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아빠한테 요새 시들해져서 실망했는데, 아빠를 위한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구나. 역시 우리 딸 밖에 없어.”
“그렇지! 그러니까 음……. 내가 다음에는 아빠를 이렇게 이렇게 크게 그려줄게!”
“아냐. 이걸로도 충분해. 우리 딸이 아빠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 이건 아빠가 가져가도 되지?”
꾸깃꾸깃한 종이를 쫙쫙 펼치고 있는 아빠에게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그건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거고……. 사, 사실 아빠를 위해서 내가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게 있어!”
“어? 저, 정말?”
아빠의 눈동자가 촉촉이 변했다. 거짓말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빠가 저 그림을 들고 온 동네방네를 돌아다닐 것 같은 느낌이다.
아빠야 내게 콩깍지가 단단히 씌워서 그림을 전체적으로 못 보는 거지만, 좀만 자세히 살펴보면 지도인 걸 다른 사람도 알 거다.
아마도…….
그러니 저걸 빼앗는 게 우선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아빠가 내가 그린 그림을 온 동네방네 자랑하긴 했었구나.’
과거의 일이고 잊고 싶었던 기억이라 까먹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랬다.
어설픈 내 그림을 천재가 나왔다며 할머니고 누구고 다 보여주고 다녔지. 그래서 딸한테 미친 사람이라는 호칭도 또 얻었고. 덕분에 사람들이 아빠를 향해 혀를 끌끌 차는걸 직접 봐야만했다.
‘이번엔 절대 막을 거야.’
“웅! 그러니까 그건 이제 주고, 내가 다음에 준비하던 거 줄게!”
“하지만 이것도 가지고 그것도 가지고 싶은데…….”
“안 돼.”
아빠 제발. 이건 모두 아빠를 위한 거야. 어디서 바보 소리 듣고 다니게 된다고. 우리 아빠 바보 아닌데. 그냥 딸을 조금 많이 사랑하는 것뿐인데.
“왜에.”
“사람이 그렇게 욕심내면 안 돼. 그거 가질 거면 이 다음에 절대 안 그려줄 거야!”
“아아. 하지만 이런 거 가지고 싶은데…….”
아쉬운 듯 한참 주저하던 아빠는, 내가 그려준다던 새로운 그림이 받고 싶었는지 결국 꾸깃꾸깃한 종이를 내게 주었다.
“꼭 줘야 해?”
“응.”
오늘 당장 저걸 다 태워버리던지 해야지. 버린 것까지 저렇게 살펴볼 줄은 몰랐다.
“약속했다?”
“어! 아. 맞다”
여기서 더 두었다가는 꼭 줘야한단 말을 200번은 더 들을 것 같은 느낌에 급히 말을 돌렸다.
“무슨 일 있어?”
“응! 아빠 아빠.”
“응?”
“오빠들은 우리랑 다른 밥 먹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아빠를 향해 눈을 빛냈다. 역시나 아빠는 전혀 모르는 일인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다른 밥을 먹다니? 그건 무슨 소리일까?”
“아. 아빠는 모르는 이야기인가?”
내 머리를 쓰다듬던 아빠는 몸을 숙여 나와 눈을 맞췄다.
“모르는 이야기?”
“응. 시종이 하는 말이 조금 이상해서 오빠들한테 물어봤거든!”
“그래서?”
“좀 이상하잖아. 나랑 같은 밥 먹으면 살이 통통하게 쪄야하는데, 하나도 안 쪘으니까.”
그제야 아빠가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최근에 바빠서 신경을 못 써서 거의 들여다보지 못하긴 했지만, 그러고 보니……. 살이 하나도 안 찌긴 했어. 단순히 밥을 잘 안먹는 거라 생각했는데…….”
아빠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데리고 온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응응. 그래서 내가 물어봤어.”
“그래?”
“그랬더니 말은 안하는데 뭔가 있어 보였어. 아무래도 우리가 보거나 이럴 때만 밥이 잘 나오는 게 분명해. 아니고서야 오빠들이 살이 안찔 리가 없잖아!”
내 말에 아빠는 동감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말을 듣고 나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아무래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사를 해야겠어.”
“응! 그리고 내일부터 이런 일 없게 오빠를 우리랑 같이 밥 먹게 하는 건 어떨까?”
“어? 그런 좋은 방법이……. 아니 하지만 괜찮겠어. 아마네트?”
“응? 왜?”
이 말에 이상한 점을 알아채지 못한 나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뭐가 문제가 되는 건가.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싫어했잖아.”
“아.”
그러네. 예전이면 난리 쳤었지.
“나 예전의 내가 아냐.”
“뭐?”
“괘, 괜찮다고. 그리고 아빠가 친하게 지내라고 했던 오빠들이잖아. 그, 그러니까 그런 거지.”
내 말은 길가다 채이는 돌이 금이라고 해도 믿을 아빠다. 아니 그걸 넘어서 길거리 돌을 다 금으로 바꿀 미친놈이다.
“그런 거지? 역시 우리 딸 착하다니까. 이렇게 착하고 예쁘고 천재인 우리 딸은 어디서 나왔을까?”
아빠는 내 고운 마음씨에 감동을 받은 듯 반짝이는 눈망울로 나를 바라봤다.
“엄마가 낳았어!”
정확한 사실을 짚자 당황한 아빠는 말을 더듬었다.
“그, 그래. 엄마가 낳았지. 그래도 아빠를 쪼끔 닮긴 했지.”
“아니. 우리 되게 안 닮았어.”
“어……. 아, 아냐. 그러니까……. 어, 음…….”
아빠의 눈동자는 굉장히 불안하게 나를 살폈다. 닮은 구석을 찾으려는 듯 한참동안 나를 살폈지만, 사실 우린 닮은 게 거의 없다.
머리색도 다르고 눈동자색도 다르고. 솔직히 남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닮은 게 하나도 없다.
“어때. 어느 부분이 닮았어?”
“그러니까…… 귀……?”
“응?”
“귀가 닮았네. 아주 똑 닮았어!”
순간 웃고 말았다. 이러다가는 눈썹 숱도 비슷하고, 콧구멍 크기도 닮았다고 할 태세다.
“웅. 닮았어. 다 닮았어.”
“그렇지.”
“그럼 이제 얼른 돌아가. 아빠 일해야지.”
“어? 아냐. 더 쉬어도 돼!”
“안 돼. 오늘 운동했어?”
아빠의 가슴을 주물거렸다. 며칠이 지났음에도 근육이 조금도 붙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아빠는 놀라 가슴에 힘을 줬지만 근육은커녕 뼈와 가죽만 느껴졌다.
“어? 아니 그게…….”
“밥은 잘 먹고 있고? 고기 많이 먹어야 해.”
“고기는…….”
“고기가 얼마나 근육 붙는 데 좋은데!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매일 세 끼 다 고기 먹어. 알았어?”
내 말에 아빠는 아주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은 절대 그러고 싶지 않으나 내 말이니 어쩔 수없이 지키려는 것처럼.
“꼭 지키는 거다. 내가 확인도 할 거야. 운동은 했어?”
“그게 운동이 막 그렇게 쉬운…….”
“핑계쟁이 아빠네. 난 이렇게 핑계 많은 아빠 싫은데…….”
내 투정에 아빠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는 게 보였다.
“아빠 싫어?”
“지금은 좋은데 조금 싫어질 거 같아.”
“어……. 그래?”
“응응. 그러니까 내 말 들어!”
이건 다 아빠의 미래를 위한 거니까. 난 아빠를 보며 눈을 번쩍 떴다. 그제야 아빠는 아주 무겁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번에도 알겠다고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돼.”
아빠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거렸지만, 난 그런 아빠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 알았어…….”
주물 주물.
언젠가 우리 아빠도 가슴에 근육이 빵빵할 수 있을까.
아쉬움을 담아 한참을 만지고 있자, 아빠가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그……. 저, 꼭 가슴을…….”
“확인 중이야. 확인. 우리 아빠가 얼마나 튼튼해졌나. 이렇게 확인하고 나니까 확실히 알잖아. 아빠가 운동도 안하고 음식도 잘 먹지 않는단 거.”
찔리는 게 있던 건지 아빠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맞는 말이지. 우리 따님이 한 말은 다 맞는 말이지. 허허.”
“응. 어쨌든 아빠 내 생일파티 끝나고 나면 오빠들이랑 같이 밥먹는 거다?”
내 말에 아빠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마.”
오빠들과 같이 밥을 먹자 했으니, 아빠도 쌍둥이들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않을 거다.
굳이 오늘 이이야기를 꺼낸 건 우연히 생각난 것도 있지만, 최소한의 의심조차 들지 않게 하려는 거다. 쌍둥이들이 도망쳤더라도, 무언가 의심을 하지 않게 되는.
이곳에서 알고 도망간 거랑, 모르고 도망간 거랑은 찾는 범위가 다르니까.
‘내 생일에 만약에 도망가는 게 성공한다면, 뒤늦게 쌍둥이들을 찾게 될 테고 멀리가지 못했을 거라면서 집안과 근처를 찾겠지.’
어쨌든 떳떳하지 못한 쌍둥이들이니까 대놓고 수색은 하지 못할 거다. 그렇기에 나는 일부러 더 보란 듯이 쌍둥이들을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