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그게 있구나!”
“네?”
나에 관한 일이면, 아빠는 화를 내는구나. 자신의 형들에게는 화를 내지 못했지만, 적어도 사용인들에게는 화를 냈다. 그렇다면 더 화가 나게 하면 분명 가족들에게도 화를 낼 거다.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이 잘못된 게 아님을 아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표현하면 조금씩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는 게 아닐까, 하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렇기에 아빠가 화를 내고 성질을 내는 게 최우선이다.
“좋았어!”
“조, 좋아요?”
“응! 신기하게 멜린지랑 이야기하다보면 뭔가 막 눈이 번뜩 뜨이는 거 같아.”
물론 조금 상처도 받긴 했지만, 그녀와 이야기할 때마다 신비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내가 그동안 너무 속이야기를 아무랑도 안하고 살아서 그런가.’
단순히 그래서,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생각 정리가 되고 그래서 그런 건가. 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어찌되었든 긍정적인 변화기에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가 도움이 되는 걸까요?”
“물론이지. 엄청 큰 도움이 되었어. 아. 음. 오늘은 본가 정원에서 놀아야겠다.”
“네? 거기는 가기 싫어하셨잖아요. 가시게 되시면 도련님들 만나게 된다고.”
“응! 그런데 거기서 피는 예쁜 꽃이 보고 싶어졌어.”
그놈들을 만나게 되는 곳이니까 거기에 갈 필요성은 충분해졌다.
멜린지는 불안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난 어느 때보다 더 활발하게 발을 움직였다.
여전히 그 놈들을 볼 때마다 화가 났다. 멍청했고, 재수 없고. 가진 것 없이 핏줄 덕에 예쁨 받고 인정받는 놈들. 거기에 엄마 없는 건 매한가지건만, 그놈들은 자신들은 특별한 것처럼 굴었다.
‘첫째 큰아빠나 둘째 큰아빠나 이혼 당했으면서. 첫째 큰아빠는 폭력이었고, 둘째 큰아빠는 온갖 여자에게 찝쩍거려서 바람피운 게 문제였지. 차라리 엄마만을 사랑했던 우리 아빠가 최고다.’
그러면서 엄마 없다고, 날 얼마나 구박하던지. 이가 아득아득 갈린다. 과거에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매번 화를 냈고, 그래서 싸우기도 수십 번이었다. 그럴 때마다 언제나 사과하는 건 아빠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오히려 이번엔 좀 시비를 걸어줬으면 좋겠네.’
아빠 성질 나쁜 못된 놈을 만들려면 그들이 도움이 꼭 필요하니까. 어차피 멍청한 망아지들은 내가 조금만 자극해도 분명 넘어올 거다. 그걸 알기에 얼굴에는 자꾸만 웃음이 번졌다.
“아가씨 괜찮으신 거 맞죠…….”
물론 그 웃음이 퍽 좋아 보이진 않았던 건지, 멜린지의 얼굴에는 불안함이 겹쳐졌지만.
“응! 오늘이 딱 날이 좋아.”
“무슨 날이요?”
아빠가 할머니를 만나러 갔다 온 날. 나만큼 아빠는 할머니를 만나고 온 날 기분이 쳐지곤 했었다.
내 생일 후 며칠이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아빠가 꽤 우울해보였던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그러니 완벽한 하루 아니겠어.’
내가 꾸미는 연극에 올라갈 완벽한 등장인물.
그래서 난 조금 난감해하는 멜린지와 함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콧노래가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멜린지와 함께 걷는 내내, 원하는 목적지까지 가는 내내 난 그렇게 신나있었다.
“아가씨. 예전엔 이곳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 않으셨어요?”
“그랬나아~.”
“분명 그러하시다 들었는데…….”
다른 이들에 비해 뒤늦게 내 시녀가 된 멜린지는 나에 대해 꽤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곳, 후작가 본성에 있는 정원을 내가 죽도록 오기 싫어하다는 걸.
가문에 위치한 수많은 정원 중 본성의 정원은 크기나 꽃의 종류, 개수에서 여러 가지로 최고였다. 다른 가문은 어떨지 모르나, 후작가에서는 확실히 압도적인 곳이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난 이곳을 참 좋아했다.
정원으로 들어가는 일곱 갈래의 길은 각기 다른 꽃들이 심어져 있었다. 마치 무지개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색으로.
거기에 사시사철 푸른 랠란디 나무들로 만들어진 조형물들은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온갖 동물들을 형상화한 나무 장식물들까지 완벽했다.
‘할머니가 꽤 아끼는 정원이지 이곳은.’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본성의 정원을 관리하는 정원사들만 스무 명에 달할 정도였다. 제국 내에서도 후작가의 정원이 제일 아름답다 소문 나있을 정도였으니까.
“뭐……. 그랬을 수도 있고.”
어색하게 웃으며 정원에 드디어 입성했다.
“하지만 여기만큼 꽃이 예쁜 곳은 없는걸.”
내내 걱정하던 멜린지가 동의한다는 듯 작게 아,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이곳만큼 꽃이 예쁜 곳은 없었다. 보기도 힘든 꽃들이 발에 차이는 돌멩이들처럼 가득가득 했으니까.
“그렇긴 하죠.”
“응! 그러니까 오늘은 여기서 놀래.”
“오늘 참 이상하시네요. 아까는 어떻게 못되지는 거냐고 물으시더니, 오늘은 생전 오지 않던 정원에 오시고…….”
멜린지가 뭘 걱정하는지 모르지 않기에 평소보다 더 밝게 웃는 것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는 사이 정원을 관리하고 있던 정원사들은 매우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이곳에서 나올 줄 몰랐던 것처럼, 아니 이곳을 방문할 줄 상상도 못한 것처럼.
아 닌게 아니라 내가 아마네트가 되기 전, 아마네트는 이 곳에서 꽤 큰일을 당했었다.
과거와 현재는 내가 끼어들지 않으면 똑같은 시간 똑같은 사건대로 흘러간다.
그렇기에 이미 이 시간의 나도 겪었을 그 일.
‘그저 예쁜 꽃을 보러온 것뿐이었는데.’
둘째 큰아빠의 아들인 레트와 칼. 이 가문의 제일 문제아들이며 사사건건 내게 시비를 걸던 그놈들이 역시나 그 날도 시비를 걸어왔다.
네가 왜 이곳에 오냐며, 언제나처럼 벌어진 그런 시비였다. 과거의 나는 할머니의 손주놈들의 말에 하나하나 반응했다.
그러니 그놈들은 더 재밌어 했고, 날 더 괴롭혔다.
그 결과 과거에 난 꽃을 구경하는 내 뒤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는 쌍둥이들에게 달려들었다.
‘덕분에 귀한 손주놈들 얼굴에 생채기를 냈다며 할머니에게 엄청 혼났었지.’
혼났다 뿐인가. 그래봐야 아주 작은 손톱자국이었지만, 할머니는 거의 팔다리가 부러진 것처럼 화를 내고 오버를 했다.
심지어 일주일 내내 나를 찾아왔다. 난 할머니가 서쪽 저택에는 못 오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일주일 내내 날 혼내러 참으로 잘 왔다.
‘그러다 결국 나도 쓰러졌지만.’
하루에 몇 시간씩 너는 그러면 안 된다. 이건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다시는 이런 일을 만들지 말아라. 그런 개소리를 하는 걸 다 듣던 난 결국 쓰러지고 만다.
몇날 며칠을 일어나지도 못한 채, 실어증에 가깝게 말을 잃고 살았다. 다행히 일주일 정도 지난 뒤에는 정신을 차렸고, 그 때의 기억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이 정원을 피했다. 이때 이 이야기도 나중에 나이 먹고 다른 시녀들이 말해주어서 알게 되었지만.
‘그래서 멜린지는 대놓고 이 일을 말하지 못했지. 아빠도 할머니조차도 이때의 일을 언급조차 하지 못하게 했으니까.’
다행히 내가 기억은 없지만 이 정원을 피했는데, 오늘은 결국 방문하고 말았다.
“아가씨. 혹시 몸이 갑자기 이상해지시거나 하시면 말씀해주세요?”
“왜?”
“아, 아니요. 그냥 최근에 무리하신 거 같아서. 몸 안 좋아지시면 말씀 달라는 말이에요.”
“응!”
멜린지 또한 이 일을 누구보다 알고 있기에, 다른 말로 내게 돌아가자 설득하고 있단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돌아갈 마음은 1도 없다.
도리어 난 아까보다 더 신나하며 정원 안으로 들어섰다.
일곱 갈래의 길. 하나하나 의미가 담긴 그 길들을 대충 지나 한가운데 위치한 분수까지 걸음을 옮겼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분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물이 뿜어져 나왔고, 공중에서는 물방울이 튀겨 무지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분수 안에는 저마다의 색을 뽐내는 물고기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난 분수를 잠시 바라보다가 붉은 장미와 멋진 말들이 장식되어있는 동쪽 별장 쪽 길에 들어섰다.
“아가씨…….”
“응? 왜.”
“다른 곳을 보심이 어떠실까요? 여기는 생각보다 별로일 거 같아요.”
동쪽 저택. 그 곳은 할머니의 손주들이 사는 곳이다. 과거의 일 때문에 내가 또 잘못될까 봐, 거기에 쌍둥이들이 나타날까 봐 걱정이 한가득인 멜린지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주변을 한참 살펴보더니 나를 막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