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나는 내 삶의 마지막을 기억한다.
이게 무슨 미친 소리냐 하겠지만, 황당하게도 진짜다.
심지어 이번 생이 무려 세 번째다. 첫 번째 삶은 어린 나이에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아이였다. 그나마 보험금이 꽤 나왔는데, 욕심 많은 친척들은 그 돈을 홀라당 먹어버렸다.
‘아직 네가 어려서 돈 관리를 못하니 우리가 잘 관리해주마. 네가 크면 다 줄 거야.’ 라는 거짓말을 해가면서, 보험금을 모두 빼앗았다.
심지어 그들은 돈만 가져가고 키워주지도 않았다. 결국 고령의, 친할머니가 날 데려가긴 했지만 열다섯에 할머니까지 돌아가셨다.
그리고선 아무도 날 거두지 않았지. 성인이 된 후에도 돈도 안돌려주고…….
그때만 생각하면 이가 아득 아득 갈린다.
‘그게 언제 적 돈인데 남아있어!’
‘널 키우느라 다 썼지.’
‘얼마 되지도 않아!’
할머니가 다 스러져가는 낡은 단칸방에서 힘들게 날 키우는 내내 돈 한 푼 안 보태놓고 그들은 뻔뻔스럽게 저런 말들을 했다.
결국 난 돈도, 부모도 보호자도 없는 상황에서 살기 위해 다니던 학교도 자퇴하고 하루에 알바를 네 개씩 해가며 겨우 살다가 스무 살 생일 전날 과로사로 사망해버렸다.
* * *
그게 첫 번째 삶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21세기에 스무살이 무슨 과로사냐 싶겠지만, 며칠 동안 불안하게 뛰는 심장이 쿵 하는 느낌과 함께 갑작스레 할 일을 멈춰버렸다.
젠장.
그래. 뭐. 딱히 즐거울 것도 행복할 것도 없는 삶이었다.
내가 죽어서 슬퍼할 사람도 없었으니까, 차라리 죽은 게 나은 그런 생이었다.
그래서 다음 삶은 나을 거라 기대했는데……. 갑작스레 떨어진 삶은 혼종 파티였다.
당연히 다시 태어나면 한국인이겠거니 했는데.
차 대신 마차가 다니고, 높고 높은 건물 대신 고풍스러운 대저택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거기에 과할 정도로 화려한 드레스와 무지개떡처럼 휘황찬란한 머리들까지.
그나마 다행인 건 이전의 불행한 삶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난 귀족가의 아가씨가 되어있었다.
“우리 딸.”
누구보다 나를 사랑해주는 귀족 아빠가 있었고, 손을 턱 내밀면 알아서 척척 원하는 물건들을 주는 이전 생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던 완벽한 삶이었다.
아. 말로만 듣던 금수저다.
아니 이건 다이아수저야. 과거에 힘들었으니까 신이 내게 이번 생은 행복해지라고 기회를 준 거라고.
가끔 묘한 기시감이 들긴 했다.
자라는 동안 문득 머릿속에 특정 지명이 떠오르거나 처음 보는 사람의 이름이 익숙한 일들이 몇 번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참 즐겁고 행복한 인생이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았으니까.
물론 모든 게 행복한 건 아니었다.
“쯧. 저런 걸 끼고 사는 너도 한심하구나. 너와 별로 닮지 않은 저게 네 딸이 맞긴 한 것이냐?”
“어머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런 소리 하실 거면 나가세요.”
어느 집에나 있는 막장소재가 우리 집에도 있었으니까. 유약하기 짝이 없는 아빠 곁에 있는 만렙 몬스터급의 할머니.
귀족도 아닌 평민 출신의 엄마에게서 낳은 자식이었으니 할머니의 이런 반응도 당연했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내 출생에 대한 의심을 품고 살았다.
거기에 날 계모 밑에서 키울 수는 없다고 아빠는 재혼도 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내가 미웠을지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아빠를 점점 더 못마땅해했다.
그러다 내 나이 열다섯. 갑자기 아빠가 세상을 떠났다.
그 후로는 뻔한 일들이 이어졌다. 할머니는 재수 없는 평민 딸이 결국 아빠를 잡아먹었다고 아빠가 죽은 이유를 내게 뒤집어 씌웠다.
아빠가 죽은 이후 가문에서 내 입지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만도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 또한 열여덟 살에 사망했다.
가문의 죄와 내 죄를 물어 평생 감옥에 갇혀 지낼 신세였는데, 할머니가 귀족의 명예를 살리라며 독약을 건넸고, 결국 그걸 마시고 죽었다. 첫 번째 생의 죽음과 별반 다르지 않은 억울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었다.
과거의 일들 기억하는 사이, 내 시선은 화려하게 양각된 거울 너머로 옮겨졌다. 절로 한숨이 나온다. 그렇게 죽었는데 다시 귀족가의 아가씨인 이 몸이 되어버렸다.
“이쯤 되면 보상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냐? 아니 보상까지는 안 바래. 다른 삶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구우!”
성인도 되지 못하고 죽을 운명을 타고난 건지, 그렇게 죽은 것도 억울한데…….
“왜 또 얘냐구.”
거울 속에 비치는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밤하늘의 별빛을 담은 듯 오묘한 남색빛 머리카락과 짙은 보랏빛 눈동자, 통통하게 올라온 볼살과 커다란 눈, 라면을 머리에 올려놓은 듯 굽이굽이 쳐 내려오는 머리카락과 새하얀 얼굴.
“귀여워. 진짜 사랑스럽긴 하단 말이지.”
거울 너머로 보이는 건, 이전 생에 실컷 봤던 어릴 적 내 모습이다.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후작의 딸 아마네트.
문제는 그 아마네트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다. 두 번째 삶에서 이미 겪어본 아마네트. 분명 열여덟 살에 죽었는데 다시금 아마네트로 태어나다니.
이건 현실이 아닐 거라 애써 부정해 보지만, 이 통통하게 만져지는 볼은 아마네트가 확실했다.
“설마 이것은 신이 내게 주신 기회인가?”
양 볼에 손을 얹은 채 절망하던 나는 마음을 바꿔먹었다.
신이 내게 다시금 살 기회를 준 거라면, 매우 환영이니까. 거기에 ‘그놈들’이 오기 전이라면 최고의 타이밍이 아닐 수 없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오늘이 며칠이지?”
급하게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내 모습이 ‘그놈들’이 아빠와 함께 집으로 들어오는 여덟살쯤으로 보이긴 한다.
제일 좋은 건 그놈들이 못 오게 막는 건데…….
그런 생각들을 하며 주변을 살피던 그때였다.
“아가씨. 벌써 일어나셨어요?”
때마침 문이 열리면서 익숙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유모 레이나였다. 나를 어릴 때부터 키워준 유모.
“유모!”
그녀를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머. 저를 그렇게나 반기는 거예요?”
“웅! 보고 싶었어!”
물론 좋은 의미로 보고 싶다고 한건 절대 아니다. 저 유모야말로 내가 이가 아득 아득 갈릴 정도로 저주하는 사람이다.
과거에는 몰랐으나 자라고 나서 보니 이곳 레이제 후작가에는 죄다 적뿐이다.
워낙 강대한 힘을 가진 할머니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으니, 다들 아닌 척 하면서도 아빠가 아닌 할머니 눈치 보기가 급급했다.
아빠가 일찍 후작위를 이어받긴 했으나, 아빠의 형제도 둘이나 더 있었으니 사방이 적이었다.
심지어 할머니는 가족의 화합을 위해 형제들을 모두 한 집에 살게 했다. 아빠가 후작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서쪽 저택에 사는 건 다 할머니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