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내 입으로 생일 이야기하기가 조금 부끄러웠는데, 형이 정확한 타이밍에 들어와줬다. 난 어느 때보다 당당하게 어깨를 쭉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일? 너 생일이야?”
“웅 내 생일! 그래서 너희를 초대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우릴 초대하는 게 말이 되냐!”
우물쭈물 거리는 내 마음을 먼저 알아차린 듯, 쌍둥이 동생이 버럭 짜증을 냈다.
평소라면 짜증내는 동생을 보며 왜 이리 짜증내나고 덩달아 승질을 냈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치. 우리가 가는 건 그렇지.”
“다음 파티에는 함께 가자.”
형이 그런 이야기를 하자 가슴 한구석이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둘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걸고 꼭꼭 약속.”
물론 내 그런 행동들을 두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난 꿋꿋하게 양손으로 쌍둥이들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이렇게 약속하는 거야. 손가락 걸고 약속한 건 절대 절대 잊으면 안 되는 거야.”
“뭘. 약속하는 건데.”
코를 대충 쓰윽 닦아낸 동생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중에 내 생일 파티에 꼭 참석하기. 그러니까 그때까지 춤 연습 잘 해놔야 해. 내 파티에 가면 둘 중에 춤을 더 잘 추는 사람을 내 파트너로 결정할 거니까.”
“춤?”
“응, 파티에선 춤을 춰야 하거든.”
“와, 엄청 기대돼. 춤 연습 잘 해둘게.”
“웃기네. 네가 결정하기는. 그런 건 우리가 결정해.”
이전보다 훨씬 더 당당해진 모습들을 보며 가슴 어딘가가 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좋으면서도 슬픈. 드디어 그들의 원래 성격이 나온다는 기쁨과, 왜 어린 애들이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날선 채로 자라야했을까 하는 그런 안타까움이랄까.
‘하긴 이런 생각하는 나도 웃기지. 과거에는 내가 누구보다 앞장서서 괴롭혀왔으니.’
어쩐지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안쓰러운 건 안쓰러운 거다.
당시의 나는……. 너무 어렸고, 생각이 짧았고 바보 같았을 뿐이니까. 그때의 미안한 마음을 지금이라도 용서 받을 수 있을까. 다 내 욕심이겠지만 그래도 이번 삶에선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한 번 더 들었다.
“그래서 이건 언제까지 흔들거리고 있어야하는데.”
생각에 잠겨 손만 위아래로 흔들고 있자,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아.”
도리어 이런 상황이 불편한 듯 손을 멈춘 건 형 쪽이었다.
말은 매우 불편하게 했지만, 동생은 내 손이 움직이는 대로 위아래로 열심히 손을 움직여주었다.
“어 미안. 이제 다 끝났어.”
“약속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어……. 어 뭐. 그, 그런 거지.”
아니라고 말하면 괜히 한소리 더 들을까 봐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그러고 나자 어쩐지 부끄러움이 몰려와서, 얼른 쌍둥이들을 지나쳐 창문가로 다가갔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날씨 되게 좋네.”
뒤늦게 쌍둥이들도 내 옆으로 다가와 창밖을 내다봤다. 딱히 물을 다른 이야기들이 없었다.
날씨는 엄청 좋았고, 하늘은 유난히도 높았으니까.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은 어쩐지 가슴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내일 내 생일이라고 나름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들이 마음을 더 심난하게 만들었다.
분명 기쁜 날인데, 즐거워야 하는데 마음이 이상했다.
‘이번엔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할머니 앞에서 당당하게 굴었지만, 할머니의 손주들이나 아들들 앞에서 열심히 나를 표현했지만 솔직히 무섭기도 하다.
또 죽을까 봐. 한번 겪은 말도 안 되는 그 죽음을 다시 겪을까 봐.
‘쌍둥이들에게 미움 받지 않으면 정말 괜찮은 걸까. 그러면 아빠도 죽지 않고, 나도 죽지 않고……. 그냥 이 삶을 살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자니 무언가 가슴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그때 갑작스레 창밖으로 바람이 불어왔고, 차디찬 공기 바람 때문인지 순간 눈이 시렸다.
시린 눈을 보호하려는 듯 눈물이 나왔고, 푹 가라앉은 마음 때문인지 한번 터지기 시작한 눈물은 의도치 않게 계속 흘러내렸다.
씩씩하게 잘 이겨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지치고 외로웠던 보다. 하긴 어린 아이가 이렇게 많은 일들을 겪고 괜찮은 게 이상하지.
혹여나 다른 사람들이 볼까 봐, 급히 눈물을 훔쳤지만, 동생은 이때다 싶었던 건지 내 쪽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너 왜 우냐.”
“정말 우는 거야?”
본가에 갔다온 날은 어쩐지 마음이 울적해졌다.
내가 당하는 취급 때문에 그런 건 아니다. 그저 나 때문에 아빠가 슬퍼하는 게 보기 싫어서다. 아빠만 생각하면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지켜주지 못해서, 또 지켜주지 못할까봐. 그런 걱정들.
‘울 건 뭐람.’
그런데 또 울지는 몰랐던 터라 괜히 입술을 삐죽였다.
아빠 앞에선 안 나왔던 눈물이 왜 여기 와서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창피하게 정말.
“안 울었거든.”
“울었는데. 눈이 빨개.”
“안 운다니까!”
“내가 분명 눈가에 고인 눈물을 본 것 같은데.”
“아, 아니야! 음음.”
쌍둥이들에게 눈물을 보이기 싫어 괜히 창문가에서 벗어나 방을 살폈다. 내가 우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더 활발히 방을 살폈다.
그러다 문득 방 한 켠에 되게 허술하게 놓인 종이가 눈에 보였다.
“이게 뭐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종이를 살펴보자 쌍둥이 동생이 다급하게 막아섰다.
“아, 아 보지 마!”
내가 그린 것보다 더 어설픈…….
“지도야?”
“지, 지도 아니거든!”
“그럼 뭐야. 여긴 지금 우리가 있는 요 위치일 테고, 여긴 이쪽 길이겠네. 아니라고 해도 너무 완벽하게 지도인데? 물론 엄청 못 그렸지만.”
순간 쌍둥이 동생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네가 이 지도 그렸나보네.”
“아니거든! 내가 그린 거!”
“지도는 맞나보다?”
“아, 아니 그게…….”
내 말에 냉큼 냉큼 대답하던 동생은 입술만 삐죽거렸다. 뭐라 더 반격을 해야 하는데 못하는 것처럼. 그 감정이 참 잘 보일 정도였다.
“밤에 이거 그리느라 밖을 나다녔나보네. 몰래. 왜 도망치기라도 하려고?”
원래 쌍둥이들은 도망가려다가 실패한다. 그걸 알기에 물어본 건데 생각보다 둘의 반응은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뭐. 그래서 왜. 이르기라도 하려고?”
“그만 이야기해. 더 이야기할 필요 없어.”
과묵하면서도 언제나 좋게 좋게 이야기하던 형의 반응은 예상에서 훨씬 벗어났다.
가시를 세우려는 것처럼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예전보단 경계심을 많이 풀긴 했어도 아직 완전히 마음을 주지 않은 상태니 당연한 일이었다.
‘난 이미 이 상황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동안의 모든 일들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거나 다름없다.
내 생일에 혼란한 틈을 타려다가 실패한 쌍둥이들. 그때 이 둘이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걸 확실히 알았지. 그래서 바로 이걸 준비했다.
“그러고 싶은 거 아냐?”
“그만. 그런 소리를 할 거면 이만 나갔으면 좋겠어.”
생전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형이 그러는 걸 보면 진짜 화난 게 극명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기다려봐. 가기 전에 줄 게 있어서 왔어.”
그래서 정말 내쫓기기 전에 품에 넣어둔 종이를 꼼지락 꼼지락 꺼내었다.
“이거.”
“오늘은 그만 해.”
형이 말렸지만, 동생은 내 품에서 나온 종이를 냅다 받아 챘다.
“이게 뭔데.”
“지도. 진짜 지도.”
‘진짜 지도’라는 말에 방금 전까지 거부감을 내비치던 형이 옆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뭐? 진짜 지도?”
그리고 펼쳐진 종이엔 최선을 다해 그려온 이 건물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물론 조금 하찮은 면이 없지 않아서, 동생은 그걸 펼치자마자 피식 웃고 말았다.
“이거 네가 그린 거야?”
“어. 뭐. 왜!”
괜히 뜨끔해 일부러 더 큰 소리를 내며 반응했다.
“나한테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었네.”
“아니거든 내가 좀 더 낫거든!”
아주 쪼오끔. 많이는 아니고. 라고 우겨보고 싶지만 거기서 거기긴 하다. 하지만 여기서 밀릴 순 없기에, 슬쩍 지도로 시선을 옮겼다.
“어쨌든 이거 진짜 지도 맞아. 내가여기 살면서 알아온 수많은 비밀길들도 다 적어놨지.”
아닌 게 아니라, 과거의 삶까지 포함하면 십년 넘게 산 곳이다. 그러니 이것만큼 확실한 지도는 없을 거다.
하지만 지도를 확인한 쌍둥이들의 안색은 묘하게 변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