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2화
대한민국 역사에서 대통령의 하야는 총 세 번 있었다.
4·19혁명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5·16쿠데타 이후 윤보선 대통령의 하야, 12·12사태 이후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
그리고 최규하 이후 약 25년여 만에 전명우 현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했다. 이로써 대한민국 역사에서 대통령의 하야는 네 번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똑같이 ‘하야’라고 불린다고 해도, 앞선 세 번의 하야와 전명우의 하야는 성격이 상당히 달랐다.
이승만, 윤보선, 최규하의 하야가 자기 뜻과 상관없이 타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뤄진 것이라면 전명우의 하야는 명백히 자의에 의해 일어났다.
사실 전명우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할 법적 근거는 없었다. 용현철 게이트를 주도한 야당도 황금숙을 타깃으로 삼아 현 정권과 여당을 흔들려고 했지 대통령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하지 않았다.
시민단체들도 무능력한 대통령을 성토했을 뿐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식의 퇴진 요구를 한 적은 없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전체를 뒤흔든 커다란 사건이었음에도 왜 그런 목소리는 없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용현철 게이트와 전명우 사이에 별다른 연결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하야 선언은 그래서 더더욱 충격적이었다.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기자회견장에 나타나 스스로 밝히기 전까지 전명우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내인 황금숙은 자신의 방에서 TV로 기자회견을 지켜보다가 갑작스러운 하야 선언에 기겁을 하고 놀랐고, 여당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발표에 제대로 입장 발표도 하지 못하고 허둥댔다.
전명우를 가장 가까이서 보좌했던 비서실과 경호처는 사상 초유의 핵폭탄급 발언에 충격을 받고 갈팡질팡하기 바빴다.
이들은 당장에라도 이번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며 쏘아버린 화살이었다. 온 국민이 지켜보는 생방송 기자회견장에서 자기 뜻을 밝혔기 때문에, 이제 와서 농담이라고 취소하는 건 불가능했다.
대통령의 하야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고, 엄청난 혼란 속에서도 결국은 모든 이가 전명우의 선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
“이것 참.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죠?”
건우가 차지훈을 보며 난감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상 용현철 게이트 사태를 주도했던 두 사람도 전명우의 이번 선택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정국을 장문오 시장에게 유리하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했을 뿐, 현직 대통령을 끌어내리려는 의도는 없었다.
“저도 이번 일은 정말 예상 밖입니다. 전명우 성격에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죠. 정치적 생명이 끝났다는 등의 조롱을 하던 여론이 하야 선언 이후 동정론으로 돌아섰으니까요. 1년 동안 레임덕으로 마음고생 하느니 모든 걸 내려놓고 편하게 사는 게 나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남은 1년의 임기를 안 채우고 대통령직을 그만두더라도 전직 대통령 예우는 고스란히 받을 수 있으니 경제적으로도 이익입니다. 놀면서 돈이 나오지 않습니까?”
대통령이 통상 5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면 다양한 예우를 받게 된다. 재직 당시 연봉의 70%인 한 달 약 천이백만 원 정도의 연금을 평생 지급 받고, 비서관 3명과 운전기사 1명을 둘 수 있고, 사무실 운영비와 병원비도 지원받는다.
탄핵이 되면 경호와 경비를 뺀 모든 혜택이 사라지지만 하야의 경우는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그대로 받는다.
자진 하야를 하더라도 나중에 법원에서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으면 모든 특권이 박탈되지만 전명우는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러니 전액을 받으며 골치 아프게 일하느니 놀면서 연봉의 70%를 받는 게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
“그건 좀 재미있는 관점이네요.”
“제가 생각한 건 아니고 인터넷에서 누가 그렇게 썼더라고요. 평생 지금 연봉의 70%를 받으며 살게 해준다면 당장 회사를 그만둘 수 있다면서요. 그런데 대표님. 전명우를 만나서 대체 뭐라고 하셨길래 대통령직까지 내놓은 겁니까?”
“네? 저 때문에 그만뒀다고 생각하십니까?”
“100%는 아니겠지만 대표님과의 만남이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 같아서요.”
“글쎄요.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 한다. 그러니 만약 지금까지 살아오신 삶이 후회된다면 저를 바꾸려고 하지 마시고 대통령님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 게 전부입니다.”
“다른 말씀은 안 하셨고요?”
“네. 그때 나눴던 대화는 차 실장님에게 전부 말씀드렸어요.”
“흠…. 그러고 보면 대표님의 조언처럼 전명우가 바뀌긴 바뀌었네요. 어마어마한 폭탄을 터트리고 편하게 은퇴를 하게 생겼으니.”
“덕분에 우리가 힘들게 세워놨던 계획은 전부 날아가 버렸네요.”
‘장문오 대통령 만들기’가 목적이었던 두 사람은 내년 말에 있을 대선을 위해 기간별로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런데 전명우의 깜짝 선언으로 고심해서 세워둔 계획표는 모두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계획을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세워야 하는 것도 문제지만, 지금 당장 대선을 준비해야 하는 게 더 큰 문제였다.
그동안 장문오의 인지도가 많이 높아진 건 사실이지만 그것으로는 아직 부족했다. 처음부터 장기적으로 계획을 세워뒀기 때문이다.
한번 반짝하고 사라지는 것보다 차분하게 인지도를 높여 안정적으로 저변을 넓히는 게 낫다는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전명우가 갑자기 하야를 선언하기 전까지는.
그 덕분에 현 정권과 여당을 비판하며 장문오를 차근차근 스타로 만들려고 했던 계획은 무산되었고,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될지는 미궁에 빠져버렸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불리한 건 아닙니다. 국민들이 이번 사태로 현 정권과 여당에 실망한 건 사실이니까요. 그걸 잘 이용하면 장문오 시장이 반드시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차 실장님. 문제는 황금숙입니다. 전명우에 대한 동정론이 확산되는 바람에 황금숙이 처벌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마저 힘을 잃고 있습니다. 그 여자가 저지른 범죄들이 모두 공개되어야 여당에 대한 심판론이 국민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건 아는데 당장은 쉽지 않습니다. 여당도 황금숙이 키포인트라는 걸 아는지 사생결단으로 수사를 막고 있습니다. 전명우가 모든 걸 떠안고 대통령직을 내려온 것으로 되지 않았냐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상황입니다.”
이건 전명우가 의도한 일이 아니었다. 절대적인 이유는 아니지만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든 황금숙에게 빅엿을 먹이기 위한 의도도 분명 있었다.
그런데 여론이 완전히 동정론으로 돌아서면서 황금숙에게 면죄부를 줘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검찰총장을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가능한가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건우가 물었다.
“네? 대표님이 검찰총장을요?”
“네. 조용히 만났으면 좋겠는데 가능한가요?”
“가능이야 하지만 검찰총장이 과연 대표님 요청을 받아들일지는 의문입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제안을 내밀어야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장문오 시장님부터 만나야 하니까 여주 시청에 연락부터 넣어주시겠습니까? 지금 바로요.”
“네, 알겠습니다. 대신 내려가는 동안 무슨 생각이신지 제게도 알려주셔야 합니다.”
“그럼요. 저도 방금 떠오른 생각이라서 차 실장님의 현실적 조언이 필요합니다.”
***
검찰총장의 임기는 2년이다. 그런데 얼마 전 건우와 초이스 에듀에 대한 강압적인 압수수색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검찰총장이 불명예퇴진을 하고 말았다.
현 검찰총장은 얼마 전 퇴진한 전 검찰총장을 대신해 갑작스럽게 자리에 올랐다. 제대로 일을 하기 시작한 지 두 달도 안 된 상황.
그런데 갑자기 자신을 검찰총장으로 임명한 전명우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고 선언해버렸다.
전명우가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검찰총장은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렸다.
지금까지의 관행을 보면 대선이 끝나고 새로운 대통령이 결정되는 즉시 검찰총장은 바뀌게 된다. 그렇게 보면 지금 검찰총장의 수명은 앞으로 2~3달도 남지 않았다.
최소한 1년은 넘게 총장 자리에 있을 줄 알았던 그로서는 전명우의 하야 선언이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건우에게 은밀히 만나자고 연락이 온 것은 나름대로 살 길을 모색하다 체념할 때쯤이었다.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했습니까?”
건우에 요청에 약속장소에 나오긴 했지만 검찰총장의 말투는 친절함과 거리가 멀었다. 건우 때문에 검찰 전체가 개망신을 당했으니 말이 친절하게 나올 리 없었다.
“한 가지 제안을 드릴 게 조용히 연락을 드렸습니다.”
검찰총장의 퉁명스러운 말투에서도 건우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대통령 앞에서도 할 말을 다했는데 검찰총장이라고 특별히 무서울 이유가 없었다.
“최 대표님에 제게 할 제안이 뭐가 있다고요? 검찰과 사설 학원은 아무런 관계가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불편한 관계에 가깝죠.”
“저와 불편한 관계를 만든 건 제가 아니라 검찰입니다. 무고한 사람에게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휴… 그건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그 일을 따지려고 저를 보자고 그러신 건 아니죠?”
잠시 퉁명스러웠던 검찰총장의 말투가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그가 생각해도 건우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건 너무나도 억지스러웠다.
“그건 아닙니다. 말을 질질 끌 것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제안하겠습니다. 지금 총장님 위치가 참 애매하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크흠. 놀리려고 하시는 건 아닐 테고. 맞습니다. 대통령이 갑자기 하야를 선언하는 바람에 제 입장이 매우 곤란해진 건 사실입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제가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건 확실하니까요.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아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장문오 시장과 굉장히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죠. 그래서요?”
“장문오 시장을 민국당에 재입당 시키고 국민들에게 이름 석 자를 유명하게 알린 것도 저입니다.”
“저도 잘 압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정치적으로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돌고 있죠. 그걸 자랑하려는 건 아니실 테고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뭡니까?”
건우는 절대 장문오와의 친분을 과시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었다.
“앞으로는 저도 전면에 나서서 노골적으로 장문오 시장을 밀어줄 생각입니다. 혹시 생각해보셨습니까? 지금 장문오 시장 인지도에 저의 지지도가 더해진다면 어떻게 될지?”
건우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는 절대적일 만큼 높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색을 드러낸다면?
물론 정치색을 드러내는 것에 실망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건우를 지지할 가능성이 높다.
건우가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설마 직접 장문오 시장 지지를 선언하겠다는 뜻입니까?”
“네.”
“그렇다면 장문오 시장의 대통령 당선율이 엄청나게 올라겠지만 그걸 왜 제게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의문을 표했지만 검찰총장의 등은 이미 꼿꼿하게 펴져 있었다.
“장문오 시장에 대한 공개 지지 선언을 하기로 하면서 한 가지 약속을 받았습니다. 내각 추천권이라고 해야 하나요? 그걸 제가 2장만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내각이란 국무총리와 장관들을 말한다.
“아…! 설마 그걸 제…게 사용하겠다는 말씀인가요?”
“제가 요청하는 사항을 들어주신다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물론 검찰총장은 그만두셔야 합니다.”
“네? 그게 무슨…?”
“대신 검찰총장이 아니라 법무부 장관이 되시겠죠.”
검찰총장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었지만 두 주먹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제가 뭐를 들어드리면 됩니까? 최 대표님이라면 억지 요청은 안 하실 것 같으니 편히 물어보겠습니다.”
“황금숙을 곧바로 법정 구속하고 그녀가 저지른 모든 범죄를 철저하게 수사해주시면 됩니다. 공, 정, 하, 게.”
“화, 황금숙을요?”
“네, 어려울까요?”
“아닙니다. 그 사람이 저지른 범죄들이 워낙 명백해서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론이 문제인데….”
“그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검찰이 구속수사를 하는 즉시 언론은 황금숙이 저지른 범죄를 낱낱이 공개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여론 또한 검찰 편이 되겠지요.”
“흠….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죄송하지만 지금 바로 결정해주십시오. 싫다면 물론 거절하셔도 됩니다. 거절하셨다고 불이익이 생기는 건 아닙니다. 단지 원래 정해진 대로 두어 달 후 총장 자리에서 물러나시겠지만요. 거절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하, 하겠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