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251화 (251/256)

제251화

갑작스러운 대통령의 기자회견에 수많은 설왕설래가 오갔다.

무엇보다 시점이 참 애매했다. 하필이면 조순희와 용현철이 인천국제공항 입국장 출구에서 전격 체포된 날 기자회견을 요청했다는 사실부터가 많은 억측을 몰고 왔다.

‘대통령이 정말 중차대한 결심을 했다.’

‘조순희와 용현철에게 향한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한 얕은 꼼수일 뿐이다.’

‘황금숙이 조순희, 용현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 때문에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 전명우가 돌파구를 마련한 것일 수도 있다.’

‘대통령 성격을 봤을 때 특단의 조치? 이런 건 기대하기 힘들다. 단순한 대국민 사과 정도일 가능성이 높다. 심심한 유감을 표하겠지.’

‘황금숙이 시켜서 나왔을 수도 있다. 솔직히 전명우는 황금숙 아바타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청와대 소식통이 하나 있는데 지금 경호처 움직임이 이상하다고 함. 경호처장이 자택대기명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황금숙 라인이거든. 뭔지 모르겠지만 전명우가 엄청난 엄청난 폭탄을 터트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온갖 추측이 난무했지만 그 누구도 전명우가 준비한 기자회견의 의도를 파악한 사람은 없었다.

잠시 후 각 언론사의 정치부 기자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청와대 충무실 뒷문이 열리고 전명우의 들어섰다.

기자들이 자리에서 일제히 일어섰다. 허수아비니 아바타니 조롱해도 그의 면전에선 대통령에 대한 예의를 지켰다.

전명우는 지체없이 단상 위에 올라섰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기자들은 묘하게 홀가분한 표정이라고 생각했다.

딸각!

보좌관이 준비된 마이크의 전원을 켜자 전명우는 한 걸음 더 다가서서 안주머니에 있는 종이를 꺼내 펼쳤다.

충무실은 숨죽인 듯 조용해졌다. 수많은 눈동자와 무수한 카메라 렌즈가 일제히 전명우에게로 향했다.

이런 자리가 처음이었던 신입 기자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연거푸 마른 침을 삼켰다. 함께 온 베테랑 기자는 신입이 그러든지 말든지 마이크에 가까이 붙은 전명우의 입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매우 중대한 결정을 내렸고, 그 사실을 국민 여러분들에게 보고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전명우가 들고 있는 종이는 수십 번을 고쳐 쓴 듯 너덜너덜했다. 어제 밤새 고심한 흔적이 종이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눈썰미가 예리한 기자 중엔 그 모습을 눈여겨보고 종이만 클로즈업해 사진을 찍기도 했다.

“뉴스를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오늘 아침 조순희 씨와 용현철 씨가 공항에서 체포돼 검찰로 이송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드러난 증거들만으로도 두 사람이 저지른 죄는 명백하며 그 범죄에 제 집사람이 가담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참담했습니다.”

전명우의 발언에 기자들의 손놀림이 전광석화처럼 빨라졌다.

이런 말을 하는 그의 진의(眞意)가 뭔지 한발 물러서서 지켜보는 부류도 있었지만, 성질이 급한 기자들은 ‘전명우 용현철 게이트 유죄 인정’, ‘전명우 대통령, 영부인에게 모든 죄 전가’, ‘아내 뒤에 숨은 전명우’와 같은 자극적인 제목의 짤막한 단신(短信)을 인터넷 기사로 올리기도 했다.

“저는 이번 사태와 전혀 무관하다는 걸 말씀드리려고 이 자리에 선 게 아닙니다. 수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뜬눈으로 무수한 밤을 보냈습니다. 대통령과 영부인은 두 사람이지만 하나의 몸이며 파트너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단지 대통령 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영부인’이라는 거창한 호칭을 붙이지 않았을 겁니다.”

“대통령의 허물은 영부인의 허물이요, 영부인의 허물은 곧 대통령의 허물입니다. 대통령이 잘못을 저질러 자리에서 물러나면 영부인도 함께 물러납니다. 그런데 반대로 영부인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대통령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대통령도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명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충무실은 시장바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소란스럽게 변했다.

마지막 말의 묘한 뉘앙스에 이미 경악하는 표정을 짓는 기자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믿기지 않는 듯 설마 하는 표정으로 그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정말 무수한 고민을 했습니다. 국민 여러분들이 뽑아주신 자리인 만큼 끝까지를 대통령직을 수행해야 할까? 아니면 이번 사태만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물러나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성역 없는 수사를 위해 검찰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지금 그만둬야 할까?”

잠시 물을 마시는 전명우를 보며 기자들의 목울대가 함께 울렁거렸다.

이제 진짜 목적이 나올 때다. 모두들 숨죽여 전명우의 마지막 말을 기다렸다.

“제가 검찰이라고 생각을 해봤습니다. 대통령이 버젓이 있는데 아무 거리낌 없이 영부인을 검찰청에 연행해 마음껏 조사할 수 있을 것인가?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생각해봐도 그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검찰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력도 끼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부로 여러분들께서 뽑아주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려고 합니다.”

쿵!!!

물리적인 충격은 없었지만 기자들은 전명우의 충격적인 선언에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잠시 정적이 일었다.

“그리고 정부는 곧 대선준비에 들어갈 것이며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는 기간 동안 국무총리가 저의 역할을 대신할 것입니다.”

전명우의 선언은 명백했다.

역시 환청이 아니었다. 미친 듯이 플래시가 터졌고, 기자들은 일제히 손을 놀리며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 자리에 올랐으나 당신들께서 제게 주신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내려가는 것에 대해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다음 대통령은 제발 우리나라를 부국강병의 국가로 이끌길 간절히 바라며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마지막 말까지 마친 전명우가 천천히 뒤로 돌아 처음 들어왔던 길로 다시 나갔다.

현직 대통령의 하야 선언.

매우 불행한 선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걸음은 가뿐했으며 뒷모습은 지금까지 그 어떤 연설을 마쳤을 때보다 커 보인다고 기자들은 생각했다.

***

[속보! 전명우 대통령 전격 하야 선언]

[전명우 대통령의 충격적인 하야 소식]

[대통령은 왜 하야를 선택했을까?]

[전명우의 이번 선언은 강요였을 까 본인의 선택이었을까?]

[충격, 현직 대통령의 하야 선언! 차기 대권의 향방은 누구에게로?]

[충격을 받은 여야. 그 누구도 전명우 대통령의 하야 선언을 예상하지 못해.]

[OO 시민단체. 전명우 대통령의 마지막 돌아가는 길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좋은 대통령은 아니었지만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전명우는 가라앉고, 장문오는 떠오르다. 차기 대권의 강력한 후보로 지목되고 있는 장문오 여주시장.]

[전명우의 영리한 선택. 이제 곧 시작될 레임덕 현상을 생각하면 하야는 굉장히 시기적절한 선언.]

- 와 씨! 이거 진짜 현실?

- 대통령 하야, 단어는 많이 들었는데 실제로 내 시대에 일어날 줄은 몰랐음.

- 전명우 개불쌍. 마누라 때문에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난 거나 마찬가지.

└ 오히려 영리한 것일 수도 있어. 이번 선택으로 전명우를 욕하는 국민들이 대부분 동정론으로 돌아섰거든.

- 전명우가 물러났는데 황금숙은 왜 아직 구속 안 함? 대통령까지 물러나게 했으면 스스로 검찰청에 찾아가서 죄를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님?

└ 황금숙 구속.

└ 황금숙 구속하라.

└ 황금숙 구속하라!

└ 황금숙 구속하라!!

└ 구속해라, 황금숙이!!!!!!!!

***

현직 대통령의 하야 선언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에 큰일이 있든 말든 학생들의 시계는 여전히 돌고 돌아 수능점수 발표일이 돌아왔다.

예정 시기보다 일주일 빨랐다.

누군가는 기적을 바랐고, 누군가는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고, 저주의 망언도 효과가 없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올해 수능 시험 만점자가 서른아홉 명인 것으로 밝혔다.

초이스 에듀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발표가 있고 몇 시간 뒤 총 서른두 명의 만점자를 배출했음을 선언했다. 원래 예상인 서른한 명보다 오히려 한 명 더 늘어난 기록이었고, 그 덕분에 칠드런 초이스들이 운영했던 공부방에 대한 문의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기만 했다.

이젠 대한민국의 그 어떤 학원도 초이스 에듀에 명함을 내밀 수 없게 되었다.

명이 있으면 암이 있는 법. 초이스 에듀의 미래가 여전히 밝다면 기가 싱크빅은 회생불가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아침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시기가 됐다. 수능 시험은 완전히 끝이 났고 새로운 수강생들을 모집해야 할 시기가 돌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어렵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추측했지만 용선재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수강생 모집에 들어갔다.

오늘이 바로 일주일째. 눈이 퀭하게 들어간 용선재가 김 실장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상황이 많이 좋지 않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희망에 담겼던 두 눈빛이 까맣게 죽어버렸다.

“모집 시작한 지 일주일이나 됐잖아. 얼마나 안 좋길래?”

“아직 백 명도 안 됩니다.”

“뭐? 배…백 명? 혹시 우리 본점만 그렇다는 거야?”

“아닙니다. 지방에 있는 분점까지 모두 합쳐서 백 명입니다.”

“대체 왜? 아무리 초이스 에듀가 잘 나간다고 해도 그 학원이 수용할 수 있는 수강생은 한계가 있는 법이야. 그러니 초이스 에듀 등록에 실패한 애들은 당연히 우리 학원으로 와야 하는 것 아니야?”

용선재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친일파가 운영하는 학원이라는 인식이 너무 강합니다.”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아직도 친일파 타령이야? 이제 좀 식을 때 안 됐어?”

“그게, 친일파 논쟁이 조용해질 만하면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이슈가 생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학생들이 더 문제입니다.”

“학생들이 왜?”

“꽤 많은 학생들이 우리 학원 수강생들을 보고 쪽바리가 운영하는 학원에 다닌다고 놀리는 게 문제입니다. 다른 학원은 몰라도 기가 싱크빅에 다니는 건 매국노나 할 짓이라고 굉장히 심하게 괴롭힌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예전부터 우리 학원에 다니던 학생들마저 하나둘씩 수강을 포기하는 실정입니다.”

“미치겠군. 그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 입 다물게 할 방법은 없어?”

“아직 청소년이라서 법적으로 해결하긴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사모님과 아드님 때문에 여론도 안 좋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을 고소했다는 게 알려지면 역효과만 날 겁니다.”

“미치겠군.”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우리 학원만 최건우의 교습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쉬쉬하며 최대한 알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느새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소문이 나서 등록했던 학생들도 점점 시강신청을 취소하고 있습니다.”

수능이 끝나고 얼마 지니지 않아 건우는 언론에다 대고 대놓고 선언했다. ‘앞으로 기가 싱크박은 우리 학원 교습을 이용할 수 없다.’고.

그 선언에 용선재는 코웃음을 쳤다. 사실 교습법이라는 게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 면이 있었다.

숫자와 내용을 조금만 바꿔서 설명하고 이건 최건우 교습법이 아니라고 주장하면 법적으로 처벌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완전히 안심하고 있었는데 학생들 입장에서는 달랐다.

꼼수가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기가 싱크빅도 그 부분에 대해 설명하기 애매했다.

우리는 최건우 교습법의 내용을 살짝 틀어 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편법으로 너희를 가르치겠다고 언질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최건우 교습법이 거의 정석으로 자리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 그런데 그걸 가르칠 수 없는 학원이라면 아무리 시설이 좋고 스타강사가 있고 유명해도 학생들에게는 더 이상 매력적인 학원이 아니었다.

“최건우 이 망할 놈의 새끼가 대체 내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누가 봐도 기가 싱크빅을 향한 노골적인 말려죽이기였다.

어떻게 보면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괴롭히는 것과 비슷한 행태였지만, 여론은 기가 싱크빅이 아니라 초이스 에듀 편이었다.

집안의 친일 행적, 조순희의 남편이자 용현철의 아버지인 용선재를 옹호해줄 여론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제 용선재에게 믿을 건 방문학습밖에 없었다. 퓨처 앱 사용 라이센스는 갱신하지 못했지만, 그와 비슷한 형태의 교육 앱을 개발해놔서 큰 문제는 안 됐다.

콰강!

바로 그때 원장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비서실 직원 한 명이 새하얗게 변한 얼굴로 들어왔다.

“대표님!”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시끄럽게 들어와?”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큰일?”

“온라인 방문학습 교사들이 전부 사표를 냈습니다.”

“뭐!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봐. 방문학습 교사들이 뭐가 어쨌다고?”

“조금 전에 전부 사표를 내고 나갔습니다.”

“그 인간들이 단체로 미쳤나. 그게 말이 돼? 갑자기 사표를 내면 대체 뭐해먹고 살 거라는데?”

“저도 이유를 물어봤는데 전부 초이스 에듀로 옮긴다고 합니다.”

“뭐가 어째? 이런 빌어먹을! 초이스 에듀? 또 최건우야? 이봐 이게 말이 돼? 아무리 초이스 에듀가 잘 나가도 이렇게 무작정 사람을 빼가도 되는 거야? 이거 법적으로 문제 있는 거 아니야?”

“그게… 아마도 법적으로 하소연하기 힘들 겁니다.”

“대체 왜? 이건 대기업의 횡포나 마찬가지인데!”

“전부 계약직으로만 운영했고, 계약기간이 오늘부로 만료됐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그 사람들을 우리 직원이라고 우기기도 어렵습니다. 게다가 초이스 에듀는 방문학습 교사들을 전부 정직원으로 채용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여론도 우리 편이 되지 못살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아…. 뭐 이런. 허허허.”

직원의 설명에 용선재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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