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4화
“결국, 장문오가 대통령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용씨 가문의 가주인 용선국이 물었다. 나이 지긋한 원로회 구성원들에게 물었다.
가주는 여전히 용선국이었지만, 용현철 게이트 문제가 불거지면서 실권을 상당부분 잃었다.
무엇보다 용씨 재단 전체가 친일 재단으로 몰린 게 큰 타격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육계의 대부로 존경받던 가문이었는데 이젠 친일파로 손가락질 받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용선국의 실책은 크지 않았다. 잘못이 없다곤 할 수 없으나, 그 정도 실수로 가주의 권한을 제한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러나 원로회에서 쫓아낸 용선재를 용씨 가문의 일원으로 다시 들인 게 문제였다. 결국,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 조순희와 용현철이었으니 용선국으로서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은 권한이 제한된 가주를 대신해 원로회가 용씨 가문을 사실상 이끌고 있었다.
“어쩌겠습니까, 가주. 최건우 그 천둥벌거숭이가 일을 이렇게까지 엉망으로 만들어버렸으니 당분간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아야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전 가주이자 원로회 수장인 용정환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는 용선재와 용선국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과연 장문오가 가만히 있을까요? 대통령이 되었으니 어떻게든 우리 가문을 잡아먹으려고 안달일 텐데요.”
“장문오야 류명훈의 복수를 하고 싶겠죠. 그렇지만 당장은 힘들 겁니다, 가주. 내각을 구성하고 나라를 안정화하는 데만 최소 2년은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황금숙 그 여자가 주제도 모르고 난장을 피운 덕분이지요. 장문오가 우리 가문에 복수하고 싶어도 그때까진 어떤 견제도 하지 못합니다.”
장문오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부터 원로회는 최악의 경우를 산정해 모든 대책을 마련해두고 있었다.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해도 여전히 제1 다수당은 대한당이다. 그러니 용씨 가문과 손을 잡고 뒤에서 방해한다면 장문오는 내각을 구성하는 일부터 난관에 봉착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2년 후에는요?”
“그건 긍정적으로 봤을 때 2년 후라는 겁니다. 우리가 계속 흔든다면 5년 내내 뒷수습만 하다가 임기를 끝내겠죠.”
“하지만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우리가 자신을 흔든다는 걸 안다면 같이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습니다. 장문오의 복수심을 절대 만만하게 보시면 안 됩니다.”
“허허. 가주는 우리를 뭐로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겝니까. 다행히 본가에서 직접 장문오를 흔들어 주기로 했습니다.”
“본…가에서요? 본국이 직접 나서는 건가요?”
본가란 일제강점기 당시 용씨 가문이 충성을 맹세한 일본의 유력 정치 가문인 호소카와가(家)를 말한다.
이들은 호소카와 가문을 본가라고 부르고 일본을 본국이라고 부른다.
“장문오가 독립운동가 후손 아닙니까? 그놈이 싫은 건 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쌓아온 일한(日韓) 관계가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 중국과 손을 잡고 북핵 문제로 5년 내내 한국을 위협할 거라고 합니다. 대한당이면 몰라도 민국당과 본국이 잘 지낼 이유는 없으니까요. 이참에 본때를 보여주는 것이죠.”
“아…!”
“가주는 원로회를 믿고 계시면 됩니다. 그동안 자신에게 부족한 소양을 다시 기르면서요.”
가주로서 부족한 소양을 다시 길러라? 용선국에게 5년간의 자숙을 명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럼 형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용선재는 가문에 큰 악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다시 제명되었습니다. 그러니 다시는 관심을 가지지 마세요. 마음 같아서는 조순희와 용현철 두 연놈이 벌인 헛짓거리로 인해 우리가 받은 피해를 모두 토해내게 하고 싶지만, 이미 재기불능의 큰 타격을 입은 것 같아 내버려두기로 했습니다.”
친아들임에도 가문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냉정하게 내칠 수 있는 사람이 용정환이었다.
“하지만….”
“어허, 가주! 하지만이라니요.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겝니까?”
“아, 아닙니다.”
“이번 일은 가주도 반성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이제 그런 멍청한 놈에 대한 관심은 끊고 한동안 자숙하도록 하세요.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휴…. 네, 알겠습니다.”
***
장문오가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씨 가문은 자신들의 영화가 계속되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일본이라는 막강한 배경이 있었고, 그들의 신임을 받으며 지내는 이상 무서울 게 없었다.
용씨 가문과 호소카와 가문은 근 백여 년 동안 서로 간에 깊은 신뢰를 쌓아온 혈맹 관계나 다름없는 사이다.
백 년의 역사가 말해준다. 그래서 용씨 원로회는 지금 이 관계가 한국과 일본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세상일은 그렇게 예상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두 가문의 파탄은 정말 의외의 곳에서 시작됐다.
파란만장했던 대선이 끝나고 1년 후 하버드 대학의 스트리 교수는 미생물 RSFE-325를 바탕으로 한 RNA 바이러스 관련 치료제 개발에 성공했음을 전 세계에 알렸다.
RNA 바이러스와 관련된 모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스트리 교수와 그의 연구팀이 발표한 치료 가능 질병만으로도 세계는 충분히 경악하고 남을 정도였다.
가장 대표적인 건 한동안 인류를 심각한 공포에 몰아넣었던 에이즈였다.
새로운 치료제 발표장에서 스트리 교수는 지구상에 더는 에이즈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선언했다. 그와 동시에 이번에 개발한 치료제를 전 세계의 모든 에이즈 환자들에게 무상으로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아울러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건 건우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라는 설명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동안 에이즈로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이 스트리 교수와 건우의 인도주의적 결정에 환호하며 찬사를 보냈다.
그다음 해 10월 초.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노르웨이 노벨연구소 강당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마이클 스트리 교수, 에이즈 치료제 개발로 생애 두 번째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마이클 스트리와 최건우, 에이즈 치료제를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무상으로 공급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
[마이클 스트리, 세계 최초로 같은 해 다른 분야에서 동시에 노벨상을 수상하는 진기록을 세워. 또한, 총 3회로 개인으로는 세계 최다 노벨상 수상]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에 대한민국은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로 변했다.
1년 전 건우의 노골적인 지지선언에 실망해 등을 돌렸던 사람들도 이번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에 함께 기뻐하고 환호했다.
약자를 생각하는 마음은 언제나 한결같았고, 그 결과가 노벨평화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장문오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율 또한 대폭 상승하며 국정 운영에 탄력을 받았다.
그러나 긍정적인 국내 정세와 다르게 국외 정세는 그리 좋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가장 큰 골칫거리는 일본의 노골적인 흔들기였다.
일본은 사사건건 북핵 문제를 걸고넘어지며 장문오 정권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무능력하고 우유부단해서 믿을 수 없는 파트너라고 주장했고, 중국도 그런 논리에 은근히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대한당은 그 말을 얼씨구나 하며 받아 현 정권을 비난하는 데 앞장섰다. 그들은 장문오가 계속 권력을 휘두르게 내버려뒀다간 얼마 못 가 한국은 전쟁으로 불바다가 될지도 모른다며 국민들을 협박했다.
말도 안 되는 논리였지만 실제로 그 말을 믿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게 문제였다. 불리할 때마다 대한당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네거티브가 또다시 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이 이런 식의 혼란을 겪고 있을 때 스트리 교수는 자신의 두 번째 치료제 개발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 우리 연구팀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독감과 감기 치료에 특효가 있는 치료제 개발에 성공했음을 공식적으로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 스트리 교수님. 사실, 이전부터 미생물 RSFE-325을 기반으로 한 감기 치료제가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작년 발표에서는 감기 치료제가 빠졌는데 그 이유가 뭔가요?
- 음…. 2년 연속 노벨상을 받기 위해서? 하하하. 농담입니다. 사실 이번에 개발한 감기 치료제는 전 인류가 대상입니다. 인종 구별이 없는 건 당연하고 나이 구분도 받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인보다 상대적으로 몸이 약한 노약자들을 위한 임상시험을 철저하게 해야 했습니다. 개발은 작년에 마쳤지만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계량작업 때문에 1년이 더 걸렸습니다. 그게 발표가 늦어진 이유입니다.
- 혹시 이번에도 에이즈 치료제처럼 무료인가요?
- 그건 아닙니다. 독감·감기 치료제, 일명 콜드바이(ColdBye)는 유료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약을 먹는다고 해서 영원히 감기에 안 걸리는 건 아닙니다. 감기에 걸릴 때마다 먹어야 하는데, 전 세계 인구 중 절반 이상은 1년에 한 번 이상 감기를 앓습니다. 수요가 엄청나다는 의미죠. 그 수요에 맞추려면 안정적인 신약 공급 체제를 갖춰야 합니다. 그건 단순히 한 개인의 기부로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입니다. 또, 그동안 함께 고생한 연구원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주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입니다. 한 가지 약속드릴 수 있는 건 수익의 절반은 콜드바이 개량, 새로운 질병 치료제 개발 그리고 에이즈 치료제 보급에 사용될 예정입니다.
- 효과는 어떻습니까? 사실 지금까지 나온 감기 치료제를 보면 감기를 낫게 한다기보다는 증상을 완화하는 수준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혹시 그것보다 조금 개선된 정도라면 대중들이 큰 실망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 기존 약과는 비교할 수 없는 효과가 있습니다. 체질에 따라 다르겠지만 감기에 걸린 사람이 콜드바이를 복용하면 그중 99%는 다음날 증상이 거짓말처럼 사라질 겁니다. 이건 1년 넘게 임상시험을 거쳤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정말 그렇다면 지금 당장 콜드바이를 원하는 환자들이 많을 텐데 신약 공급은 언제부터 시작되나요?
- 그렇지 않아도 공장을 세우고 이미 생산에 들어갔습니다. 나라마다 치료제 유통 관련법이 달라서 아직은 협상 중입니다만, 협상이 완료되는 즉시 공급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 신약은 관리 감독도 매우 중요할 텐데 미국에서 모두 생산하는 시스템입니까?
- 그건 아닙니다. 아시아 시장은 한국이 담당합니다.
- 한국이라…. 혹시 최건우 대표와의 인연 때문입니까?
- 당연합니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최건우 대표가 없었다면 에이즈 치료제나 감기 치료제는 개발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거기에 지금까지 제가 돈 걱정 하지 않고 마음껏 연구할 수 있었던 것도 최 대표의 지원 덕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콜드바이의 아시아 시장 전체 독점권을 최 대표에게 조건 없이 주기로 했습니다.
- 맙소사, 아시아 시장 전체 독점권을요? 인구수로만 따지면 전 세계인의 60%에 가까운 사람들이 아시아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대충 계산해봤는데 신약 하나에 10달러만 잡아도 1년 매출만 20~30조 원입니다. 전체 시장이 아니라 아시아 시장만요. 그걸 정말 최건우 대표에게 조건 없이 넘기는 겁니까?
- 저는 전혀 과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유튜브 영상으로 많이 보셨겠죠? 최 대표가 아니었다면 저는 아직도 미생물 RSFE-325의 정체를 연구하느라 바빴을 겁니다. 제 머리로는 그런 식의 사고 전환을 못 했을 테니까요. 최 대표가 있었기에 에이즈 치료제나 감기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본인은 그저 사소한 아이디어 하나를 제공했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그 아이디어 하나가 우리 인류의 삶을 변화시킬 단초가 되었습니다. 아시아 시장 독점권은 그런 최 대표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
[스트리 교수, 두 번째 기적을 만들어내다. 감기·독감 치료제 개발 완료 선언.]
[스트리 교수, 콜드바이 아시아 독점권을 최건우 대표에게 선물.]
- 아시아 인구를 생각하면 수백 수천조 원의 미래 가치가 있는 어마어마한 권리를 무상으로 넘긴 셈. 나이와 국경을 뛰어넘은 놀라운 우정.
[각국 의료계,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콜드바이 보급을 희망.]
[속보! 최건우 대표, 감기·독감 치료제 1차 공급 국가에서 유일하게 일본 제외]
[일본,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사람이 치료제를 가지고 장난을 치면 곤란하다. 노벨 위원회는 최건우에 대한 노벨상 수상 취소를 논의해야 할 때라고 주장.]
[최건우 대표, 누가 뭐라고 하든 나의 결정은 변하지 않는다. 뻔뻔하게 남의 나라에 내정간섭을 하려는 국가와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