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가서 의원을 불러오도록.”
그 사이 아빠는 저택 안으로 들어섰고, 옆으로 바짝 붙은 시종에게 의원을 불러달라 요청했다.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긴말 하지 말고 가서 의원이나 불러와.”
레트와 칼의 행동 때문인지, 아니면 그 상황에서도 아빠가 아닌 레트와 칼의 눈치를 보던 시종의 행동 때문인지 아빠는 약간 성이 난 듯 보였다.
“네?”
“이제 보니 참으로 버릇이 없군. 남들이 보면 내가 후작인지 아니면 내 옆에 따라오는 그대들이 후작인지 구분이 안가겠어?”
흑화의 꽃이 피어 버린 것처럼, 아빠의 목소리는 전과 확연히 달랐다.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
“아, 아닙니다. 송구합니다. 의원을 불러오더라도 상황을 여쭈고 불러와야겠단 생각에 물은 말이 심기를 거스른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긴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핑계만 계속 대는군. 그 사이 의원을 부르러 가면 될 일인데.”
“송구합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시종은 아까보다 더 빨리 걸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송구할 필요 없다.”
“아, 이해해주셔서-”
“주의할 필요도 없다. 이제부터 이곳에서는 그대의 자리가 없을 테니까.”
“네?”
시종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이해하기 힘든 듯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입술만 잘근 잘근 깨물었다.
“후작 각하?”
“끝까지 내말이 우습나. 꽤 다정하게 설명해준 거 같은데. 내말에 토를 달고 사담을 붙이는 시종 따윈 필요 없다고 말이야.”
“아. 저, 저를 정말 내쫓으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도리어 그 질문에 아빠가 한쪽 입술만 비죽 틀어 올렸다.
“참 여러 번 묻게 하는군. 입이 아플 정도야.”
싸늘한 목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다른 시종이 아빠 옆으로 달라붙었다.
“이 자를 바로 내쫓고, 의원을 불러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멍청이만 있는 게 아닌 모양이야.”
책임자 급으로 보이는 시종의 말에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고, 뒤늦게 앞으로 튀어나온 시종은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몇몇 시종이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서는, 오늘 내내 아빠 옆에 있던 시종의 팔을 급히 부여잡았다.
“자, 잠시만요. 저를 이렇게 내쫓으시는 겁니까. 후작 각하. 제가 후작 각하의 시종이 된 것도 벌써 10년이나 되었는데, 고작 이런 일에 저를 자르시다니요.”
“고작 이런 것이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지. 나와 아마네트를 주인이라 생각하지 않는 자들은 이제부터 모두 내칠 것이다. 이곳에서 얼마를 일했던 상관없이.”
아빠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우리가 저택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하나 둘 몰려있던 이들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철저하게 다 뿌리 뽑아주지.”
순간 가슴이 벅차 올랐다. 단 한 번도 아빠는 이런 모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누군가를 자르는 일도 힘들어 했고,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자라고 할지라도 이해해주고 넘어갔는데.
‘역시 아빠를 바뀌게 하는 원인이 나구나.’
단 한 번, 오늘일이 조금 심하긴 했지만 오늘일로 인해 아빠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아빠에겐 충격적인 일이었겠지.’
그동안 망아지놈들은 아빠 앞에서 내게 위해를 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
눈치가 좋았던 건지, 아니면 운이 좋았던 건지 모르겠지만 과거에는 그랬다.
‘하긴 과거에는 내가 저놈들을 슬슬 피해 다녔지.’
좋은 말도 계속 들으면 듣기 싫어지는데, 만날 때마다 내게 나쁜 말을 하는 저놈들을 멀리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더욱 더 아빠가 변할 일 따위 없었는데.
“부디 이제 와서 바뀌는 자들이 없기를. 색출하기 편하게. 이제부터 따라올 필요 없다. 아마네트와 둘이 돌아갈 테니.”
그제야 줄줄이 사탕처럼 달라붙던 이들이 하나둘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렇게 복도에는 적막이 흘렀고, 아빠의 구두소리만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
“마음에 들지 않아.”
“아빠. 그런데 여기 사람들 나쁜 사람이야?”
어린 아이 같은 물음을 해가며 아빠와 눈을 맞췄다.
“응?”
“그래서 다 내쫓으려는 거야?”
“아냐. 그냥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을 더 좋은 곳으로 근무처를 바꿔주려는 것뿐이야.”
한참 고민하던 아빠는 내 시선을 피해가며 대답을 해보였다. 누가 봐도 수상쩍은 얼굴과 수상쩍은 행동을 했지만 모른 척 했다.
“그렇구나.”
“아마네트는 이곳사람들이 좋아?”
“응! 아니!”
“아니라고?”
“좋은 사람들도 있는데 안 좋은사 람들도 있는 거 같아!”
해맑게 웃으며 아빠와 눈을 맞췄다. 그러니 아빠. 이상한 놈들 다 내쫓아야 해.
“안 좋은 사람들은 누구야?”
“아잇참. 여기서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 나중에 찬찬히 말해줄게. 아빠에게만 조용하고 은밀하게.”
그제야 아빠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꼭 안았다.
“내가 변하면 다 괜찮아질 거야. 아마네트. 네가 힘들 일도, 우리가 힘들 일도 더 이상 없겠지.”
“나는 아빠만 있으면 안 힘들어.”
“그래.”
내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한 듯 아빠가 고개를 끄덕이 는걸로 내 말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방에 도착했다.
우리가 방에 도착한 타이밍에 맞춰 의원도 안으로 들어섰다.
“찾으셨다들었습니다. 후작 각하.”
“아마네트를 살피도록.”
“어느 부분을 살피면 될까요.”
“전부 다. 조금이라도 상처 난 곳은 없는지, 조금이라도 불편한 곳은 없는지. 세세하게.”
하지만 아빠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의원은 나를 빤히 바라봤다.
“불편한 곳을 말씀주시면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보겠습니다.”
말이 좋아 집중적이지, 대충 살펴보고 싶어 하는 의원의 마음이 투명한 유리컵속의 물처럼 빤히 보였다.
‘하지만 지금 의원이 미움을 당해서 쫓겨나면 안 돼. 그 사람을 의원으로 만들어야하니까. 그러려면 아빠가 더 힘이 있어야 해.’
마음 같아선 의원이 당장이라도 잘렸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난 최대한 그 마음을 숨기고 꺾인 팔을 내밀었다.
“아까 여기 아야 했어!”
“다치신 겁니까?”
“아니. 레트 오빠가 내 팔을 꺾어 버렸어.”
“아……. 알겠습니다.”
레트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조금 난감한 표정을 하던 그는 내 팔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 외에 다른 곳이 없냐고 물어보던 의원은 몇 분 지나지 않아 날 살피기 위해 숙였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크게 다치신 곳은 없으신 것 같습니다.”
“벌써 다 살핀 건가.”
“네. 어린 아이들의 몸은 유연하기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빠의 얼굴에 순간 짜증이 몰려왔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정신 차리고 보니 다 이꼴이구나.”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트집 잡을 건 없었기에 아빠는 의원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알았다. 그런데 혹여 나중에 아마네트의 몸에 이상이 생긴다면?”
“괜찮을 겁니다.”
“그래. 괜찮아야지. 하지만 괜찮지 않으면 그대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네네. 그러세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저는 선대 후작부인의 보호를 받고 있는 자니까요.
말하지 않아도 의원의 눈에서 그런 말들이 나오는 게 보였다. 할머니를 제대로 등에 업은 그는 조금도 겁날 게 없었다.
“네.”
“뭔가 처치해줄 건 아무것도 없나.”
“네. 그렇게 심하게 다치신 건 아니니까요.”
“알았다. 나가보도록.”
“네.”
강한 자 앞에선 약하고, 약한 자 앞에선 강한. 그런 성격의 소유자임을 대놓고 밝힌 그는 결국 내게 어떠한 처치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결국 방 안에는 아빠와 나만 다시 남게 되었다.
“미안하다, 아마네트. 어찌할 수가 없구나.”
“응? 아빠 나는 괜찮아!”
“명색이 후작의 딸인데. 내 후계자인데……. 이런취급을 받아왔다니. 왜 난 그런 것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걸까. 아마네트.”
“헤헤. 정말 괜찮아.”
그러니까 아빠 더 충격 받아도 돼. 아빠가 정신 차릴 수만 있다면.
“넌 언제나 날 보며 웃어주는구나. 나 때문에 어떤 일을 겪는지도 모르고.”
“아빠. 나는 아빠 많이 좋아해!”
그런 아빠에게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으며 팔을 벌렸다.
그제야 아빠는 몸을 숙여 나를 꼭 끌어안았다.
“아빠도 세상 그 무엇보다 아마네트를 좋아해. 사랑해. 내 목숨보다 소중한 우리 딸.”
“응! 아빠 있잖아.”
“응?”
“아빠 오늘 엄청 멋졌다? 막 카리스마가 넘쳤어. 물론 아직 말라서 카리스마가 조금 부족하긴 했지만, 되게 멋졌다?”
그 말에 내내 굳은 표정이던 아빠의 얼굴이 풀어졌다.
“그랬어?”
“응! 그래서 너무너무 좋아. 앞으로도 그렇게 멋있게 해줘.”
“그래. 그럴게. 우리 아마네트가 아빠를 더 좋아할 수 있게.”
“응! 그럼 나 이제 옷 갈아입고 오빠들한테 가야지.”
‘오빠’라는 얘기에 방금 전까지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진지했던 아빠의 얼굴이 풀어진 건 순식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