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쑥스러워 하지 않아도 돼. 아빠는 뭐든다 좋으니까. 그러니 어서 줘도 돼.”
“줘? 주긴 뭘 줘.”
확신에 가득 차 한껏 올라갔던 아빠의 입꼬리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아까 이야기 했다고…….”
“이야기? 아닌데?”
“아, 아냐?”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던 찰나, 아빠 뒤에 있던 멜린지가 눈에 보였다.
어쩐지 묘하게 밝은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의 얼굴은, 큰 잘못을 한 것처럼 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그제야 내가 ‘호감을 얻기 위해’라는 말을 멜린지가 오해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호감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는 게 쌍둥이가 아닌, 아빠를 위해서 무언가 해주려는 걸로 알았나보다.
아빠에겐 미안하지만 정확한 사실을 말해줘야 했다.
“응. 아냐.”
“그, 그렇구나.”
오해는 또 다른 오해만 불러올 뿐이기에 난 고개를 아주 거세게 저었다.
“응. 정말 아니야.”
“어어…….”
우물쭈물하던 아빠는 민망했는지 어색하게 웃었다.
나중에 뭐라도 해줘야겠네. 내가 최근에 아빠에게 신경 쓰지 못했구나.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못하는 성격이라 쌍둥이들에게 온 신경을 쏟고 있어서 아빠를 방치했나 보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뭔가를 줄 수는 없기에 난 우물쭈물하는 아빠를 재촉했다.
“그럼 이제 어서 가자. 할머니 보고 싶어.”
과거에 그렇게도 날 괴롭혀온 할머니를 이제 괴롭힐 차례다.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런 날 보며 아빠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응? 할머니가 보고 싶다니. 의외로구나. 언제나 어머니를 무서워했잖니…….”
할머니가 보고 싶다는 내 말에 아빠는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랬나아.”
너무 갑작스런 변화를 보인 건가. 난 괜스레 말꼬리를 늘려가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랬…… 아! 내가 아니라 어머니를 위해서 준비하고 있었구나. 그래. 필시 좋아할 것이야.”
자꾸만 뭘 준비했다고 오해하는 아빠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뭘 준비한 건 맞지.
굳이 그 오해는 풀지 않고 웃어보였다.
“응. 준비했고말고.”
“이 아빠는 기쁘구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준비한 거로구나.”
“으응…….”
한 달에 한 번 본채에 가서 할머니께 인사드리는 날.
아빠와 나뿐 아니라 후작가의 핏줄들은 모두 그렇게 했다. 덕분에 큰아빠의 자식놈과 작은아빠의 자식놈들을 다 만날 수 있었지.
“그럼 어서 가자꾸나. 언제나 가기 싫어해서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렇게 좋아할 줄이야.”
아이는 누구보다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을 빨리 파악한다. 갓난쟁이부터 그건 본능이다.
나를 싫어하는 할머니를 싫어하는 건, 내가 아마네트가 되기 전부터 아마네트가 보여 오던 행동이었다.
“웅.”
하지만 이제 아니다. 난 과거의 아마네트가 아녔으니까.
어느 때보다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날 품에 안은 아빠는 신이 난 듯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별채에서 나왔다.
“내일은 네 생일 파티이니 할머니께 가지고 싶은걸 얘기하려무나. 그 정도는 해주실 거야.”
“정말?”
“응. 안 된다 하더라도, 그거 하나만은 해달라고 아빠가 말해보마.”
어쩐지 아빠는 말하면서도 영 자신이 없어보였다.
“그런데 할머니는 나 싫어하시잖아.”
“아냐. 할머니가 왜 우리 아마네트를 싫어하겠어. 그저, 그저 조금 낯선 것뿐이야.”
“치. 뭐가 낯설어.”
“그러니까……. 다들 아들뿐이잖아. 손주들이 모두 남자애뿐인데 너는 딸이니, 그래 그게 어색하신 걸 거야.”
나름의 변명을 하는 딸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아빠를 보며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우웅. 그렇구나. 하지만 아빠. 난 할머니가 무서워. 눈을 막 이렇게 부릅 뜨면…….”
“걱정 말거라. 익숙해질 거야. 시간이 지나면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인지 아실 거다. 분명. 결국은 누구보다 널 사랑해주실 거야. 이 아빠를 믿으려무나.”
아뇨. 아빠. 할머니는 내가 죽는 날까지 단 한순간도 날 예뻐하지 않았어요.
도리어 가문을 위해 죽는다며 쓸모가 생겼다고 좋아했죠. 그냥 내 탄생자체를 반가워하지 않은 할머니니까……. 익숙하면서도 가슴이 시큰거렸다.
그래서 큰 기대감을 가지는 아빠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빠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부디 아빠는 할머니 때문에 상처받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이번 생은 아빠가 죽지 않게 최대한 노력할 테지만, 혹시나……. 혹시나 잘못 되더라도 아빠의 기억이 나쁘지 않았으면 바라는 마음뿐이다.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은 늘 불편하고 싫었지만 이렇게 아빠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즐거웠다.
그 사이, 아빠는 날 품에 안은 채 할머니가 있는 본채로 걸음을 옮겼다.
* * *
가족 모두가 할머니를 만나는 날이라 그런지 본채는 꽤 시끌벅적한 상태였다.
따스한 벽난로가 타닥거리며 타들어가고 있는 응접실에 모두 모였다.
큰아빠 베헬과 그의 자식 케일럽. 그리고 둘째 큰아빠 아펠과 두 아들 레트와 칼.
마지막으로 제일 상석에서 망아지 같은 손주들을 흐뭇하게 보고 있는 할머니 아멜까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제법 유쾌한 웃음소리와 잔을 부딪히는 소리가 밖까지 울러퍼졌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입을 닫고 얼굴을 굳혔다.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분위기는 싸늘했다. 마치 와서는 안 될 불청객이 온 것처럼 날선 눈빛을 보냈다.
아빠는 그런 반응 따위 상관하지 않는 사람처럼 단숨에 할머니에게로 다가갔다.
“어머니 저희 왔습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아빠는 할머니 앞에 서자마자 나를 내려줬고, 난 예의범절을 잘 지키는 아이처럼 치마단을 들고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뒤에 있던 둘째 큰아빠, 아펠이 불편감을 제대로 드러냈다.
“좋아하는 사람도 없는데 매번 꼬박꼬박 참여하는구나.”
“형님.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니요. 그런 섭섭한 말씀을요.”
누가 봐도 핀잔을 주는듯한 그 말에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도리어 할머니는 그 말에 동의하는 듯 조금의 미동도 없이 나를 바라봤다.
뒤로는 내게 잡종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고 다녔던 할머니였지만, 그래도 아빠가 옆에 있으면 정도를 지키곤 했다.
오늘 할머니의 기분은 그리 좋아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내일 내 생일 파티 때문이겠지. 좋아하지도 않는 손녀의 생일 파티를 열어주려고 하니 속이 쓰린 게 분명했다.
“할머니 할머니.”
그래서 난 더욱 더 웃으며 할머니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 왜 자꾸 부르는 거지.”
가만히 할머니를 보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모든 걸 다 꿰뚫고 있다는 듯이.
“할머니는 내가 싫지?”
“물론.”
“어머니!”
역시나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어린 아이에게 상처가 될 만한 대답에 놀란 아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소리지르는 거냐. 틀린 말도 아닌걸.”
“아마네트는 어머니께 잘 보이기 위해서…….”
또 내가 뭔가를 준비했다고 착각하는 아빠가 다른 말을 하기 전에 할머니를 보던 시선을 휙 돌렸다.
“난 그럼 말 안 해야지~”
그래서 난 히죽거리면서 말끝을 늘어뜨렸다.
“응? 뭘 말하지 않겠단 거지?”
내 말에 호기심이 생긴 듯, 방금 전까지 불편함을 내비치던 할머니가 나를 불러 세웠다.
“아니. 그냥. 할머니 할머니. 요새 아프지?”
“언제나 아프지. 그게 문제가 있나?”
“있잖아 할머니. 나는 할머니가 걱정되어서 요새 책을 보기 시작했다?”
아이의 쓸데없는 이야기라 생각한 듯 할머니는 콧등을 씰룩거렸다. 주변에 서 있는 큰아빠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엉뚱한 얘기를 꺼내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비웃었다.
“그런 이야기는 네 아비랑 하거라. 듣고 싶지 않으니.”
“정말?”
“그래. 그리고 내 핏줄들 중에 제일 똑똑하지 못한 네가 책을 읽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구나.”
어, 이 말은 좀 심한데. 그래도 어쩌겠어. 마음 넓은 내가 참아야지.
“어머니 제발 좀! 하, 저희 그냥 가보겠습니다.”
할머니의 폭언에 아빠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급히 다가와서는 내 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난 그런 아빠의 팔을 뿌리쳤다. 어차피 이런 반응은 예상한 것이었다.
도리어 아빠가 큰 충격을 받은 듯 목소리를 높였지만, 난 그런 아빠를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