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그저 이 자리를 벗어나 빨리 아빠를 토닥여주고 싶었다.
후작의 자리에서 충실히 업무를 수행했지만, 이미 감정은 누군가에게 귀속되어버린 듯 아빠는 거처로 가는 내내 기운이 없었다.
“아빠아.”
그런 아빠가 정신을 차린 건 내가 두어 번쯤 부른 후였다.
“으, 응?”
“아빠 괜찮아?”
“어, 어! 아빠 괜찮지! 아빠가 안아줄까. 우리 따님.”
“됐어. 아빠 나 안으면 쓰러질 거 같아.”
“안 그래!”
강하게 부정하긴 했지만, 아빠의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흔들렸다.
“오늘은 아니야.”
“그, 그래?”
“응. 오늘은 아빠 얼른 돌아가서 쉬어.”
잠시 후, 집에 도착한 나는 내 방에 도착하자마자 아빠를 살짝 밀어냈다.
“오늘은 아빠랑 안 놀아주는 거야? 같이 책 읽는 날인데? 게다가 초콜렛도 먹어야 하고.”
“응! 오늘은 책 안 읽고 뒹굴뒹굴할 거야. 그리고 초콜렛은 나 혼자 먹을 거고.”
“어? 그럼 아빠도 같이 뒹굴뒹굴…….”
“멋진 후작님은 자기 일을 내팽겨치지 않는 법이랬어. 그러니까 가서 아빠 일 해!”
“우리 아마네트랑 조금 놀고 해도 상관없을 거 같은데?”
언제나처럼 아빠는 내게 과한 집착을 보였다. 사실 아빠는 누구보다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나와 놀 시간이 없을 정도로 아빠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는 언제나 충실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빠와 더 이야기 할 마음이 안 생겼다.
“아마네트. 아빠가 싫어진 거야? 아빠에게는 이제 아마네트 뿐인데…….”
“나두야!”
“요새 쌍둥이들이랑 노느라 아빠랑 안 놀아준단 이야기가 있어…….”
어느새 열린 문을 통해 방안으로 들어가면서 아빠는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질투하는 거야?”
“질투라기 보단…….”
뻔한 질투였건만, 아빠는 아닌 척 머리를 긁적이며 어깨를 들썩였다.
이럴 때 보면 귀엽단 말이지.
“쌍둥이들이랑 친하게 지내라고 아빠가 말한 건데!”
“아! 그렇구나. 그럼 이제부터는 아빠랑 더 친하게 지내는 건 어떨까. 아마네트?”
“사람이 이렇게 막 말이 바뀌면 안 돼!”
입고 있던 겉옷들을 벗어내며 아빠에게 말도 안 되는 말들을 시전했다. 내가 생각해도 참 황당한 말들이건만, 딸에게 홀딱 빠져버린 아빠는 그 말에 적극 호응했다.
“그래. 알았어.”
“오히려 아빠가 말한 걸 잘 지키는 나를 더 칭찬해줘야 하는 거 아냐?”
“그렇지!”
크게 고개를 끄덕인 아빠는 내 머리를 보드랍게 매만졌다.
“싫었을 텐데, 온전히 자신에게만 관심 가져주는걸 좋아하는 너인데……. 고맙구나.”
쌍둥이들과 잘 지내는 모습에 감동을 받은 듯 아빠는 눈시울을 붉혔다. 예전의 아마네트였다면 상상도 못할 모습이었겠지. 그러나 지금은 나를 위해서, 그리고 아빠를 위해서 쌍둥이들과 잘 지낼 수밖에 없었다.
“웅! 그러니까 질투하면 안 돼. 대신에 아빠도 내가 말한 대로 근육이 빵빵해지는 몸매가 되고나면 엄청 예뻐해줄게!”
“그건…….”
“나도 이렇게 이렇게 칭찬해줄게.”
까치발을 들고선 아빠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하는 행동의 의미를 알아차린 듯 아빠는 살짝 몸을 숙여 자신의 머리를 내게 기대었다.
잘못 염색되어버린 인형의 털처럼, 아빠의 붉은 머리칼을 보드랍게 매만졌다.
그러자 기분이 좋은 듯 아빠의 얼굴에 편한 미소가 번졌다. 할머니를 만난 후로 한 번도 지어본적 없는 그런 미소를.
“기분이 좋구나.”
나는 최선을 다해 작은 손으로 아빠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오늘 고생했다는 위로의 마음도 함께 담아서.
“응!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내!”
“그래. 그러마. 아마네트. 네가 원하는 대로 튼튼한 몸이 되마. 운동도 하고 잘 먹고.”
“응!”
그러니까 아빠 건강해져요. 그래서 나랑 오래오래 살아요. 비극적인 미래, 우리 둘 다 죽는 그런 미래 말고, 지금처럼 오순도순하게.
후작 같은 거 내려놓고, 그냥 서로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차마 말할 수 없는 말들을 입에 꾹 담은 채 연신 미소만 보였다.
할머니를 만난 이후 조금 지쳐보이던 아빠의 표정도 어느새 좋아졌다.
굳이 많은 말을 하진 않았지만 아빠에게도 내 마음이 전해졌던 모양이다. 다행이다.
“그럼 이제 끝!”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자 아빠를 내보내려 했는데 아빠는 여전히 부족한가 보다. 아쉬운 표정을 지은 아빠는 머리통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벌써? 아빠는 우리 딸이 ‘아빠 예쁘다 예쁘다’하는 거 더 느껴보고 싶은데.”
“아빠.”
“응.”
“이렇게 집착하는 남자는 매력 없어.”
‘매력 없다는’ 충격적인 단어에 아, 하는 작은 탄식과 함께 아빠의 눈동자의 물음이 가득 새겨졌다. 이렇게 일일이 다 알려줘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아빠를 떼어내려면 어쩔 수 없다.
“계속 해달라하면 해주기 싫다는 말이야.”
“아아.”
“그러니까 오늘은 그만!”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아빠는 포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더 치댔다가는 내가 정말 화를 낼 거라는 걸 잘 아는 듯 보였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나중에 꼭 다시 해줄 거지?”
“응. 그러니까 오늘은 빠이. 나 좀 쉴래!”
내 단호한 태도에 그제야 아빠는 아쉬운 듯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아무리 졸라봐야 내가 안 해줄 걸 알아차린 것처럼.
“그래. 우리 따님이 피곤하다하니 아빠는 이만 돌아가마. 대신에 언제든 아빠 보고 싶으면 오려무나.”
“응!”
물론 갈 생각은 없지만, 여기서 그런 말을 하면 아빠가 섭섭해 할게 뻔하기에 난 손만 좌우로 흔들었다.
“하. 가기 싫구나. 우리 아마네트는 아빠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알까.”
“알아!”
“그, 그래…….”
어느 때보다 당당한 내 말에 아빠는 결국 포기한 듯 몸을 돌렸다.
물론 그 와중에도 수십 번은 나와 눈을 맞추며 꼭 가야하는지 무언으로 압박했지만, 난 모르는 척 아빠를 내보냈다.
“자자, 얼른 가요. 잘자요, 아빠!”
“그래, 아마네트. 좋은 꿈 꾸렴.”
차라리 못되처먹은 인간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소설 속 폭군들처럼, 성정이 나쁘다던가. 그게 아니라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면 덜 불안했을 텐데. 아빠는 착해도 너무 착하다.
“휴.”
‘어떻게 하면 못 되게 만들 수 있을까.’
가족들에게 할 말 다 하는, 뭐라 하면 버럭 화를 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려면 어찌 되어야 할까.
사실 당장은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멀어져가는 아빠를 가만히 두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뒤늦게 들어온 시녀들이 옷을 갈아입혀 드리겠다고 날 일으키려했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난 그들을 물린 채 침대 위에서 몸을 이리저리 굴렸다.
“기분이 별로야.”
나는 그런 취급을 당해도 된다. 하지만 아빠는, 아빠는 그런 취급을 당하면 안 된다.
자꾸만 아까 일이 머릿속에 남아서는 헤집고 다니는 기분이다. 내가 계속 옆에 있으면 매번 이럴 텐데. 그렇다 해서 아빠와 헤어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아빠를 이대로 두는 것도, 결국 펼쳐질 미래를 방임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사자인형을 품에 꼭 안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래를 바꾸려면……. 내일이 제일 중요한 날이야.”
그 미래를 바꾸기 바꾸려면 일단 일어나야 했다. 가만히 누워있어 봤자, 속상해봤자 바뀔 건 없으니까.
그렇게 난 굳은 결심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선 종이를 펼쳐 작고 통통한 손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그렸다. 내일이면 쌍둥이들에게 너무나 필요할 것. 어느 때보다 정성을 다했다.
“여기엔 이게 있고, 저기엔 이게 있지. 글씨를 쓰면 의심 받을 수 있으니까 그림만 그려야겠다.”
쌍둥이들이 도망갈 수 있게 방법을 알려 주는 그림이었다.
만약 이걸 보고 쌍둥이들이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 또한 내게 좋은 일이다.
모든 미래에는 쌍둥이들이 이곳에 있음으로 인해 벌어지는 거니까.
또한 실패해도 상관없다. 실패한다 해도 쌍둥이들에게 호감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것만으로도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