만 한편에서는 세상 물정을 아직 모르는 젊은이가 저지른 철없는 행동이라고 사태를 애써 축소하기도 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재벌가나 권력층 집안을 보면 용현철과 같은 자식들이 한두 명은 꼭 있는데 굳이 이번 사태만 두고 침소봉대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쉽게 요약하자면 아직 나이 어린 사람이 저지른 시행착오를 가지고 정치적 이슈로까지 몰고 가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의외로 적지 않은 사람이 그러한 의견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공개된 동영상은 그러한 주장들이 더는 힘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이번 사태의 핵심인 용현철은 국민들의 엄청난 분노에 반성하기는커녕 녹취록을 만들어 자신을 곤란하게 만든 소 모 씨를 납치하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했다.

이건 우리나라 법질서를 깡그리 무시하는 어마어마한 사건이다. 그리고 명백한 불법 행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속하지 않고 방관한 검찰과 경찰의 무책임함에도 분명한 잘못이 있다.

애초에 용현철과 조순희 그리고 황금숙을 구속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 모 씨는 자신의 억울함을 국가와 언론에 알렸을 뿐이다. 그렇지만 돌아온 건 합당한 보상이 아니라 죽음의 칼날이었다.

만약 소 모 씨가 놀라운 기지로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우리는 용현철의 잔인한 면을 보지 못한 채 어린 남자의 철없는 행동 정도로 여기고 적당히 꾸짖고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소 모 씨는 무사히 위기를 벗어났고 우리는 용현철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 인간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조순희와 황금숙이 그의 그러한 행동을 부추겼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하게 됐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 시대의 의인(義人)인 소 모 씨에게 또 다른 위기가 생기도록 해서는 안 된다.

이번에는 무사히 빠져나왔지만 다음에 그런 일이 또 생겼을 때 또다시 무사할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이번 사건의 원흉인 용현철과 배후로 보이는 조순희, 황금숙에 대한 조속한 구속이 필요할 때이다.

제아무리 대통령의 부인이라고 해도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는 게 민주주의다. 영부인뿐만 아니다. 국회의원, 국무총리, 이 나라의 대통령이라고 해도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는 게 상식이고 정의다.

검찰과 경찰은 제발 이번 사태를 반면교사 삼아 그 어떤 성역도 없는 깨끗하고 철저한 수사에 임해주기를 요청한다.

- 고려일보 정몽철 기자

- 와!! 미치겠다. 동영상 본 사람? 용현철 이 새끼 사람 맞음?

└ 사람이 아니라 사이코패스처럼 보임.

└ 사이코패스는 아닙니다. 사이코패스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증을 앓고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평소에는 정신병질이 내부에 잠재되어 있다가 범행을 통하여서만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특징이죠. 제가 봤을 땐 용현철은 소시오패스라고 생각합니다.

└ 이와중에도 등장한 설명충. ㅋㅋㅋㅋㅋ

└ 근데 이번 건은 정말 너무했지 않나? 그냥 화가 나서 두들겨 패려는 것도 아니고 고문하고 죽이려고 했단다. 솔직히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까봐 무섭고 소름끼친다.

└ 이게 흙수저의 비애인가요? 명백한 살인미수 행위인데 아직도 용현철이 구속됐다는 이야기를 못들었습니다.

└ 방금 들었는데 구속 안 될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법원에서 증거인멸의 우려나 도망 또는 도망의 염려가 없다고 볼 가능성이 높다고 하네요.

└ 헐!!!!!! 말도 안 돼! 사람까지 죽이려고 했는데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고? 우리나라 정말 민주주의 국가 맞음?

└ 이럴 땐 민주주의 국가라는 표현보다는 법치주의 국가가 맞느냐고 묻는 게 맞습니다.

└ ..;; 아, 네!!!

└ ㅆㅂ. 만약 용현철 구속 안 되면 진짜 가만 안 있는다.

- 용현철 뿐만이 아니라 조순희랑 황금숙도 구속해야 함. 저 세 사람을 그대로 두면 소 모 씨라는 분 안전은 계속 장담하기 어려울지도 모름.

└ 소 모 씨라는 분도 진짜 대단하다. 깡패 새끼들이 열 명이 넘게 협박하는데 깡에서 절대 안 밀림. 나 같으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을지도 모름.

└ 짱 멋짐. 갑자기 얼굴이 궁금해진다.

└ 국가대표까지 했던 사람의 신체 능력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일반인하는 차원이 다르지. 특히 맨날 술 마시고 담배나 피워대는 깡패들은 절대 못 잡지.

└ 제발 내일 신문에는 용현철이랑 조순희, 황금숙이 구속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싶다.

***

“허허허. 최 대표가 말한 어마어마한 폭탄이 이거였단 말이지. 용현철 그 개망나니가 결국 끝장을 보는구나. 한심한 새끼 같으니.”

속보 뉴스로 이번 사건을 접한 전명우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건우의 장담처럼 이젠 막고 싶어도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미친 척하고 북한과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이상 아내의 구속은 막기 힘들게 되었다. 자신이 나선다면 막을 수 있겠지만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건우와의 만남은 전명우로 하여금 자신을 냉철하고 통렬하게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아내에게 장난감 취급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삶을 살았다. 그래놓고 단순히 장난감 취급을 당했다고 혼자 삐쳐서 속상해했던 자신이 너무나도 우스웠다.

문득 건우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그걸 보신다면 대통령님도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걸 느끼실 겁니다.’

역시 건우의 장담대로였다.

“최 대표의 말처럼 이제 나도 결정을 내릴 시기에 이른 셈이군. 벽에 똥을 처바르고 계속 청와대에 붙어 있을 것인가 아니면 미련을 버리고 모든 걸 내려놓을 것인가.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 선택하기가 쉽지 않네. 이게 최 대표가 지적한 내가 가진 욕심이자 미련인가…?”

전명우는 시끄럽게 떠드는 TV를 끄고 중대한 결심을 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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