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어디서 너 같은 게 우릴 위협해.”
타이밍이 참 좋았다. 멀리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의 목소리. 사랑하는 아빠기에 그 목소리를 모를 리 없었다. 사실 아빠가 이쯤되면 올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었다.
아빠가 오늘 할머니에게 갔다 올 거고, 이 시간에 돌아올 거라는 것들.
그래서 아빠의 성격 개조를 위해 오늘을 선택했고, 그래서 완벽하게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과거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을.
그래서 아까보다 성질을 죽이고 최대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위협한 적 없는데. 오빠들이 나와 친해지고 싶어하는 거 같아서 나 또한 친해지려고 한 것뿐이야.”
“무슨 미친 소리야. 너 그런 거 아니었잖아!”
“아니라니. 그럴 리가. 정말인데. 난 정말 그런 거였는데. 친해지려고 한 것뿐이야.”
“네가 정말 저주받은 앤지 알고 싶은 거잖아!”
“글쎄?”
피식 웃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던 그때였다. 아빠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훨씬 더 가까워졌고, 난 아까보다 더한 비명을 질렀다.
“꺄악- 이제 그만해. 오빠들 아프다고……!”
“아프긴 한 거야? 한 거냐고! 넌 더 아파야 해. 정신을 차려야 해.”
더욱 더 심하게 팔을 꺾는 통에 솔직히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리고 때마침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하는 짓이야!!”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 어느 때보다 화가 난 목소리.
난 일부러 그쪽을 보지 않았다. 어차피 내 시야가 아닌 뒤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던 데다가, 아직도 망아지놈들에게 당하고 있음을 어필해야만했으니까.
“아…….”
그 사이 상황파악이 끝난 두 놈은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더 이상 나를 괴롭히면 안 된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다다.
멍청이는 아니었기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날 잡고 있던 손들을 빠르게 놓았다. 그렇다 해서 지금까지의 행동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아마네트!!”
몇 초 사이 내게로 뛰어온 아빠는 망아지들이 날 놓자마자 빠르게 날 안아들었다.
“아가…… 우리 아가 괜찮은 것이야?”
“아빠아…….”
아빠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조금의 고통 때문에 눈가가 촉촉이 젖어있던 탓에, 아빠가 날 보자마자 더 흥분하는 건 당연했다.
맑기만 했던 아빠의 눈가가 붉게 달아오르는 게 보였다.
“하. 이런 일은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날 자신의 품으로 힘껏 끌어안은 아빠는 망아지들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 와중에 도망가려 한 건지, 망아지들은 우리와 이미 거리가 상당히 멀어진 상태였다.
“레트. 칼.”
“왜, 왜!”
“할 말이 있을 텐데.”
“할 말 없는데!”
지들 아빠가 우리 아빠를 무시하니, 저놈들 또한 우리 아빠를 무시하고 있다.
지금도 아빠의 말에 고개를 휙 돌리는거 보면.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다.
“뭐. 왜.”
“…….”
평소라면 저런 모습에 망아지들을 그냥 보냈을 아빠다. 언제나 아빠는 문제를 일으킨 자들을 보내고, 대신 자신이 나의 원망을 다 듣곤 했다.
아빠 탓이라고, 아빠가 너무 나약한 탓이라고.
아무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아빠는 언제나 그러했다. 두 형을 제치고 자신이 후작이 된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두 형에겐 물론이거니와 그 자식들에게도 아빠는 한없이 잘해주었다.
이번에도 그렇게할까 봐 난 아빠의 옷자락을 잡은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아빠 나 아파써…….”
혹시나 마음이 약해질까 봐, 아빠를 더 이상 호구로 만들지 않기 위해 방금 전까지 꺾여있던 손을 한참동안 어루만졌다.
그제야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생각난 듯 아빠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방금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 있나.”
들어본 적 없던 아빠의 목소리였다.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날선 차가운 목소리.
‘역시 멜린지와 이야기한 게 도움이 되었네.’
아빠의 성격을 고치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효과는 좋았다.
“뭐.”
“갈래.”
“우리가 이야기 할 필요 없잖아.”
그냥 이 자리를 피하고 싶은 건지 레트와 칼은 차례대로 몸을 돌리려했다.
“잡도록.”
“네?”
“잡으라고 명했다.”
아빠는 직접 잡기도 싫은 듯 옆에 있는 시종에게로 살짝 시선을 옮겼다.
다정함 따윈 하나도 없는 눈동자. 일을 낼 듯이 단호한 그 눈동자는 아무런 감정을 실고 있지 않았다.
“두 번 말하게 할 건가.”
그 사이 레트와 칼은 여유롭게 돌아가려 했고, 아빠는 다시 한번 시종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렇지만…….”
“왜. 저 아이들이 형님의 아이들이라 안 된단 건가?”
“아, 아니 그것이…….”
“그대들이 모시는 이가문의 주인이 누구지. 나인가. 아니면 형님들인가. 아니면 어머니인가.”
강인한 어조를 듣고 나니 이제는 별 수 없다 생각한 건지 시종들이 빠르게 레트와 칼에게로 뛰어갔다.
“도련님들. 잠시만요.”
“왜! 네가 뭔데 우리를 붙잡아!”
“후작각하의 명이 있어서요.”
“이거 놔!”
“이쪽으로 데리고 오도록.”
자신이 움직일 필요조차 없다는 것처럼 아빠는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
여전히 레트와 칼은 짜증을 내며 버둥거렸지만, 아무리 덩치가 큰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어른의 힘을 이겨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그들은 우리 앞에 위치했다.
“뭐하는 짓인데!”
“뒷감당할 수 있겠어? 우리 아빠가, 할머니가 가만히 있을 거 같아?!”
“맞아! 지금 이거 놓게 만들면 우리가 특별히 용서해줄게.”
뻔뻔하게 구는 두 사람을 보며 자동으로 혀를 끌끌 찼다. 그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듯 아빠가 허탈하게 웃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용서를 빌어야할 건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겠지. 너희들이 방금 무슨 짓을 한지 아나.”
“몰라.”
“개만도 못한 걸 조금 혼내줬을 뿐인데! 그게 그리도 잘못한 거야? 우리 아빠가 알면 잘했다고 했을걸.”
허허 웃음 말고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아빠도 나와 같은 생각인 듯 코웃음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과거였다면 그럴 수 있겠지. 하다못해 아마네트랑 관련된 일만 아니면 그냥 넘어가겠지만, 이건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가 없다.”
“웃기네! 그래서 어쩌려고 우리 혼내기라도 하려고?”
“막무가내로 혼내지 않는다. 이야기를 먼저 들어야겠지. 이야기를 먼저 듣고서도 지금 가진 생각과 같은 생각이라면, 너희를 혼내야겠지.”
그 말에 레트와 칼은 황당하단 듯 고개를 저었다.
“네가 뭔데!”
“우리를 혼내. 우릴 혼낼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어! 우리 아빠도 못 혼내.”
그때였다.
아빠가 살짝 몸을 숙여 두 사람을 향해 피식 웃었다.
“그동안 내가 너무 조용하게만 지내서 아무래도 오해가 큰 모양이구나.”
“뭐라고?”
“이가문의 주인은 나다. 너희들의 부친이 아니라. 내 어머니도 아니라. 바로 나야.”
“…….”
“그에 반해 너희들은 뭐지?”
정곡을 쿡 찌르는 말에 바로 반박하려던 레트와 칼은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면서 서로에게 대답을 미루며 서로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물론 그런다한들 서로 대답할 리가 만무했다.
“우리는……. 우, 우리는…….”
“그래 너희는.”
“우리는……. 그러니까…….”
“후작가의 도련님들? 그 도련님이라는 말에 심취해서는 본인들이 뭐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구나. 만에 하나 내가 너희들을 이 가문에 둘 수 없다 하면, 분가해야 한단 사실을 모르진 않겠지?”
레트와 칼은 뭐라고 반박하려고 노력하는 듯 했지만, 그들의 입술은 누군가 마취라도 시켜놓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반대하신다 해도 결국 가문의 모든 결정권은 후작인 내게 있다. 너희들은 내 아래, 아니 내 후계자인 아마네트보다 더 못한 존재들이야. 그걸 아나?”
“하지만 걔는……. 걔는 잡종이야! 우리 가문의 애가 아닐지 모른다고!”
“맞아!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왜. 후계자가 다른 이라고 생각하나. 혹시 내가 잘못되면 너희들 중이 한명이 될 거라는 그런 말을 했나. 아쉽게도 그럴 일은 없다.”
“왜!”
아마도 두 아이들의 부친이거나 할머니가 범인인 게 분명했다.
후계자는 바로 너희들이라고.
‘그러니까 후계자 라는 말에 저리도 발작하는 거겠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지만, 난 아픈 척 아빠의 품에 고개를 파묻었다.
“하지만 걔는……. 걔는!”
“설사 아마네트가 우리 가문의 아이가 아닐지라도, 내 후계자는 아마네트 하나뿐이다.”
“말도 안 돼!”
“그러니 말해보도록. 아무것도 아닌 너희들이 내 딸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그 말에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봤다.
“왜 말하기 힘든 건가?”
“그게…….”
“그럼 다른 이에게 물어 보면 되겠지. 하지만 다른 이에게 물어봐서 들은 답이 온전히 너희들 편이 되어줄지는 모르겠구나.”
아빠는 정말 다른 사람이라도 된 거 같다. 적절한 협박과 적절한 포기. 그리고 아빠는 더 이상 두 놈들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도리어 나와 함께 있던 멜린지, 그리고 망아지들의 유모를 바라봤다.
“이리 오도록.”
아빠가 부르니 어쩔 수 없다 생각한 두 사람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너희들이 말하도록.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 말에 두 놈의 유모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절대 말할 수 없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처럼.
하지만 멜린지는 달랐다. 마치 자신에게 물어봐주길 기다렸던 것처럼 멜린지는 아까 있었던 일을 차분히 말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내 입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