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7화
“김 실장. 초이스 에듀 상황은 어때?”
용선재가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수업방식도 철저하게 자율학습으로 진행하고 강사들도 학생들의 질문만 받고 있다고 합니다. 수능이 며칠 안 남은 상황에서 새로운 걸 가르치느니 알고 있는 걸 확실하게 정리하는 게 낫다는 입장입니다.”
“자습을 하든 복습을 하든 예습을 하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예상 문제집을 배포 안 한 건 확실해?”
최근 3년간 초이스 에듀 특강반은 사교육계에서 폭풍의 핵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 한두 번은 운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세 번째까지 그렇게 우길 순 없었다.
그건 완벽한 실력이었고, 그대로 특강반을 계속 유지했다면 기가 싱크빅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었을지 모른다.
용선재 본인에게 그런 막강한 능력이 주어진다면 그는 어떤 고민도 없이 특강반 숫자를 늘렸을 것이다. 그러나 건우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특강반 폐지를 선택했다.
이유는 단 하나다. 평소 노력 여부와 상관없이 단지 특강반에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특강반을 폐지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근로 장학생을 대상으로 특강반 수업 없이도 수능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걸 보여주면서 자신의 선택이 옳다는 걸 몸소 보여주기도 했다.
믿기 힘들 정도로 깜짝 놀랄만한 희소식에 다른 학원들은 만세를 불렀다. 용선재 또한 그들과 같은 마음이었고 건우의 이번 선택이 굉장히 어리석었다고 비웃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건우가 언제 그 선언을 뒤집고 예상 문제집을 내놓을지 모른다고 매일 같이 노심초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능을 이틀 앞둔 지금까지도 초이스 에듀가 수능 예상 문제집을 나눠줬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소문만으로는 믿을 수 없어 초이스 에듀에 다니는 학생까지 포섭한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네, 대표님. 오늘까지 예상 문제집을 나눠주지 않은 걸 보면, 최건우는 자기가 내뱉은 말을 어길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모를 일이야. 최건우는 특강반을 페지한다고 했지 예상 문제집 배포를 하지 않겠다고는 한 적이 없거든.”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건우는 다른 사람의 이목을 굉장히 신경 쓰는 편이라서 그렇게 뻔뻔한 말장난은 하지 못할 겁니다.”
“그럴까?”
“네. 신뢰성, 책임감 이런 걸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상황에서, 굳이 꼼수를 부려 그런 긍정적인 이미지를 깨려고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흠…. 그렇다면 안심인데. 그나저나 애들은 잘 케어하고 있어?”
용선재가 지칭한 애들이란 기가 싱크빅에 다니고 있는 예비 수능 응시자들을 의미한다.
“물론입니다. 강사들도 일대일 강습하듯 최선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야 할 거야. 소수정예로 가르쳤는데도 초이스 에듀에 밀리면 걔들도 스타강사 자리를 내놔야 하거든. 시작을 안 했다면 모를까 일이 지금까지 진행됐으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최선을 다해야지, 암! 아 참, 수능날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학부모들에게 일일이 전화해서 물어봤습니다. 이번에 수능 시험을 보는 학생들 중 2/3 정도는 부모님이 직접 고사장까지 태워다 준다고 했고, 우리는 1/3만 신경 쓰면 될 것 같습니다.”
“잘됐군. 혹시 모르니까 최소 입실시간 30분 전까지 도착할 수 있도록 시간 스케줄을 잘 짜도록 해.”
“알겠습니다, 대표님.”
***
거꾸로 매달아 두어도 계속 돌아가는 국방부의 시계처럼 학생들의 시계 또한 매일매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중이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해 세 번째 가을을 맞이할 때면 언제나 그렇듯 수능 시험이 기다리고 있다.
세상이 뒤집힌 듯 국민들이 들고일어나고 정치인들이 난리를 쳐도 수능시험은 예정대로 치러졌다.
일명 용현철 게이트로 연일 시끄럽게 떠들던 언론사들도 이날만큼은 수능 관련 기사들만 내보냈다.
용현철 게이트가 봉합된 게 아니었다. 단지 10년 넘게 고생한 학생들을 위해 며칠쯤은 조용히 지내자는 무언의 약속에 가까웠다.
논란의 중심에 섰던 사람들은 며칠만이라도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을 향해 날 선 공격을 펼치던 사람들은 추가적으로 입수한 정보를 정리하는 등 재정비 시간을 가졌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일 뿐, 수능 시험 이슈가 지나면 진짜 피 터지는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당사자들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다. 이번 수능 시험은 예년보다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할 것이라고. 정치적 이슈도 이슈지만 초이스 에듀가 더 이상 특강반을 운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큰 영향을 주리라 믿었다.
작년이나 재작년 같으면 이번 초이스 에듀 특강반 예상 문제집은 과연 몇 퍼센트의 적중률을 보일지가 초미의 관심사였을 텐데, 특강반이 없어지면서 지금은 그런 식의 자극적인 기사를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수능 시험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운 소재였고, 아무리 기삿거리가 없어도 어떻게든 논란이 되는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는 게 언론사였다.
초이스 에듀와 기가 싱크빅의 불편한 관계를 알아차린 눈치 빠른 기자들은 올해 수능 시험을 두 학원의 명운을 건 대결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초이스 에듀와 기가 싱크빅의 한판 대결.]
[초이스 에듀와 기가 싱크빅 대결이 시작됐다. 승자는 과연 누구?]
[용호상박, 진정한 1위 자리를 놓고 싸운다.]
[기가 싱크빅의 반격, 과연 초이스 에듀를 밀어낼 수 있을까?
[왕좌게임. 기가 싱크빅과 초이스 에듀의 진검승부.]
[와신상담 용선재 대표, 최건우 대표에게 출사표를 던지다!]
사설 학원 매출 순위에서 기가 싱크빅이 초이스 에듀 다음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두 학원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엄청난 격차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류의 기사가 날 수 있었던 건 기가 싱크빅의 적극적인 언론플레이 덕분이었다.
사실 이번 승부에 초이스 에듀와 기가 싱크빅 두 학원의 명운이 걸린 게 아니라, 기가 싱크빅의 미래만 굉장히 어두워지기 때문에 필사적이었다.
용선재는 이번 수능 시험에 상당한 자신감을 보였다.
한 학급에 약 30~40여 명씩 운영하는 초이스 에듀 종합반과 한 번에 수백 명씩 듣는 단과반이 있는 초이스 에듀와 달리 기가 싱크빅은 현재 한 학급당 인원이 5명도 되지 않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 중이다. 완전한 소수 정예반.
굉장히 비효율적인 수업방식으로 적자가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용선재는 그런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가 싱크빅 소속 스타강사까지 동원해 수능 시험 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솔직히 말해 다수를 한 명이 가르치는 것과 소수를 한 명이 가르치는 것은 교육의 질부터가 다르다.
많은 학생이 한 달에 수십만 원씩 돈을 내가며 일대일 과외를 받는 이유가 뭘까?
집중적으로 가르침을 받을 수 있고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손쉽게 질문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수 정예 수업도 비슷하다. 비록 일대일 과외만큼은 아니지만 수백 명을 한꺼번에 가르치는 초이스 에듀 단과반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학생들을 관리하기가 편하다.
용선재는 바로 그 점을 믿고 위와 같은 과감한 언론플레이를 시작한 것이다. 그 덕분에 수능 시험에 별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건우와 용선재 사이의 대결을 관심 있게 지켜보기 시작했다.
대중들의 관심이 과열되면서 용선재의 의도와 상관없이 배수의 진을 친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이 됐다.
여기서 이기면 기가 싱크빅은 다시 한 번 재도약의 기회를 얻는 것이고, 실패하면 용선재는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다.
***
수험생들의 시계는 단 1분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흘렀다.
12년간 오직 수능 시험을 위해 공부를 해왔던 학생들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얼굴로 고사장을 빠져나왔다.
수능 시험이 끝나면 학생들은 무슨 일을 할까?
그동안 밀렸던 잠이나 실컷 자는 학생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늦게까지 노는 학생들, 기다렸다는 듯 여행을 떠나는 학생들, 곧바로 운전면허 같은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 등등 다양한 형태의 학생들이 있지만,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정답지로 예상점수를 확인하는 학생들이다.
용선재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사고를 쳐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아내와 아들 걱정 때문이 아니다.
냉정하게 말해 지금 상황은 용선재의 손을 떠났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에 괜한 힘을 쏟는 건 용선재의 스타일이 아니다. 그가 밤새 기다린 것은 바로 가(假)채점 결과였다. 아내와 아들은 어쩔 수 없지만, 자신의 학원까지 수렁에 빠트리고 싶진 않았다.
“어떻게 됐어?”
원장실 밖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던 용선재는 계단으로 천천히 올라오던 김 실장을 발견하고 피곤한 얼굴로 재촉하듯 물었다.
“다행히 가채점 결과는 나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 어느 정도인데?”
눈 밑에 다크서클이 가득했던 용선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지막 모의고사와 이번 수능 시험이 비슷한 수준의 난이도라고 가정했을 때 평균 20점 정도 올랐습니다.”
“그거 정말 반가운 소식이군.”
“그리고 만점을 받은 학생도 한 명 나왔습니다.”
“오! 그게 정말이야? 우리 학원에서 만점은 정말 오랜만에 배출한 것 같은데 어떤 녀석이야?”
“장대현이라고, 재수생입니다.”
“재수생이면 우리가 운영하는 종합반 학생이잖아? 그럼 더 잘됐네. 하하하. 김 실장도 수고했어. 그런데 혹시 초이스 에듀 소식은 들은 거 있어?”
긍정적인 가채점 소식에 기분이 좋아졌던 용선재가 갑자기 생각난 듯 초이스 에듀 소식을 물었다.
사실 그렇다. 아무리 기가 싱크빅이 좋은 성적을 거둬도 초이스 에듀가 더 뛰어난 결과를 기록하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그런데 용선재의 물음에 김 실장이 잠시 머뭇거렸다.
“표정이 왜 그래? 초이스 에듀 소문을 뭐라도 들은 거야?”
대답을 않고 망설이는 모습을 보고 용선재가 다시 한 번 재촉했다.
“그게… 말입니다. 대표님. 이걸 믿어야 할지 말이야 할지 좀 황당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물론 절대 확인된 건 아닙니다.”
“황당한 소문? 대체 그게 뭔데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초이스 에듀 가채점 결과라면서 학생들 SNS를 통해 돌고 있는 소문인데 거기 만점자가 서른 명이 넘는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뭐가 어쩌고 어째? 서, 서른 명? 만점자가 서른 명이라고? 그게 말이 돼? 다른 학원들은? 다른 학원들은 이번 수능 시험 난이도에 대해서 뭐라고 해? 분명히 언론에서는 작년과 비슷하거나 좀 더 어려웠다고 했잖아. 그런데 작년보다 만점자가 더 나왔다고?”
용선재 자신도 올 수능시험을 대강 훑어봤는데 작년과 비교하면 좀 더 까다로운 문제가 몇 개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작년보다 만점자가 줄어드는 게 정상인데 오히려 세 배 가까이 늘어났다고 하니 이걸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일단 소문으론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입니다. 차라리 절반인 열다섯 명이었다면 믿어주겠는데 서른 명은 저도 너무 황당합니다. 학생들끼리 장난을 치고 있던가, 아니면 이번 수능에서 큰 재미를 못 본 초이스 에듀가 우리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일부러 그런 소문을 퍼트렸을 수도 있습니다.”
“일부러?”
“수능 시험이 끝났으니 고등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수능시험 대비반 모집을 시작하지 않습니까? 그걸 방해하려고 일부러 그런 소문을 낸 게 아닐까요?”
김 실장의 설명에도 용선재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그의 감이 단순히 소문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정말 그럴까?”
“전문가들도 분명 작년보다 조금 어려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만점자가 서른 명이라니, 그건 정말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소문이 어떻게 그렇게 난 건지 김 실장이 다시 한번 알아봐!”
“알겠습니다.”
***
“이거 농담 아닌 거죠?”
손다정이 내놓은 가채점 결과를 보고 건우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네, 대표님. 100% 사실이라고 할 순 없지만 거의 비슷한 결과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서른 명은 좀 너무 많은 것 같은데요. 제가 봐도 작년보다 수능 시험이 어려웠거든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제가 몰랐던 변수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큰 도움이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요.”
“그게 뭔가요?”
“우리 학원 출신 근로 장학생들이 있지 않습니까?”
“걔들이 왜요?”
“걔들이 한 달 전부터 상위권 학생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일대일 과외를 해줬다고 합니다. 자기들 말로는 대표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고 하네요.”
이건 정말 뜻밖의 소식이었다. 예상 밖의 손다정의 말에 건우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