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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5/53)

5화

덩치를 키우자는 내 말에 아빠가 아무 말이 없자 나는 재차 되물었다.

“알았냐구.”

“어?”

“하아. 아빠 지금까지 내 말 못 알아 들은 거야?!”

“아, 알았어. 우리 딸. 아빠도 운동도 몸도 더 좋아지도록 노력할게. 그러니 한숨만 쉬지 마. 아빠는 우리 딸이 한숨 쉴 때마다 무섭더라.”

앞에 한 말 때문이지 오늘따라 더욱 주눅이 든 모습이 안쓰러워 나는 아빠의 볼을 살짝 쓰다듬었다. 딸에게 주눅이 드는 아빠라니.

소중한 아빠이기는 하지만 이건 아니지.

“무서워하지 마. 다 아빠 잘되라고 그러는 거잖아! 아빠가 건강해야 오래살고, 그래야 나 결혼하는 것도 보고 하지.”

“그런거지?”

“응! 그러니까 아빠. 아빠는 내 말이라면 다 들어줄 거지?”

“물론! 우리 딸이 세상을 가져다 주라하면 가져다줄게.”

갑작스런 말에도 아빠는 언제나처럼 웃었다.

“그런 건 너무 과해.”

“그래? 과하다니, 갑자기 다른 아이라도 된 듯이 낯설구나. 그날처럼…….”

그날이라는 말에 살짝 뜨끔했지만, 난 애써 웃어보였다.

이전 생에도 이랬었다. 아마네트는 평소엔 꽤 얌전한 아이였다가도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갑자기 생떼를 쓰거나 짜증을 부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다행인지 욕심은 없었다. 말하기도 전에 뭐든 다 해주는 아빠 덕분에 부족한 게 없어서인지 진짜로 무언가를 해달라거나 요구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달랐다. 과거의 삶을 보상 받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끔찍했던 이 전 생의 결말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상황을 바꾸는데 필요한 것들을 요구해야 한다.

“뭐. 그래서 안 해준다고?”

“아니. 설마 그럴 리가. 그래서 부탁할게 뭘까. 우리 딸? 갖고 싶은 게 생긴 거야?”

아빠의 물음에 나는 일초의 고민도 없이 말했다.

“갖고 싶은 건 아니고, 지금 내 유모가 마음에 안 들어. 바꿔줘.”

“어? 유모 레이나를?”

예상치 못한 내 말에 아빠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아빠보다 더 당황한건 내내 우리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유모 레이나였다. 유모는 내 말에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바쁘게 머리를 굴리는 듯 했다.

“아, 아가씨 저를요?”

“응! 맞어. 유모 너!”

“자, 잘못 말씀하신 거죠? 설마 저를 해고하신다구요?”

응! 너 해고. 이 말이 그렇게 알아듣기 어려운 걸까.

“응!”

“자, 장난이 지나치세요. 해고가 무슨 뜻인지는 알고 하시는 말씀이세요?”

고작 여덟 살짜리 애가 해고라고 했으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내 앞가림하기 바쁜데 장차 나를 배신하게 될 유모에게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다. 특히 유모가 벌일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현기증이 날 것 같단 말이다.

그러니 저 인간이 못된 마음을 본격적으로 싹 틔우기 전에 내가 먼저 선두를 치는 거다.

이 얼마나 완벽해.

아예 나중에 나에게 아무 짓도 하지 못하게 진작에 내쫓아 버리자. 생각만 해도 완벽했기에 몸이 자연스럽게 부르르 떨렸다.

“장난 아니고 진짠데.”

“그렇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제가 좋다고 하셨잖아요.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나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랬나아. 나는 잘 모르겠는데에.”

“아, 아가씨! 지금 무슨…….”

“왜?!”

내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한 건지 두꺼비처럼 두툼한 볼을 부풀렸다 가라앉히며 씩씩거리던 유모는 아빠에게로 고개를 휙 돌렸다.

어차피 애인 나보단 아빠를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한건지, 그녀는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아빠에게 애원했다.

“아니 그러니까. 후작 각하……. 설마 여덟 살 아가씨의 한마디에 저를 내쫓으실 건 아니시죠? 제가 그 동안 얼마나 물신양면 아가씨를 보살폈는데요.”

하지만 우리 아빠는 고작 여덟 살짜리 말에 언제나 홀딱 넘어가는 사람인걸.

그게 설령 아이의 생떼라 할지라도, 아빠는 언제나 내 편이 되었고 내 말을 들어줬다.

“아마네트가 그러하다고 하니 다른 수가 있나.”

지금처럼.

“이, 이러실 순 없어요! 제가 아가씨를 모셔온 세월이 얼만데……, 아시잖아요, 마님도 안 계신 아가씨를 제가 엄마처럼……. 그런데 이렇게 허망하게 저를 내쫓으신다구요?! 아가씨 말씀해보세요. 혹여나 장난치시는 거라면 그만 하시고요. 이런 걸로 장난치시면 안 돼요!”

엄마처럼 이라는 말에 나는 더 강경하게 소리를 빽 질렀다.

“장난 아냐! 진심이야!”

그러니까. 진작 잘하지 그랬어. 하다못해 모셔온 세월만큼 앞으로 모셨으면 의리나 정이라도 있어야 할 거 아냐.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그녀는 뒤늦게 정신을 차린 건지 떨리는 입술을 겨우 깨물어가며 한자 한자 내뱉었다.

“제, 제가 왜 싫으신 건데요?”

“싫은데 이유가 있어? 그냥 맘에 안 들어.”

단호한 내 말에 유모도 아빠도 입을 떡하고 벌렸다.

“마, 마음에 안 들어서 바꾸고 싶단 거야? 우리 따님. 원래 유모 좋아했잖아.”

“어. 근데 아닌 거 같아. 왜. 아빠. 다 해준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안 짜르려고?”

내가 짜증을 내자 아빠는 인형처럼 고개를 도리도리 돌렸다.

“그럴 리가! 그래도 내쫓는 거까진 너무 나쁘니까 차라리 시녀로 잠시 두고 다른 유모를 불러오는 건 어떨까 우리 딸?”

유모와 내 사이에서 난감해하던 아빠는 나름의 대안을 제시했다.

“아빠.”

“응?”

“아빠는 참 우유부단해. 칼처럼 확실하게 잘라야지. 시녀로 두긴 뭘 둬.”

생각만 해도 싫어. 분명 유모는 그 사이에 안 나가려고 온갖 수를 다 쓸 거니까.

난 유모를 흘기다가 아빠를 향해 빽 소릴 질렀다.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린 건지 아빠는 눈만 이리저리 굴리다 괜스레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우, 우유부단이라는 말은 또 어디서 들었어?”

심각해 보이는 아빠를 나는 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봤다.

“책에서.”

“아마네트. 네가 책도 읽는 거야?”

“뭐, 뭐! 나는 책 읽으면 안 돼? 나도 책 읽어!”

물론 원래의 아마네트라면 읽지 않을 게 뻔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 그런가?”

“언제는 날 위해 다 해준다더니, 그거 다 뻥이었어?!”

아빠는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 그럴 리가!”

우유부단함의 끝을 달리는 아빠를 향해 쐐기를 확 박아버렸다.

“하여튼! 아빠는 다 좋은데 그런 면이 참 별로야.”

“어, 어? 아, 아빠가 또 별로야?”

“어. 말로는 내가 원하는 거 전부 다해줄 것처럼 하더니 지금도 자꾸우…….”

사람 관계에서는 적당한 밀고 당김이 중요하다. 특히 아이가 어른을 대할 때 무조건 땡강만 부리면 반감만 불러올 뿐. 그렇기에 난 실망한 듯 시무룩하게 고개를 바닥으로 떨궜다.

“아냐. 그러면 됐어. 아빠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안 들어줘도 돼…….”

때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유모가 급히 우리 사이로 껴들었다.

“맞아요. 주인님. 벌써부터 어린 아가씨의 말을 모두 들어주다보면 점점 더 버릇이 없어진답니다. 아주 예의 없는 아이로 자랄 거예요.”

역시 또 은근히 나를 깐다. 나는 얼른 당황해하는 아빠를 향해 슬픈 미소를 지어보였다.

“솔직히 아빠는 나를 맨날 사랑한다고 하지만, 맨날 바쁘잖아. 괜찮아. 나는 이런 ‘취급’ 당하는 게 익숙한걸. 말로만 해줄 것처럼 굴다가 결국 안 해주고. 여기 사람들도 다 똑같아. 막 앞에서는 다 해줄 것처럼 굴고선 뒤에서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지만, 눈물이 나오는 척 살짝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정말 메소드급 연기였다.

“아가…….”

그래, 이 정도 이야기했으면 아빠도 알아들었겠지.

당신이 그렇게 예쁘다 예쁘다 아끼는 딸이 유모와 시녀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고 사는지를.

그리고 오늘 내 말을 듣고 저택 전체 사용인에 대한 조사도 시작하겠지.

이조차도 하지 않는다면 아빠는 진짜 눈치 없는 바보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아빠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해갔다.

설마 못 알아들은 건가?

내가 아빠의 표정을 살피는 사이, 유모가 다시 끼어들었다.

“오늘은 아가씨께서 기분이 좋지 않으셔서 이러는 것뿐이니 신경쓰지 마세요. 주인님.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가씨의 버릇은 제가 고쳐놓겠습니다!”

내게 보이던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표정과 다른 어투로 웃어 보인 유모는 아빠의 품에 안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너 이따 두고 보자는 듯 잔뜩 굳은 얼굴로.

세상에, 우리 아빠가 이렇게나 눈치가 없다고……?

당혹감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그때,

한참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아빠가 눈을 흘기며 유모를 바라봤다.

딸 바보처럼 배실배실 웃던 얼굴은 어느새 사라졌다.

조금 유약하긴 해도 날카로운 편에 속하는 아빠의 얼굴은 칼로 베일 것처럼 굳어졌다. 목소리 또한 송곳처럼 예리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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