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장난감을 가져왔다지?”
장난감. 아빠가 데리고 온 쌍둥이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건…….”
“아니냐. 레오칼.”
“말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알 거라 생각하긴 했습니다. 어머니. 하지만 장난감이라니요.”
“뭐가 되었든, 내 눈엔 그리 보이는구나. 하여튼 네가 맘에 들지 않는구나. 모든 일들이 하나하나 다.”
차라리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아빠는 이런 취급까진 안 당했을 텐데.
누구보다 자식을 사랑했던 할아버지와 달리 할머니는 전혀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제 배 아파 낳은 자식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버릴 사람이었다.
“그리 말씀하신다하셔도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줄은 아느냐.”
“네. 그저 불쌍한 아이들을 데려온 것뿐입니다.”
할머니의 입가가 매우 불편하게 삐뚤어진 건 그때였다.
“불상한 아이들이라. 재미있구나.”
“아빠. 나 이제 졸린데…….”
할머니 앞에선 항상 아빠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뻔히 보이는 그 상황에 난 다시금 아빠를 재촉했다.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야만 했다.
‘난 이래서 할머니가 싫어.’
나이가 들었다고 모두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려주는 사람.
그저 나이만 먹은 노망난 노인이 되어버린 저 할머니란 작자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고민마저 들던 그때였다.
“어찌되었든 네가 알아서 하겠지.”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할머니의 안색이 변했다. 심지어 할머니는 지나가던 시종을 세워서는 그가 들고 있던 와인을 손에 들었다.
“갈 땐 가더라도 생일 축하는 해줘야지. 네 딸인데.”
‘딸’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던 할머니는 반대편 손에 와인잔을 하나 더 들고 아빠에게 내밀었다.
“그래도 ‘가, 족’ 이니 생일은 축하해줘야지.”
가 ~족 같은 소리하고 있네.
세상에 이런 가족 어디 있어. 정말 돼지 족발보다 못한 관계가 가족 같은 관계인데.
단 한 번도 나를 가족이라 여긴 적도 없으면서, 정말 뻔뻔해서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범주 안에 내가 들었다는 기쁨 때문인지 아빠는 꽤 밝은 얼굴로 할머니가 준 와인을 급히 받아들었다.
“가족이라니. 어머니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바보 같게도 아빠는 그 말에 홀라당 넘어가서는 어느 때보다 밝게 웃었다.
“그래. 그러니 아마네트의 생일 함께 축하하자.”
갑자기 바뀐 할머니의 태도만 봐도 우리에게 그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서 분명히 와인 잔을 떨어뜨리겠지.’
내 예상은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저기서 와인 잔을 떨어뜨릴 거라는 예상과 정확히 맞아떨어지게 할머니는 아빠의 잔을 맞추자마자 바로 잔을 떨어뜨렸다.
덕분에 귀하디귀한 할머니의 드레스에 붉은 와인이 붉게 물들어갔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정적이 찾아왔다.
“어, 어머니!”
나를 안고 있는 상태에서 와인잔을 들고 있던 아빠는 당황한 듯 목소리를 높였지만,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대신 큰아빠 베헬이 늙은 여우처럼 할머니의 곁에 바짝 달라붙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나야 괜찮다. 그런데 드레스가 엉망이 되었구나.”
분명 짜증을 내는 게 맞았지만, 할머니는 조금도 짜증내지 않았다. 마치 이 상황을 미리 알고 있던 것처럼.
‘마치 알고 있던 나처럼 놀라질 않네.’
우스울 따름이다.
과거에는 이 상황에 놀라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 할머니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정말 눈앞에서 보는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이 상황을 의도한 자의 모습이었다.
“사람을 불러 치우라 해야겠구나.”
굳이 그런 말을 할 할머니가 아니었다. 어차피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는 치울 테니까.
철저하게 신분이 나눠진 사회에서, 특히 사용인들이 있는 이곳에서. 할머니는 굳이 쓸모없는 말까지 꺼냈다.
“어서 들어오라 하거라.”
할머니를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듯, 어딘가를 향해 명령을 내린 큰아빠 베헬. 그리고 그 말이 신호라도 된 듯 여러 명의 사람이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 중에 한명이 문제였다.
옷을 깔끔하게 입은 다른 이들과 달리,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한 여자.
‘결국 또 이렇게 되는구나.’
그 사람을 보며 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재촉한 건데 결국 미래에 벌어질 일은 어떤 방식으로든 벌어졌다.
역시 과거를 바꿀 순 없는 걸까.
“아…….”
날 안고 있던 아빠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아빠 또한 옷차림이 허름한 ‘그 여자’를 본 거다.
마치 우주를 담아놓은 듯, 푸른빛이 도는 검은 머리칼의 보라색 눈동자…….
아빠가 맨 처음 엄마를 봤을 때 느낀 건 깊은 밤 같구나. 라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다가갈 수조차 없고, 다가가면 침식될 것만 같은 그런 사람. 하지만 그 밤은 무엇보다 밝았고, 찬란한 태양보다 더 따뜻했다고 한다.
전쟁 고아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밝고 따스한 성격의 엄마는 웃는 모습이 참 예뻤고, 어디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초상화로만 몇 번 본 아마네트의 엄마이자, 아빠가 영원히 사랑했던 한 여자.
엄마와 꼭 닮은 그 여자가 등장해버리고 말았다.
‘휴.’
내 생일이 최악이 되어버린 이유는 바로 엄마의 등장이었다. 내 생일 파티가 열리던 그 곳에서 엄마와 꼭 닮은 여인이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
물론 엄마가 아니란 건 안다.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니까.
하지만 엄마의 죽음은 아빠의 죽음만큼이나 찝찝했다. 나를 낳고, 엄마는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음식 섭취조차 하지 못했고, 하루종일 잠만 잤다고.
그런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젖도 한번 물리지 못한 엄마는 어느 날 밤에 갑자기 사라졌다. 자신을 찾지 말라는 쪽지 한통과 함께.
어린 나를 안고 아빠가 할 수 있는 건 엄마를 찾아 헤매는 것 뿐.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엄마는 찾지 못했고, 결국 아빠가 포기하려고 할 때쯤. 엄마가 나타난다.
이미 죽어버린 모습으로. 이미 오래전 사망한 모습으로…….
형체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으나 엄마가 입고 있던 옷과 외향이 엄마임을 알려주었다고.
그 후로 아빠도 반은 미쳐서 살았다.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품속에 있던 편지에선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엄마의 간략한 메모가 적혀있었고, 그로인해 아빠는 나를 돌보지도 못한 채 술에 의존해서 살았다 한다.
지금의 아빠가 내게 더 잘해주는 이유이기도 했다.
엄마가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아빠는 일 년을 미쳐 살고.
아무 관심조차 받지 못한 채, 젖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어찌어찌 어렵게 자란 아마네트는 아빠가 정신을 차릴 때 쯤 이미 삐쩍 마른 상태였다.
우유를 먹고 자랐으나, 입이 까다로워 제대로 먹지도 않았고, 아빠가 신경 쓰지 않으니 가문에 제대로 신경서주는 사람도 없었다고 들었다.
아빠는 정신을 차린 이후 아마네트에게 더 미쳐서 잘해주었다.
마치 과거에 자신이 한 잘못을 용서받으려는 것처럼, 더 과할 정도로 애정을 쏟아 부었다.
아빠는 일부러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살아왔다. 마음 한 켠에는 엄마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이 있었다. 사랑했던 이의 죽음이 석연치 않았으니까.
그런데 엄마랑 꼭 닮은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다.
“아아. 로렌…….”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할머니가 바닥에 고의적으로 떨어뜨린 와인을 치우는 여인이, 엄마와 꼭 닮은 여자라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아마도 일부러 그런 사람을 데려온 거겠지.’
아빠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엄마의 이름이 나오자 할머니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저 아이도 전쟁고아 출신이군. 태생적으로 저런 아이들은 비슷하게 생긴 건지.”
“…….”
앞에 있는 엄마를 꼭 닮은 여인에게 정신이 팔려 할머니의 말이 안 들릴 법한데 아빠의 표정은 삽시간에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