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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20/53)

20화

“아, 아가씨이…….”

“우웅.”

“일어나셔야 해요. 이제 준비 안하시면 늦으실 거예요.”

‘늦는다’는 말에 눈이 번쩍 떠졌다. 그냥 저녁이 찾아왔구나 했는데 시간이 너무 늦어버렸다. 잠깐 눈만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시간이 한참 지났나 보다.

“아아! 지금 몇 시야?”

“30분 후면 파티 시작이에요.”

“왜 안 깨웠어!”

그 말에 시녀들의 얼굴이 일제히 굳어졌다. 깨웠다가 내 성질 때문에 한마디 들을까 봐요. 그 말이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들리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그게…….”

“아니다. 얼른 준비하자.”

굳이 변명을 듣고 싶지도 않고 들을 시간이 없다.

결국 과거랑 똑같아지는 건가. 내가 제일 두려워한 게 이건데. 과거와 똑같아지는 거.

“네, 네!”

그래도 멜린지에게 머리를 맡긴다는 말은 잊지 않은 건지, 준비하자는 말에 멜린지가 빠르게 내게 다가와 나를 화장대 앞에 앉혔다.

“옷은 머리 다하고 입혀드릴게요.”

“응! 대신 빨리해줘.”

마치 과거의 시간이 현재의 시간과 억지로 끼워 맞춰지는 것처럼 이렇게 되어버렸다.

“귀엽게 양갈래로 묶을까요, 아니면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예쁘게 빗어 내린 후 악세사리를 꽂을까요. 그게 아니면…….”

“응. 그냥 풀고 갈래.”

“아아. 그럼 악세사리는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리본도 좋고.”

정말 억지로 시간을 늦게 만들어서 과거랑 똑같이 하려고 하는지 자꾸만 시간은 지연되었다.

멜린지가 결정하고 나면 다른 시녀들이 반대했고, 내가 결정하면 다른 이들이 앞다투어 더 나은 것들을 말하기 바빴다.

정말 이 순간 신이 나를 그런 길로, 과거와 같은 길로 인도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에 짜증이 버럭 났다.

“아, 진짜. 착하게 살려했는데!”

머리에 이것저것 대어보면서 고민하는 이들을 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선 앞에 있는 보석핀을 하나 들어올렸다.

“이거. 더 이상 토달지 마.”

“하지만 아가씨…….”

“뭐!”

내가 날카롭게 대꾸하자 시녀들은 깜짝 놀랐는지 뒤로 물러섰다.

“아, 아닙니다.”

과거랑 똑같은 시간, 똑같은 일을 만들지 않겠노라 다짐한 나는 핀을 꽂자마자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야 한다. 그때와 같이 지각하는 일 따윈 없을 거라 다짐하며 파티 홀로 뛰어갔다.

“아가씨! 함께 가요!”

물론 날 부르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들을 무시하며 파티홀로 향했다.

가는 내내 같이 가자는 시녀들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혹여라도 늦을까 내 걸음은 더욱더 바빠졌다.

난리를 친 탓인지 다행히 파티 홀까지는 늦지 않았다. 앞서가면서 날 안내해주던 시녀가 지친 기색으로 파티홀 문을 열었다.

과거에도 한번 봤던 그 파티홀이 한 눈에 들어왔다.

‘예전이랑 똑같네.’

장식부터 무엇 하나 달리지지 않은 곳.

후작의 딸이긴 했지만, 파티홀은 생각보다 협소했다. 과거에는 그저 파티를 열어준다는 생각만으로 기뻐서 자신에게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파악조차 하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충분히 파악된다.

후작가의 본저택도 아닌 서쪽 저택에 마련된 파티.

그 중에서도 연회장이라 하기엔 애매한 크기의 파티홀. 한 눈에 그 안의 모습이 다 보일 정도의 홀은 내가 이집에서 그리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암시했다.

대외적으로는 생일파티를 열어줄 정도로 사랑받는 손녀지만, 막상 참여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느꼈을 거다.

‘뭐. 이제는 상관없지만.’

과거에는 무지해서 상관없었고, 지금은 이딴 취급 받아도 상관없었다.

난 당당히 그 안으로 들어섰다.

5단 케이크와 화려하게 장식된 장식품들, 간간이 들려오는 음악소리와 내게 그리 관심이 없어 보이는 어른들까지.

내 생일파티인지 사교의 장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보니 참 말도 안 되는 파티였구나.’

멍청하게도 이런 분위기도 좋다고 그리 들떠있었으니.

과거에 나는 처음 맞는 귀족가의 생일 파티에 잔뜩 들떠있었다. 처음 보는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하기 바빴고, 누가 준지도 모르는 선물들을 풀어보며 엄청 신이 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생일이라고 방문한 할머니에게 애교까지 부려댔으니.

“아가씨. 어디 가세요? 저쪽에 선물 안 풀어보세요?”

그런 상황이 올 걸 알기에 내 목적지는 정해져있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쌓인 선물을 지나,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을 지나.

눈이 번쩍 뜨일만한 케이크와 간식들 모두 지나쳐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 시녀들은 꽤 놀란 듯 내 뒤를 졸래졸래 따라왔다.

“아가씨?”

“왜?”

“그러니까……. 생일파티인데 여, 여기 계시게요? 선물도 뜯어보셔야 하고…….”

“내 맘대로 하면 안 되는 거야?”

단호한 내 말에 시녀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아가씨 원하시는 대로 해야지. 이곳은 아가씨의 생일파티인걸. 아무것도 하기 싫으시다면 그냥 우린 가만있으면 되는 거야.”

“멜린지. 너는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지.”

“맞아. 누가 모른대?”

그러는 와중에 멜린지는 내 편을 들어주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오히려 그게 다른 시녀들의 반감을 사기 바빴다.

왜 네가 거기서 나서냐고. 질투 아닌 질투를 하는 그들은 멜린지를 향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유모가 없는 지금 이 상황에서 내 시녀들의 계급은 일반 시녀로 모두 똑같다. 측근 시녀들도 없고, 책임 시녀들도 없다.

그렇기에 저들 사이에 신경전은 꽤 팽팽했다. 할머니의 명을 받아서 내게 온 이들은 어느 정도 선을 지키면서 내 눈에 들길 바랐다.

‘그게 정말 내 눈에 들기 원한 건 아녔지만.’

할머니의 예쁨을 받기위해.

할머니에게 나에 대한 조금의 이야기라도 하기 위해.

저들은 그렇게 나와 친해지길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최근에 나와 친해진 멜린지에 대한 불편함을 가지고 있었던 듯 싶다.

“왜 갑자기들 그러는 거야. 내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

착하긴 하나 약간의 눈치가 부족한 멜린지는 그들의 말에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누가 틀렸대? 맞는 말은 맞는 말인데, 네가 뭐라도 된 듯 이야기하는 이 상황은 아니라고 말하는 거야.”

“맞아!”

“누구를 바보로 아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앉아서 시녀들이 말 다툼하는 모습을 보던 난 깊은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정말…… 누가 파티의 주인공인지 모르겠네.”

“아…….”

“지금 내 앞에서 싸우는 거야?”

“그것이…….”

“다들 내가 안 보이나 봐. 내가 너무 쪼끄만 해서 그런가?”

좋은 말이 나오려야 나올 수 없다. 할머니의 눈에 들고 싶어하는 건 잘 알겠는데 정도를 지나치는 건 아니지.

“아,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고서야 지금 하는 짓이 뭔데. 내 앞에서 나 무시하기? 아니면 나 없는 사람 취급하기. 그런 건가?”

“오, 오해세요!”

“오해는 무슨. 무시하는 거 맞네.”

시녀들의 안색이 하얗게 변한 건 그때였다. 당연히 이쪽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거리를 두고 서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일제히 향했다.

“아, 아니요. 그게.”

“됐어. 시끄럽게 굴 생각 따위 없어. 그러니까 다들 조용히 있어.”

오늘 생일파티의 최종 목표는 조용히 생일파티를 끝내는 거다.

별 기대도 안 되는 이 생일파티에서 못 볼 꼴을 보지 않고, 그냥 조용히 무사히 아무 일 없이 끝내는 거.

그래서 시녀들을 조용히 시켰건만, 이때다 싶었던 건지 익숙한 사람이 하나둘 내게로 다가왔다.

“네가 어쩐 일이냐.”

큰아빠 베헬의 아들인 케일럽과, 둘째 큰아빠 아펠의 아들 레트와 칼.

마치 한 세트라도 되는 것처럼 놈들은 차례로 내게로 다가왔다.

“뭐가.”

“좋다고 선물 뜯고 난리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뭐하냐.”

“이번 컨셉은 그거냐?”

“시비 걸러 온 거야?”

한명이 끝나면 한명이 연달아 시비를 걸었지만, 조금도 타격이 없었다. 도리어 내가 강하게 나서자 둘은 약간 몸을 움찔거렸다.

“이렇게 하면 더 관심이라도 받을 줄 아나보지.”

“아. 그거구나. 역시 케일럽 형은 똑똑하다니까.”

“맞아맞아. 그거네. 조금이라도 더 관심 받으려고.”

아니란다. 어리석은 중생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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