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53)

17화

“믿을 만한 거야 이거?”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거듭 물었다.

“웅. 이것대로라면 도망칠 수 있을 거야.”

어느 때보다 당당하게 외쳤다. 정말 도망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어준 거니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오히려 이게 더 수상한데.”

“믿지 않아도 돼. 근데 그냥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려본 것뿐이야.”

쌍둥이들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의심 받을 거란 건 알고 있어. 그런데 정말 제대로 속이려면 지도를 가져왔겠지, 알아보기도 힘든 그런 그림이 아니라.”

“음. 의심을 피하려고 그런 걸 수도 있잖아.”

“그랬더라면 대놓고 주지 않았겠지. 몰래 은밀히. 아니 이 방 어딘가에 지도를 숨겨놓고 찾기를 기다렸을지도.”

진심이 가득 담긴 말이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강조의 강조를 보탰다.

“믿든 안 믿든 오빠들 자유야.”

그 말이 둘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진지는 알 수 없다. 내 말에 더 의심을 갖고 저 지도를 당장 불태울 수도 있고, 또 저대로 움직일 수도 있다.

내가 할 일은 그저 이 지도를 전해주는 것. 그로인해 적어도 난 너희들에게 믿음을 주려했다 이런 정도의 느낌을 주는 것뿐이니까.

할 일을 마친 난 몸을 돌렸다. 내가 내 지도를 믿으라고 해봤자, 쌍둥이들의 자유니까. 생각할 시간을 조금 줄 필요가 있다.

‘이제 가볼까나.’

내일 파티를 준비하려면 일찍 자고 일어나야 한다. 그리 좋은 기억이 없을 생일 파티일 게 분명하지만…….

‘과거에도 그랬으니까.’

그래도 누구보다 내 생일이라고 기대하는 아빠가 있기에 난 방으로 가려했다.

그때, 무언가 불현 듯 떠올랐다.

“아 맞다. 그런데 둘 다 밥은 잘 먹고 다니는 거야?”

아까 시종의 말도 그렇고, 며칠이 지났음에도 살이 하나도 붙지않다는 건 내 생각대로 오빠들이 제대로 돌봐지지 않고 있단 것 같아 슬쩍 물었다.

“…….”

“뭐하러 물어봐 그런걸.”

“내가 오는 시간에만 제대로 음식이 나오고, 그 외의 시간엔 제대로 안 나오지?”

그래서 물었는데, 역시나 맞나보다.

말없는 형과, 괜스레 시선을 돌리는 동생.

“뭐. 알았어.”

“대답도 안했는데 알았대.”

“말 안 해도 다 아는 거, 그게 친구 사이인 거잖아.”

“친구…….”

친구라는 말에 쌍둥이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난 어깨를 들썩거리며 배시시 웃었다. 굳이 본인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어떤 상황인지 말하고 싶지 않을 만하다.

물리적인 학대만이 학대는 아니다. 정서적인 학대도 분명 학대다. 그리고 아이들은 정서적인 학대를 받는 중이니, 저런 반응들은 퍽 당연한 일이었다.

파악이 끝난 나는 다시금 나가려했다.

하지만 이번엔 동생이 내 앞을 막아섰다.

“왜. 할 말 있어?”

“베른하르트.”

“어?”

동생은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이름. 그리고 형은 칼리스토.”

예상치 못한 놈의 말에 난 잠시 동안 입만 어물거렸다.

“이름을 알려준 거야?”

“그냥 알려주고 싶었어. 네 말대로 이게 진짜 지도면 지금이 마지막인 거잖아.”

“아.”

“왜. 아니야?”

“아니. 맞아. 근데 오빠들 이름은 끝까지 모를 거라 생각했거든.”

소설 속에서 쌍둥이중 형을 칼, 동생을 베른이라 불러서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본명을 들은 건 처음이라 당혹감이 몰려왔다.

그 이름은 나중에 공작가로 간 이후에 받은 이름인가 했는데, 그건 아닌가보다.

조금 당황해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바보처럼 입만 어물어물 거리며 이름, 이름이란 말만 반복했다.

“이름…….”

“뭐 그렇다 해도 진짜 이름은 아닐 거야.”

말해놓고 조금 부끄러운 건지 동생, 베른하르트가 말을 덧붙였다.

“응?”

“그냥. 우리끼리 부를 이름 없어서……. 갇혀있던 곳에 있는 책에서 아무 이름이나 가져온 거니까. 뜻도 몰라.”

어쩐지 주눅이 들어버린 베른 하르트를 보니 마음 한 켠이 불편해졌다.

누군가가 지어준 적 없는 이름.

자신들을 제외하곤 누구도 불러주지 않은 이름.

그래서 어느 때보다 크고 분명하게 그 이름을 불렀다.

“칼리스토. 베른하르트. 좋은 이름이네.”

“조, 좋은지는 모르겠고. 어쨌든. 난 알려줬다.”

하나를 내어주어서 하나를 알려주는 것처럼. 베른은 제 코를 긁적였다.

“응. 고마워.”

고맙단 말 말고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난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으로 다시금 손을 가져갔다.

“그럼 갈게. 이게 우리가 보는 마지막일지라도……. 아쉬워하지 말자. 잘 지내.”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물론 나도 돌아보지 않았다.

우리의 인연은 이걸로 끝나길 바라는 마음이었으니까.

“아가씨. 저 아가씨…….”

문 밖으로 나가자 아까 그 시종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왜.”

“그……. 안에서 뭔가 물어보셨습니까?”

“뭘 물어봐.”

“아니. 그러니까. 그…….”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해주던데.”

시종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 그런가요?”

“어. 그래서 할 말은 다했어? 나 계속 붙들고 있을 거야?”

내 앞을 막고 있던 시종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다 한발 물러섰다.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우물거리던 시종은 그 말과 함께 물러섰다. 더 이상은 본인도 질문할 수 없다 생각한 건지, 아니면 내 말을 믿기로 결심한 건지 시종은 더 이상 묻거나 날 따라오지 않았다.

그렇게 난 다시금 방으로 돌아왔다. 한편으론 마음이 편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런 생각들 때문에 방으로 가는 길은 평소보다 더 가까운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게 방에 도착해서 문을 열던 그때였다.

“우리 따님…….”

마치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방 안에 있던 사람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빠?”

쌍둥이들을 만나고 돌아오자마자 본 건 아빠였다. 나가기 전에 그림을 그리고 있던 책상 앞에 선 아빠는 날 보자마자 구겨진 종이들을 펼치며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빠 왔어?”

“그래. 쉰다고 해서……. 아빠도 짬을 내 티타임이라도 가질까 해서 왔어.”

“아. 그, 그럼 얼른 차를 가져오라 해야지. 나는 오늘 따뜻한 우유!”

평소라면 내 말에 적극 호응했을 아빠는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도리어 아빠는 종이를 든 채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저걸 뺏어야하는데. 벌써 알아봤으려나.

혹시나 알아보고 오해하면 어쩌지. 그런 생각들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큰일 났다. 제대로 방을 치우고 나갔어야 했는데 급한 마음에 뒷일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정신없어 하는 사이 아빠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마네트.”

“으, 응?”

“차는 나중에 먹고, 이것에 대해 설명해주렴.”

제대로 버리지 못한 내 잘못이지. 급하게 나간다고 그림 그린 종이를 대충 구겨 버렸으니, 방을 정리하던 시녀에 의해 발견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시녀들이 굳이 그걸 보고 딱히 건들진 않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필 그걸 아빠가 봤을 줄이야.

“어. 그게…….”

벌써부터 알아차리면 안 되는데. 서쪽 저택의 약도를 내가 그렸다는 사실을. 오래 산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비밀 통로까지 다 그려놨는데.

난 어떤 핑계를 댈까 한참 동안 입만 어물거렸다.

“엄……. 그니까 그건…….”

뭐라 그러지. 그냥 그려본 거라고 할까. 심심해서 상상 속 지도를 그려본 거라고 할까.

열심히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머리를 굴리는데,

“어쩜……. 우리 딸은…….”

“어……. 그건 말이야.”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는지!”

“어, 어! 응?”

“그러니까 이건……. 그……. 어……. 집을 그린 거지?”

아빠. 지금 아빠도 이게 뭔지 구분을 못 하는 거 같은데?

“어?”

“그렇지? 역시 우리 딸의 그림 솜씨는 훌륭하다니까. 이건 다 아빠를 닮아서 그래. 어찌나 이리 대단한지. 천재가 분명해.”

아빠. 그거 집 그린 거 아닌데. 내가 그렇게 못 그렸나.

“요기에 이건 아빠를 그린 건가?”

아빠는 구석에 그려진 구멍을 가리켰다. 그건 개구멍인데……. 어린아이 둘은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거라고 표시한 동그라미를 아빠는 오해한 듯 매우 흡족하게 바라봤다.

“어?”

“아빠한테 요새 시들해져서 실망했는데, 아빠를 위한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구나. 역시 우리 딸 밖에 없어.”

단단히 오해한 아빠의 눈에서는 사랑이 듬뿍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이럴 땐 아빠의 과한 딸 사랑이 도움이 되는 듯했다.

‘그래. 차라리 오해하게 두는 게 나을지 몰라.’

진실을 아는 것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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