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물론 후작 나름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준답시고 막무가내로 할머니나 아빠의 형제들이 서쪽 저택을 찾아오진 않았다. 그리고 그 덕에 ‘그 쌍둥이 놈들’의 존재를 들킬 일은 없었다.
어찌되었든 서쪽 저택에 있는 사용인들 모두, 후작인 아빠와 나를 극진히 모시는 척 하면서 언제든 할머니의 움직임에 따라 안면몰수 하여 태도를 바꿀 수 있게 적당한 선을 그어온 이들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제일 괘씸한 인간들이 몇 있는데, 개중에서 유모가 제일 최악이었다.
믿지 못할, 나쁜 인간. 유모 레이나는 완벽한 기회주의자였다.
내가 열다섯 살이던 해 아빠가 죽자마자, 흑막이 된 쌍둥이 놈들은 원래 자신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
그 후로의 일은 마치 짜인 극본처럼 척척 흘러갔다.
갑작스레 아빠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아빠의 형이자 나의 큰 아빠가 후작이 된다. 그로부터 3년 후인 내 나이 열여덟 살, 발톱을 감추고 있던 쌍둥이들은 서쪽 저택에 있을 때의 일을 빌미 삼아 후작가에 쳐들어온다.
쌍둥이들이 우리 집에 들어오게 된 배경과 그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쌍둥이들은 과거의 일을 거들먹거리며 후작가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 과정에서 어이없게도 모든 책임을 다 나한테로 떠넘겨졌지.
왜 과거 일들을 내가 책임을 져야하는지에 대한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내가 어릴 적 쌍둥이들을 지독히 괴롭힌 것과 아빠가 그들을 이곳에 데려왔기 때문에 내가 죽게 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만 알 뿐.
끝까지 아니라고, 억울하다고 우겨봤으나, 어느 날 갑자기 힘들어서 일을 그만두겠다며 사라졌던 내 유모가 쌍둥이들 편에 서서 내가 쌍둥이들을 괴롭혔다고 증언을 한 일을 잊을 수 없다.
그놈들의 편에 서서 날 몰락시킨 인간들 중 하나인 유모. 그녀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쌍둥이 편을 든 건지, 나를 눈엣 가시처럼 여기던 할머니의 편을 들어 내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운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번엔 호락호락하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거다.
이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유모는 환하게 웃었다.
“아가씨께서 절 이렇게나 좋아하시다니 기쁘네요.”
좋아해야 하고말고. 가식을 가득 담아 그녀를 바라봤다.
“응. 좋지.”
“다행이네요. 오늘은 아가씨 기분이 좋아 보이셔서요. 매일 이렇게 기분이 좋으셨으면 좋겠네요.”
“응?”
“아침마다 기분 나빠하셨잖아요. 그때마다 제가 얼마나 난처하던지.”
콧등을 씰룩거리며 이야기하는 그녀를 보며 순간 표정관리를 못하고 짜증을 확 낼 뻔했다.
난처? 난처어~? 웃기고 있네.
생각만 해도 이가 아득아득 갈린다.
지난 삶에서는 원래 유모란 인간들이 모두 이러는 줄 알고 그냥 넘어갔지만, 솔직히 저 여자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들이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어느 유모가 난처하다며 모시는 이에게 난처하다며 꼽을 주냔 말이다.
조금만 떼를 써도 은근 슬쩍 내가 반쪽짜리 귀족이라 문제가 많다는, 그런 말들을 서슴지 않고 내 앞에서 내뱉은 게 바로 저 유모다.
그때는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워낙 어릴 적부터 받아온 취급에 원래 그렇구나 하며 어느새 익숙해져버렸다.
유모에게 배신을 당하고 나서야 그동안의 모든 언행이 잘못된 걸 알았지만.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다. 내가 돌아왔으니 유모의 그런 행태를 두고 보지 않을 거다.
“그러면 이제 씻으러 가실까요?”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유모는 날 들어 올려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난 그녀와 눈을 맞췄다.
“유모-”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거부 의사부터 내비쳤다.
“안 돼요! 오늘은 씻으셔야 해요. 여덟 살이나 된 아가씨께서 매일 씻기도 귀찮아하시고, 하루 종일 침대에만 계시려 하시고. 그런 건 귀족가 아가씨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아니, 그게 아니라-”
“길거리에 다니다보면 꼬질꼬질한 몰골로 구걸하는 거지들 있죠? 더 게을러지시면 딱 그 거지가 되실 거예요.”
거지라니! 순간 빠직 짜증이 올라왔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내 말 좀 들어! 오늘이 며칠인지 물어보려 한 거라구!”
내가 빽하고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유모는 아, 하는 작은 탄식을 내뱉더니 빈 욕조 안에 나를 거칠게 내려두었다.
“좋게 물어보시면 되지 오늘도 왜 이리 짜증을 내시는 거예요.”
“뭐?”
“하여튼. 이래서 어린애들은 싫다니까.”
작게 웅얼거리기는 했으나, 영락없는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유모 맞아? 뭐한 놈이 성낸다고 딱 그 꼴이었다.
황당함에 입술이 절로 꿈틀거린다.
“방금 뭐라 했어?”
“아무 말 안 했어요. 어쨌든. 오늘은 아가씨의 여덟 번째 생일 일주일 전이에요. 그러니 잠자코 씻으세요.”
그러더니 우악스럽게 욕조의 물을 틀었다. 원래 따뜻한 물을 다 받아놓은 후에 욕조에 천천히 들어가게 해야 하건만, 점점 더 날 돌보는 걸 귀찮아하기 시작한 유모는 그런 절차는 싹 무시해 버렸다.
유모가 이 정도니 시녀들도 오죽 하겠냐고.
과거에는 이런 호사를 누려본 적이 없으니 유모의 이런 행동들이 불편하다고 생각되면서도 그냥 넘어갔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후. 그때를 생각하면 화가 나지만 지금은 다른 이유로 더 화가 난다.
하지만 지금 당장 화를 낼 수 없었다. 오늘 날짜가 내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만들었다.
“내 생일 일주일 전?”
“네.”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오늘이 그, 그날이라구?”
“네! 왜 자꾸 물어보세요. 하루 사이에 바보라도 되신 거예요?”
세상에. 신께 감사함을 담아 기도하던 거 취소다. 어떻게 기회를 줘도 하필 이럴 때냐.
생일 일주일 전은 바로 아빠가 ‘그 쌍둥이 놈들’을 데려온 날이다.
놀란 나머지 두 손으로 입을 급히 틀어막았다.
“세상에…….”
“그렇게 기대되세요?”
실망한 목소리로 뱉어낸 말이건만, 유모가 그런 내 마음 따위 알 리 없었다.
“어. 뭐.”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해버리고 결론을 내린 유모는 다시금 몸을 움직였다.
“그러니 어서 씻고 준비하시죠.”
눈을 작게 흘겨가며 그녀를 바라봤다.
“아셨죠?”
“…….”
“이러다가 식사시간에 늦으시겠어요.”
뭐라 더 말하려 했지만 난 애써 마음을 꼭꼭 숨겼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응!”
“오늘따라 말을 잘 들으시는 게 수상한데요.”
의심하기 시작한 유모를 향해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가 빠르단 말이지. 하지만 눈치 빨라 봤자지. 절대 예상치 못한 일을 할 거니까. 난 자꾸만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아가며 유모의 손에 몸을 맡겼다.
유모는 물이 다 채워지기도 전에 보드라운 수건에 거품을 내 대충 내 몸을 닦아냈다. 머리는 어제 밤에 감겼다면서 감겨주지도 않는 덕에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 * *
오늘도 눈이 돌아갈 만큼 많은 드레스 중에 하나를 갖춰 입은 난 준비가 끝나자마자 식당이 아닌 저택의 정문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아가씨. 식당으로 가셔야죠!”
역시나 제 멋대로 뛰어다니는 날 보며 유모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내 양 어깨를 부여잡았다.
“아빠. 식당에 계셔?”
“당연하죠.”
“아닌데.”
그런 것도 확인 안 하냐.
“아니라니요?”
“아빠는 식당에 없을 거라고.”
“언제나 후작님께서는, 먼저 식당에 오셔서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셨는걸요.”
“우움.”
“오늘도 식당에 계실 거예요. 그러니 쓸데없는 일 하지 마시고 식당으로 가시죠.”
피곤한 일이라도 있는 듯 사사건건 짜증을 내는 유모는 한숨을 푹푹 쉬어댔다.
“아냐. 아빠 식당에 안 계셔.”
“아가씨, 그걸 아가씨가 어떻게 아세요~”
비웃고 있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어떻게 알긴. 이미 겪어봤으니까 알지. 난 내 말을 믿지 않는 유모를 보며 눈을 흘겼다. 이렇게 대놓고 시비를 거는데 왜 과거에는 내 말에 사사건건 태클을 거는 유모를 알지 못했을까.
하긴, 그때는 없이 살던 과거 때문에 휘황찬란한 저택에 사는 귀한 아가씨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에 취해 앞뒤 잴 것도 없었지.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질 수 있었고, 하고 싶은 건 맘껏 할 수 있는 이 상황이 기쁘기만 했으니까.
지금 와서 핑계 같긴 하지만, 설마 어릴 때부터 나를 키워온 유모가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좋게 말하자면 안일했던 거고 나쁘게 말하면 멍청했던 거다.
“그러지 말고 가세요. 귀족가의 아가씨는 식사 시간에 늦으시면 안 된답니다.”
말끝마다 귀족가의 아가씨, 아가씨. 그러면서 은근히 날 무시하기 일쑤다.
“유모. 유모가 내 엄마야?”
“네?”
“왜 아빠도 나한테 강요 안하는데 유모가 자꾸 강요해?”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건지 유모가 서둘러 입을 닫고 나와 눈을 맞췄다. 하지만 그 당혹감을 금세 잊은 것처럼 그녀의 안색은 급격히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