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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25/53)

25화

아빠와 수다를 떠는 바람에 결국 늦게 자버리고 말았다.

그동안 내가 아빠에게 관심을 덜 준 탓인지 아빠는 이때다 싶은 사람처럼 밤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바빴다.

결국 눈을 뜬 건 다음날 늦은 점심때가 되어서였다.

“하암. 졸려.”

“많이 졸리세요?”

“응. 엄청.”

오늘도 내 머리를 만져주던 멜린지는 꾸벅 꾸벅 조는 날 보며 거울 너머로 웃어보였다.

“그럼 더 주무실래요?”

“아니. 오빠들한테 갈래. 케이크 큰 건 준비해놨겠지?”

“네. 아침에 이야기해서 어제 남은 케이크 중에 아예 손도 안 댄 걸로 가져다 달라했어요.”

쌍둥이들이 도망가지 못했더라면 아직 그 방에 있을 테고.

도망갔더라면 내가 도와준 걸 아무도 모르게 하는 나름의 방법이었다.

“응! 머리하고 오빠들한테 갔다 와야지.”

“네. 빠르게 해드릴게요. 배고프진 않으세요? 주인님께서 아가씨가 늦게 일어나 같이 식사를 못해서 매우 아쉬워 하셨다고 해요.”

아쉬우면 어제 일찍 재웠어야지. 아빠도 알고 보면 진짜 수다쟁이라니까.

어린 아이를 앉혀놓고 본인 이야기를 그렇게 길게 하냐고. 아빠의 인생사를 모두 들은 기분이다.

‘그래도 재밌었지만.’

피곤한건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수다 떨어놓고 이제와 아쉬워하는 것도 웃길 따름이다.

“다음에 하면 되는 거지.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는걸! 거기에 아빠는 말이 너무 많아.”

“그렇긴 하시죠.”

피식 웃은 멜린지는 내 머리를 양쪽으로 곱게 땋아 주었다.

“자, 다 되었어요.”

“응! 얼른 갈래. 어제 오빠들은 방에서 나오지도 못했잖아. 그래서 엄청 미안해.”

“그래도 특별식이 들어가긴 했을 텐데요.”

“그래도.”

순진한 멜린지는 다른 이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지 활짝 웃었다.

“걱정 마세요. 아가씨께서 이렇게나 신경쓰시는 분들인데 누구보다 잘 챙겨드렸을 거예요.”

“응.”

때라곤 하나도 묻지 않은 듯한 그녀다. 보이는 것 그대로, 자신이 생각하는 것 그대로 믿는 사람.

‘그래서 더 편한 걸지도.’

나쁜 인간들이 벌레들처럼 그득그득한 이곳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상대가 그녀였다.

물론 내가 미래를 알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난 그녀가 참 좋다.

“드레스는 이걸로 준비할게요.”

“응!”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가져오는 멜린지 덕에 준비는 금방 끝마쳤다.

타이밍 좋게 다른 시녀가 케이크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준비 다 됐네. 어서 가자.”

“참 신기하세요.”

“응? 뭐가?”

“아가씨께서 그분들을 이렇게 까지 마음에 들어하실 줄은 몰랐거든요. 그동안 해오신일을 생각해보면…….”

말끝을 흐리는 멜린지를 보며 나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의 나였다면, 아니 빙의되기 전에 진짜 아마네트였다면 쌍둥이들에게 이다지도 관심을 가질 일은 없었을 거다.

설사 그게 아마네트가 아니라할지라도, 그 나이 또래아이는 다 비슷할 것이다.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뭐. 불쌍하잖아.”

“아. 그렇긴 하죠.”

쌍둥이들이 있는 방에 거의 다왔을 무렵, 유난히도 복도가 조용했다.

전에 봤던 그 시종도 없었고, 쌍둥이 방 앞에는 조용하게 나를 보며 고개를 숙이는 시녀들 몇 명만 있을 뿐이었다.

며칠사이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것처럼 심히 깍듯해진 그들의 행동에 당황스러웠다.

‘내 성질 나쁜 게 여기까지 소문났나.’

아니고서야 저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변할 리가 없는데. 눈을 작게 흘겨가며 그들을 빤히 바라봤다.

“저희에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아가씨.”

“응? 아니.”

화들짝 놀란 그들을 보며 가슴 어딘가가 매우 찝찝하다.

“문 열까요?”

저렇게 사람들이 달라질 수 있나. 과거에 생각해보면 저렇게까지 나에게 깍듯했던 사람은 없었던 거 같은데.

“응. 케이크는 조금 이따 들여보내줘.”

케이크를 들고 있던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신호로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열렸다. 심지어 문을 열기 전에 시녀들은 방안에 노크까지 했다.

예전에는 노크는커녕 벌컥 벌컥 문을 열던 것과는 꽤 달라진 모습이었다.

문이 열리자 휑한 방이 눈앞에 드러났다. 마치 사람이 없는 것처럼 인기척하나 없는 방.

내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시녀들은 문을 닫았고, 그것 때문에 분위기는 더욱 더 쓸쓸했다.

‘정말 탈출에 실패한 건가?’

하지만 내가 그런 생각을 막 하던 그 타이밍에 쌍둥이들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왜 그렇게 놀라?”

“어? 아, 아니 왜 옆에서 나와. 순간 아무도 없는 줄 알았잖아.”

마치 벽에 붙어 있던 것처럼 나타난 쌍둥이들은 슥슥 내 앞을 지나쳤다.

그러더니 아무 일도 없던 사람들처럼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언제나 자신들이 앉아있던 의자로.

난 그들을 따라 졸래졸래 창가로 향했다.

“그런데 왜 맨날 여기 앉아있는 거야?”

“밖에 보는 게 좋잖아. 답답하지 않고.”

칼리스토가 씩 웃더니 자신이 언제나 앉아있던 자리 앞에 서서 날 향해 손을 까딱였다.

“응?”

“여기 앉으라고.”

“아아.”

이런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지. 난 칼리스토가 말한 자리에 냉큼 자리 잡고 앉았다.

뻔뻔스러운 그 모습에 베른이 황당한 듯 피식 웃고 말았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지.”

“나 말이야?”

“응. 그냥 참 신기해.”

“내가 좀 신기한 사람이긴 하지. 나 같은 매력을 지닌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거야.”

뻔뻔스럽게 웃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내가 생각해도 뻔뻔하지만, 세상은 조금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 내가 주눅 들고 살아봤자, 도움될 게 하나도 없었다.

다른 이들에게 친절하고 다정해봤자 호구만 될 뿐이다.

그러니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어떻게 바라보든 뻔뻔한 게 최고다. 남들이 뭐라 하든 내 갈 길만 간다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네.’

생각에 대한 결론에 도달하고 나니 머릿속 정리가 훨씬 편해졌다. 그래서였을까 기분도 아까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창밖의 모습이 아까보다 더더욱 눈에 들어왔다.

내 방에서 보던 풍경과 똑같았으나 이곳에서 보니 또 세상이 달라보였다.

“흐음~ 여기서 보는 것도 좋네.”

발을 앞뒤로 흔들며 살짝 웃었다.

그러는 사이 자신이 할 말을 어느 정도 정리한 듯 옆에 앉아있던 베른이 흠흠 거리며 목을 가다듬다 나를 바라봤다.

“네가 준거 말야.”

“응?”

“그거 말야 그거.”

방에 분명 우리뿐이건만, 다른 사람이 들을까 걱정되는 것처럼 베른는 내 쪽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그게 뭔데?”

“네가 준 알아보기 되게 힘든 그거.”

“지-”

지도 라고 말하려는 순간 베른이 급하게 내 입을 막았다.

“조, 조용히 해. 다른 사람이 들으면 어쩌려고!”

“응?”

내가 큰 실수를 한 건가 눈만 깜빡였다.

“어디에 귀가 있을지 모르니까 조심하라고.”

“어……. 응. 그, 그렇지?”

“쨌든 진짜더라?”

꽤 조심스러워하던 베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 것도 그때였다.

정말 기분이 좋았던 건지, 웃는 베른의 볼에 보조개가 깊게 파였다.

“끝까지 날 못 믿었구나.”

“못 믿었다기 보단……. 못 믿은 거 맞네.”

스스로 결론을 내리던 베른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럴 만했어! 널 어딜 보고 믿어.”

“얼굴?”

“뭐?”

“내 얼굴 꽤 믿음이 가득해 보이지 않아? 솔직한 게 내 매력인데.”

어깨를 들썩거리자 베른이 황당한 듯 허, 하는 탄식을 내뱉었다.

우리 이야기를 옆에서 내내 듣고 있던 칼리스토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휙 돌렸다.

‘나 꽤 믿음직스러운 얼굴이라 생각했는데.’

귀엽고 사랑스럽고 믿음직스러운 얼굴.

아무리 봐도 그런데, 아무도 안 믿는 듯싶다.

‘뭐가 되었든. 다행이네.’

어쨌든 내가 준 지도로 인해 쌍둥이들이 날 믿게 만들었던 거니까.

꽤 이득인 상황은 확실했다.

“근데 왜 도망 안 갔어? 진짜더라 라고 말하는 거 보면 직접 지…… 아니 그걸 보고 움직였다는 건데.”

“어어. 가려했어. 진짜 네 생일 파티 때문인지 다들 정신없어보였으니까. 짐마차까지 올라탔는데…….”

베른하르트가 말끝을 흐렸다.

이 타이밍을 기다렸다는 듯 칼리스토가 슥 옆으로 다가왔다.

오늘 내내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칼리스토의 얼굴에 아주 작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가식적으로 나를 대하던 칼리스토가 처음으로 보인 진짜 미소라는 기분이랄까.

가슴 어딘가가 간질간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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