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물론 객관적으로 봐도 내가 잘못한 건 없었고, 두 사람이 잘못했다. 굳이 멜린지가 내 편을 들며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해도, 결국 내 편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
“아, 아니 그건……. 저 사람은 잡종의 시녀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그쪽에서 유리하게 말할 거 아냐!”
레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아마네트에게 유리하게 말했다?”
“당연하지!”
“그럼 그 당연한 걸 한번 말해보도록. 아마네트의 입장에서 유리하게 말한 거 말고, 본인들의 입장에서 말이야.”
“말하면 되잖아.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하지만 입을 열던 레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있었던 일들은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유리할 수 없던 탓이다.
“왜 말을 하지 못하지? 본인들이 생각해도 좀 아니다 싶은 건가?”
“그게 아니라……. 쟤가 우리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한참동안 어물거리던 레트는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아마네트가 너희에게 무슨 짓을 했단 거지?”
“저주가 진짜 맞는지 확인해보겠다며 친하게 지내자고 하잖아!”
“응?”
도리어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아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그래서 그런 거야!”
“그 이야기하시기 전에 이미 도련님들이 아가씨를 밀치셨어요. 두 번이나. 그 탓에 바닥에 넘어지셨다구요!”
본인들이 생각해도 그것에 대한 핑계는 생각나지 않는 듯 레트와 칼은 서로를 바라만 봤다.
참 멍청하게 생겨서 참 멍청한 짓만 한다.
“핑계댈 것조차 없다는 건가.”
“아니……. 그러니까…….”
“설사 핑계 댈 게 있다 해도 내 딸을 밀친 것과 팔을 꺾고 괴롭힌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핑계도 정당화될 거 같지 않은데?”
“그건 우리 잘못이 아냐! 쟤가 우리랑 친해지고 싶어 하니까 그런 거라고!”
열 살도 안 된 아이들이다.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똑똑하다 생각하고, 자신들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그런 나이.
두 사람은 아빠를 이겨보려는 듯 몇 번이나 말을 덧붙이려 했지만, 그게 통할 리 없었다.
아빠는 더 이상 아무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친해지고 싶은 게 왜 문제지.”
“그건 문제가 아냐! 오빠들이 나랑 친해지고 싶어서 계속 날 건드린 거잖아. 그래서 친해지자고 한 건데 그게 왜 문제야!”
“저주가 맞는지 확인해보고 싶다며! 그게 문제인 거지!”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빠 친해지고 싶은 게 문제야?”
“아니. 전혀 문제가 아니다. 도리어 친하게 지내자는 사람의 팔을 꺾고 나쁘게 대한 사람이 잘못한 거지.”
레트와 칼이 더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도리도리 돌렸다.
“그건 다 쟤 잘못이야. 쟤가 저렇게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모든 게 다 아마네트의 탓이라고 하더니. 볼품이 없구나.”
“우리한테 그런 이야기 했다가 무서운 일이 생길 거야!”
“본인들이 잘못 했다고 생각하긴 하는 모양이구나.”
“아니거든! 그럴 리 없잖아. 모든 잘못은 다 쟤 때문에 벌어지는 거야. 쟤가 없었더라면 이런 일 따위도 없었을 거 아냐.”
하지만 아빠는 더 이상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는 듯 아주 무겁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알았다.”
“뭐, 뭘 안 건데!”
“이후에 어떻게 할지를.”
“흥. 누가 그런 말 하면 무서워할 줄 알고!”
아빠의 말에 반박하고 있지만 두 사람은 이미 충분히 겁을 먹은 상태였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차라리 아무 생각 없이 있으면 좋겠구나. 자신들이 벌인 일이 어떻게 본인들에게 돌아가는지, 아무 생각 없이 있다 맞이하면 좋겠어. 오늘 혼날지 내일 혼날지 걱정하면서.”
“하. 원래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이 저렇게 말만 많더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레트와 칼은 아빠의 눈치를 보기 급급했다. 언제나 잘나척하고 날 괴롭히 바빴던 두 사람이 주눅 든 모습을 보니 가슴 한 켠이 매우 편안해졌다.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일은 없을 거란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우리 아마네트가 평생을 이렇게 당할 테니까. 그전과는 다를 것이야.”
그 말을 끝으로 아빠는 몸을 돌렸다.
“무, 무슨 짓을 하려고!”
“글쎄. 그저 너희들이 내 딸에게 사과한다고 울부짖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마.”
레트와 칼은 눈만 껌뻑였지만, 아빠는 더 이상의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마치 행동으로 보여주려는 것처럼.
결국 아빠와 나는 그 곳을 천천히 벗어났다. 아빠의 품에 안겨있던 나는 조금씩 작아지고 있는 레트와 칼을 바라봤다.
물론 혀를 낼름거리며 약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메롱.’
물론 두 사람이 그 모습을 봤는지 알 수 없으나, 그래도 세상 뿌듯한 일이었다.
그 사이 아빠는 급한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어느 정도 그곳에서 멀어지자마자 아빠는 나를 의자에 앉혀두고선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마네트. 미안하구나.”
“응? 왜 미안해?”
“아빠가 너무 나약해서……. 너 또한 이런 취급을 받는 거 같아서.”
“아빠.”
“내가 강했더라면……. 아니 진작에 이런 상황들을 눈치 챘지만, 네게 직접적으로 이런 짓을 할줄은 몰랐어. 내가 너무 안일했어.”
아빠는 조용히 고개를 바닥으로 떨궜다. 아빠가 미안함을 가지라고, 아빠가 이러라고 벌인 일은 절대 아니다
그래서 가슴 한 켠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이러고 싶지 않아.’
그냥 아빠랑 잘 지내고 싶은데. 그냥 아빠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바뀔 건 없다.
그래서 고개를 들어 아빠와 눈을 맞췄다.
“아빠 나는 세상에 믿을 사람이 아빠밖에 없어.”
“아…….”
“그러니까 아빠가 날 지켜줘. 강해져서 아무도 우리 무시하지 못하게.”
내 말에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아빠가 찬찬히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고 여기며 살아왔단다. 그렇게 사는 게 맞다고. 그렇게 살아야만 된다 생각했어. 후작이 된 그날부터, 형들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빠…….”
“그런 나의 행동이 내 딸에게조차 희생을 강요하게 될 줄은 몰랐어. 그 동안 형님의 아이들이 너를 괴롭히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한 건 모두 그 때문이란다.”
아까 목소리와는 확연히 달랐다. 당장이라도 울 듯,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것처럼 아빠의 목소리는 촉촉해졌다.
“내가 생각하는 게 아니길 바라는 마음, 그 마음만 가지고 너무 안일하게 굴었어. 이제는 그러지 않으마.”
“응!”
더 이상 갔다가는 내가 무너질 것만 같다. 우선은 이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아빠 스스로 변하겠노라 마음먹은 것만 해도 큰 발전이다.
“이제부터 아빠는 못된 사람이 되어야 해.”
“그래. 그렇게 해서라도 널 지키마. 더 이상은 널 힘들게 하는 일 따윈, 그런 사람들이 네 곁에 있는 일 따윈 없게 만드마.”
“응!”
이래놓고 내일 또 바뀔지도 모르는 아빠다.
이래놓고 막상 못된 사람이 되는 건 힘들다며, 원래대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마음먹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다. 아빤 그걸 해냈고, 나를 괴롭히는 이들에게 응징을 다짐했다.
“아빠 좋아. 나 지켜줘.”
“꼭 그럴게. 그러니 그런 놈들하고는 친하게 지내지 말거라. 이유없이 괴롭히는 놈들은…….”
“우웅. 오빠들은 나쁜 사람들이야?”
일부러 순진한 어린 아이인 것처럼 손가락을 입에 가져대 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나쁜 사람들이야. 친하게 지낼 필요도 곁에 둘 필요도. 괴롭히는 사람은, 아무 이유 없이 괴롭히는 사람들은 멀리해도 된단다.”
“우웅.”
자신의 턱을 내 머리에 부비적거리던 아빠는 피식 웃었다. 이제야 긴장이 풀린 모양이다.
나도 그런 아빠의 품에 안겨 살짝 웃고선 아빠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아빠. 꼭 지켜줘요.’
아빠가 마음을 단단하게 먹을 수 있게, 속으로 온갖 신을 불러가며 아빠의 다짐이 계속될 수 있게 기도했다.
* * *
만족스러운 싸움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아빠의 품에 안겨 표정을 애써 감춰가며 돌아오는 길에 서쪽 저택 2층 구석에 빼곰 내밀고 있는 고개가 나와 눈을 맞췄다.
‘베른 하르트다.’
쌍둥이 중 동생. 처음에는 가까이서 봐야 아주 조금 구분이 갔는데, 이제는 쌍둥이들을 구분하는게 어렵지 않았다.
‘천사 같은 건 형, 악마 같은 건 동생.’
그것 외에도 두 사람의 눈매가 달랐다. 또 머리색도, 피부색도 미묘하게 달랐다.
형은 축 쳐진 눈매를 지니고 있었고, 동생은 족제비처럼 쭉 째진 눈매를 가지고 있다. 계속 본 사람만이, 계속해서 관심을 구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 미묘한 차이였다.
‘아마도 그걸 알아보는 건 나 혼자일 듯하지만.’
우리가 저택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난 한참이나 베른을 바라봤다.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베른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