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그런데 이렇게 그려도 알아보겠지?”
그런 결심을 하며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서툰 솜씨로 한참동안 그림을 그리던 나는 문득 걱정이 되었다.
머릿속에는 모든게 다 생생한데 손으로 그리려하니 쪼끔 어중간하다. 아니 조금 더 많이.
“알아볼 거야. 설마 이걸 못 알아볼 리가.”
라고 말했지만 못 알아볼 것만 같다. 하지만 이제는 방법이 없다. 다른 이들을 불러 ‘이걸’만들어 달라 하면 의심을 살 게 분명하니까.
내가 스스로 만들어야만 한다. 결국 한참동안 이리저리 그림을 그리던 나는 개중에서 제일 잘 그린 그림을 손에 쥐고 방을 나섰다.
이미 바닥에는 망친 그림들이 잔뜩 흩어져 있었다. 그림 실력이 더 뛰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어디 가시려고요.”
“오빠들한테.”
멜린지는 잠시 자리를 비운 건지, 시녀 하나가 친한 척 말을 걸어왔다. 기억도 나지 않는 사람이다.
“자주 가시네요.”
오빠라는 말에 시녀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무도 신경 쓰거나 돌보지 않는 쌍둥이들에게 내가 호감을 보이자 영 신경이 쓰였나 보다.
“응. 나라도 챙겨야지. 나 말고는 아무도 챙기지 않잖아.”
“아,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무슨 일 생기면 꼭 말씀하시고요.”
“무슨 일 생길 게 뭐가 있어. 너무 예민하지 굴지 마.”
날선 목소리를 낸 나는 말 거는 이들을 무시하고 쌍둥이들에게 걸음을 옮겼다.
최근에 내가 성질을 안 낸 덕분인지, 은근슬쩍 친한 척 하는 시녀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이참에 성질을 한 번 더 내야 하나.’
유모 사건 이후 한동안 아무도 말도 안 걸어서 좋았는데, 지금은 너무 귀찮아져 버렸다.
그 사이, 나는 쌍둥이들이 있는 방 앞에 도착했다.
이전보다 쌍둥이들에 대한 의심이 줄어든 건지, 방 앞을 지키는 이들의 숫자도 확연히 줄어든 상태였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오빠들은 밥 잘 먹지?”
“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막 외부인이라고, 맛있는 음식 안주고, 구박하고 그러면 안 돼! 내가 먹는 거랑 똑같은 거 줘야 해.”
내 말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시종의 표정이 한순간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마치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 같은 표정이었다.
“네, 걱정 마세요.”
“확인해보고 조금이라도 별로인 게 나왔다고 하면, 가만 안 둬.”
“그, 그럼요오.”
아무래도 제대로 안 준 모양인가 보네. 설마해서 떠본 말에 저렇게 반응하는 걸 보니.
순간 짜증이 울컥 몰려왔다.
제대로 챙겨주라고, 아빠도 이야기하고 나도 이야기했건만, 음식으로 서럽게 만드냐. 사람이 먹는 거 갖고 야박하게 굴면 안 된다고.
“응. 들어가서 물어봐야겠다.”
이정도 되면 스스로 이실직고 할 만하지만, 시종은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기에 바빴다.
그리고 시종이 들고 있는 손수건이 꽤 낯이 익었다. 가문의 인장이 박혀있는 손수건.
본래 각 귀족가문에서 쓰는 물건 대부분은 아무데서나 들여오지 않는다. 다 장인에게 사오는 물건들이고, 장인은 그 물건들마다 가문의 문장을 찍어서 납품한다.
시종이 가문의 문장이 찍힌 손수건을 들고 있다.
‘그것도 오로지 가문원만이 쓸 수 있는 물건을.’
귀하게 여기는 것도 아니고 땀 닦는 용도로 쓴다는 건 저런 물건이 허다하게 많다는 거다. 오로지 가문원만이 쓸 수 있는 물건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시종.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할머니와 연관이 되어있지 않으면 이럴 수 없는 거잖아!’
손수건이라는 물건은 일반 평민들이 쓰기에는 고가의 물건이다. 특히 귀족들이 쓰는 손수건은 사치품이다.
하지만 귀족 가문에서는 한번 쓰다 버리는 흔하디 흔한 물건이다. 한낱 시종이 그런 물건을 저렇게 쓴다는 건, 누군가의 허락이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허락의 당사자는 당연히 할머니겠지. 저렇게 대놓고 손수건을 쓰다니.
난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아가씨?”
“아니야. 이만 들어갈래.”
“네. 문을 열겠습니다. 그런데 아가씨. 정말 먹는 음식까지 물어보실 생각이십니까?”
“응.”
역시나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시종은 매우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러나 이내 나를 호구로 아는 듯, 직설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렇지만, 아가씨가 굳이 그런 거까지 신경 쓰실 필요가 있을까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귀한 아가씨께서는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되는 매우 사소한 문제라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정말 너무너무 사소한 것이요.”
굳이 ‘사소한 것’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마치 내가 더는 신경 쓰지 않길 바라는 뉘앙스였다. 그러자 괜히 더 묻고 싶어졌다.
“우움.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문제?”
무슨 개소리를 더 할까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시종은 이때다 싶었는지 열심히 입을 놀렸다.
“네. 이런 일은 아랫것들이나 하는 일입니다. 아가씨께서는 그저 잘 드시고 잘 노시면 되는 일이에요.”
“그런가아.”
“그럼요.”
“근데 이렇게까지 말하니까 물어보고 싶어졌어. 아까까지만 해도 별로 생각 없었는데.”
“아?”
“그럼 나 갔다올 테니까, 방 문 앞 잘 지켜.”
그사이 열린 문을 통해 쪼르륵 안으로 들어갔다. 다람쥐처럼 빠르게.
“아, 아가씨!”
놀란 시종이 나를 다시금 부르며 발을 동동 굴렀지만, 난 그걸 무시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여기 있는 인간들은 나를 바보멍청이로 생각하는 건지.’
아니지, 나뿐만 아니라 아빠까지 바보 멍청이로 생각하겠지.
“뭐해.”
방에 들어와서 말없이 문 쪽을 노려보고 있자, 쌍둥이 중 동생이 불쑥 말을 걸어왔다.
눈 깜짝할 사이 내 옆까지 다가온 상태다. 발소리가 나지 않는 건지 늘 이렇게 정신을 차려보면 내 옆에 와 있었다.
“어. 아니. 그냥 왔어.”
“알아. 언제는 뭐 일이 있어왔나. 언제나 그냥 왔지.”
본인 할 말을 모두 한 동생은 다시금 앉아있던 의자로 걸음을 옮겼다.
창문 앞에 놓여진, 어쩐지 외로워 보이는 두 개의 의자로.
“오늘은 안 오려나 했는데.”
동생과 다르게 쌍둥이 형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마음의 거리감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거리를 둔 채로.
“왜 안 와. 오빠들이랑 친해지고 싶으니까 매일매일 와야지. 그래서 뭐하고 있었어?”
“그냥 가만히 있었지.”
“그렇구나.”
“여기 가둬놓고 뭐하고 있었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은 거 아냐?”
하여튼 말 진짜 안 예쁘게 한다니까.
나중에 배틀이라도 붙여보고 싶네. 할머니의 손주들이랑 이놈 중에서 누가 더 말을 더 밉게 하는지. 얼마나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지.
‘맘에 안 들어.’
그렇다 해도 우선 앞에 있는 쌍둥이들이 내 목줄을 쥐고 있었기에 난 최대한 화를 참았다.
“그래서 아마네트는 뭐했어?”
“아아. 할머니한테 갔다왔어.”
“할머니?”
“어. 있어. 그냥 엄청……. 하여튼!”
뭐라고 해야 할까. 최종악당이라 해야 할까. 혹은 나쁜 사람? 가까이 가지도 말아야 할 사람?
뭐라고 말해야 하나 고심하던 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내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걸 눈치 챘는지 더는 묻지 않았다.
“응!”
아직은 말할 수 없다. 어차피 지금 당장 이야기한다 해서 바뀔 건 없을 테니까.
‘거기에 탈출에 성공하면…….’
아마 할머니와 딱히 만날 일도 없을 거다.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 간다면 더더욱.
‘도망간다면, 이곳 생활보다 더 힘들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얘네들은 잘 살아남을 거다.’
아포르타 공작가의 핏줄을 타고 났으니 안 먹고, 안 자고, 상처입어도 금방 금방 나을 거다. 그로인해 자신들이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거다.
가문을 알려줘야 하나. 그런 고민들을 하고 있던 그때였다.
“그보다 오늘따라 시끄러운 거 같아.”
창밖을 내다보던 쌍둥이 형은 밖에서 소란스럽게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평소와 달리 분주한 사람들의 모습이 신경 쓰였나 보다.
“아.”
온갖 고민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그때, 마치 그런 내 고민을, 내 머릿속에 드는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시켜주기라도 하려는 듯 쌍둥이 형이 입을 열었다.
“아니야?”
“아. 맞아. 내일 일이 있을 예정이거든!”
“일?”
“내일은 내 생일 파티가 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