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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34/53)

34화

“아, 아가씨. 그래도 그렇게 사람을 쉽게 죽이시면 안 돼요. 그러니까 그런 일들은 아랫것들 시키시고……. 아니 시키시지도 마세요!”

“응?”

“사람 죽이는 건 절대 안 돼요! 물론 저도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었지만 그래도 아가씨는…….”

입술을 바르르 떠는 그녀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나 사람 안 죽여.”

“네?”

“나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 아니거든!”

하지만 내 변명에도 그녀는 쉬이 날 믿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그, 그렇죠. 나쁜 분은 아니시죠.”

“아니. 진짜로!”

내가 아니라고 우겨봤지만, 이미 멜린지는 나에 대해 단단히 오해한 듯했다.

물론 그동안 내가 해왔던 일들을 생각하면 내 탓도 있지만…….

“그럼요. 하지만 만에 하나 정말 그런 마음이 생기시거든 꼭 저에게라도 말씀해주세요.”

“우웅…….”

“역시…… 정말 그러실 생각이셨군요. 제가 최대한 막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알 수 없는 정의감에 사로잡힌 그녀를 보며 허탈한 웃음을 뱉어냈다.

과거의 멜린지는 나를 안타깝게 여겼지만 지금의 멜린지는 나와 꽤 친해진 상태였다.

날 위해 목숨을 바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정의감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내 편 하나는 생긴듯한 기분에 든든했다.

그 사이 간단하게 물로 무릎을 씻겨준 멜린지는 옷을 갈아입는 걸 도와주었고, 덕분에 준비도 금방 마쳤다.

아까 전, 예쁘게 꺾어둔 꽃을 들고 바로 목적지로 걸음을 옮겼다.

* * *

“나 왔다!”

비장하게 방문을 열며 평소보다 더 당당하게 내가 온 티를 냈다.

“오늘도 또 왔네. 지겹지도 않나봐.”

“응. 기다렸어?”

“미쳤어? 기다렸을 리가 없잖아.”

“그거 치곤 계속 밖을 내다보고 있던데.”

순간 베른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아, 아니거든!”

“그래서 오늘은 왜 늦은 거야?”

나와 베른이 하는 이야기를 듣다 피식 웃은 칼리스토가 그 사이를 껴들었다.

“아아. 어디 좀 다녀오느라고.”

일부러 나한테 다정한 모습을 보이려는 건지, 아니면 원래도 다정한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칼리스토는 꽤 부드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어디 다녀왔어?”

“그냥……. 정원?”

“정원 가서 뭐했는데.”

차마 할머니의 망아지 같은 손주놈들과 싸우고 왔어, 라고 할 순 없었기에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그냥……. 정원 구경?”

“구경?”

그때, 칼리스토가 냄새를 맡는 것처럼 코를 찡긋거렸다. 그러다 무언가에 이끌린 듯 그의 시선은 내 무릎 쪽으로 향했다.

마치 보지 말아야할 것을 본 것처럼 칼리스토는 눈썹을 찡그렸다.

“다치고 오라고 허락한 적 없는데.”

“어?”

“무릎.”

분명 아까 물로 씻어내서 피가 안 나는 것 같았는데, 그 사이 피가 난 모양이다.

하필 드레스 길이가 무릎보다 아주 살짝 길어서 바로 티가 났나 보다.

“아하하……. 어 그러니까 이건, 나름 처치한다고 했는데 이러네.”

“다쳤구나.”

“뭐하고 온거야 거기에서.”

옆에 있던 깨끗한 생수를 내 무릎에 부은 칼리스토는 평소와 다른 목소리를 냈다.

“아니 그냥…….”

“그냥 구경만 하고 왔다면 다칠 리가 없잖아. 네가 다친 것도 몰라?”

“아, 아파! 그리고 알고는 있었는데……!”

상처에 물을 부으니 시원하면서도 따끔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칼리스토는 그런 내 말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무릎을 보기에 급급했다.

“하.”

“누가 널 다치게 했어?”

방금 전까지 나와 티격태격하던 베른도 한마디 덧붙였다.

“아니야. 그냥 우연히 그렇게 된 거야…….”

“말해.”

“아니 별거 아니라니까. 맞다, 그보다 이거!”

난 뒷짐을 진 채 들고 있던 꽃들을 쌍둥이에게 얼른 내밀었다.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한 일이었지만, 이런 일로 분위기가 바뀔 리가 없었다.

“안 받을 거야?”

“이걸로 넘어가려는 거야? 대체 누구 짓이야.”

내가 다친 것에 왜 저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도통 이해가 가질 않는다.

“아니 그냥 진짜 내가 넘어져서 다친 거라니까. 그리고 이건 금방 나아.”

하지만 칼리스토는 여전히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 우리한테 말할 필요는 없지.”

“지금……, 섭섭한 거야?”

아니 니들이 왜 섭섭해. 내가 다치든 말든 상관 없잖아. 우리 되게 비즈니스적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그래, 우리는 그저 이곳에 기생해서 사는 존재들인걸.”

“아니 그게…….”

“하지만 네가 다치는 건 용서 못해. 어느 놈이 그런 거야.”

점점 험악해지는 분위기 탓에 어쩐지 진짜로 말 안하면 안 될 분위기다.

“내가 말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뭐?”

“이곳에 기생해서 사는 거, 나도 마찬가지야.”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베른과 칼리스토를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 됐고. 자 꽃 받아. 내가 오빠들을 위해 일부러 꺾어온 거야. 예쁘지!”

하지만 날 가만히 바라보던 칼리스토는 꽃을 빤히 바라보다가 창가로 향했다.

“칼리스토?”

그러더니 갑자기 창틀로 올라섰다.

“뭐, 뭐하는 거야!”

“…….”

“서, 설마 뛰어내리려고?”

“말하지 않는다면 직접 알아오면 되겠지.”

“뭐?!”

놀라서 내가 입만 어물거리고 있자, 칼리스토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어디서 왜 다쳐온 건지.”

“그게 왜 그렇게까지 궁금한 거야.”

예상치 못한 일은 항상 베른이 한다고 생각했는데, 칼리스토가 저러니 정말 할 말을 잃었다.

“역시 말해주지 않을 생각이네.”

“갑자기 왜 그렇게 변한 거야. 내가 어떻든 상관하지 않았잖아.”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생각했다. 이곳에 갇혀 지내는 쌍둥이에게, 밖의 이야기를 전하는 건 독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게다가 좋은 일도 아니고. 내가 이곳에서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치이고 욕먹어도 참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자존심이 있다고! 그래서 꾹꾹 참은 건데.

칼리스토는 피식 웃다가 몸을 돌렸다.그 러더니 다른 말은 더 붙이지도 않고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카, 칼리스토!”

아름드리나무가 있긴 하지만 조금 높이가 있는데…….

놀란 마음에 후다닥 창가로 다가가자, 정말 놀라울 정도로 몸을 가볍게 움직이는 칼리스토가 보였다.

2층에서 뛰어내렸음에도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은 칼리스토는 이런 일이 익숙하듯 나무 사이로 빠르게 움직이며 우리와 멀어졌다. 시선조차 주지 않고 말이다.

“와, 놀랬잖아…….”

거기서 뛰어내릴 거였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냐…….

내가 황당함에 허탈하게 웃고만 있자, 베른이 슬쩍 내 옆으로 다가왔다.

“형이 어지간히 짜증났나 보네.”

“뭐?”

“그러니까 뭐하러 숨기냐.”

역시나 베른도 내가 대답하지 않은 것에 대해 다시금 말을 꺼냈다.

“…….”

“하긴. 정말 우리를 가족이라 생각했으면 말했겠지. 너도 거리 두는 거잖아. 우리랑.”

오늘따라 이 쌍둥이놈들이 왜 이러는 걸까.

“됐어. 그런 거 이제 기대 안 해.”

“남이면 더 말하기 쉽겠지.”

“뭐?”

자꾸만 내 속도 모르고 날 탓하는 저들을 보며 순간 참았던 울분이 튀어나왔다.

“정말 남이라면 말하는 게 이렇게 힘들지도 않다고.”

“뭐?”

“정말 남이라면…….”

베른의 얼굴이 하얗게 변한 건 그때였다.

“너…… 울어?”

“우, 울긴 뭘 울어! 안 울거든!”

순간 울컥해서 눈물이 찔끔 나긴 했지만, 울진 않았다.

아마도. 아마도 나는 안 울었는데, 몸의 주인이 나보다 조금 더 울컥했나보다.

“눈가가 촉촉한데.”

“아니라고. 진짜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냐.”

그러더니 제 품에서 꼬질꼬질한 손수건을 꺼내더니 내 눈을 박박 닦았다.

“뭐 이런 걸로 울어. 설마 무릎아파서 그래? 그래서 우는 거야?”

“눈 아파!”

“그러니까 울지 마. 그만 울어!”

“아, 안 울어! 그리고 그 꼬질꼬질한 손수건은 어디서 난거야.”

“그 시종이 떨어트린 거 그냥 하나 주워놨어. 어쨌든 그만 울어.”

“안 운다고.”

“그래, 예쁘다.”

내가 눈을 크게 뜨고선 쳐다보자 베른이 내 머리를 어색하게 쓰다듬었다.

“예쁘다고……?”

“응. 예뻐. 내 말 듣고 안 울잖아.”

“치이.”

“그래서 말해 봐. 가족 아니었으면 말했을 그게 뭔데.”

때마침 창 밖에서 찬바람이 불어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눈가에 바람이 스쳐지나가자 조금 정신이 들었다.

“내가 밖에서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무슨 일을 당하는지 말하고 싶지 않아. 가족이면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한 거잖아.”

“…….”

그 말에 베른의 얼굴은 더더욱 굳어졌다.

“가족이면……. 그런 거야? 서로 어 떤일을 당하는지, 다쳐도 말 안 하는 거야?”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가만히 베른을 바라봤다.

“그래도……. 오빠들을 걱정 시키고 싶지 않아. 그냥 그렇게 생각해줘.”

“설마 맞고 다녀?”

베른은 조금의 주저 없이 물었다. 순간 너무 당황해서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맞네. 맞고 다니네.”

“그게 아니라! 그냥 아 몰라. 자꾸 묻지 마. 그냥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어.”

내가 여기서 잘 지낸다고, 다른 아이들처럼 사랑만 받고 자란다고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베른은 모두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네가 이야기 하기 싫으면 하지 마.”

“…….”

“대신에 어디서 맞고 오지 마. 다쳐오지도 말고. 나나 형이나 그런 건 보고 싶지 않아.”

차분하게 말하는 베른을 보자 다른 사람이 된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갑자기 왜 그래.”

“왜 그러긴.”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아. 원래 이런 성격 아니잖아.”

“그랬나. 몰라. 하여튼 네가 우는 꼴 보니까 화 나. 날 화나게 하지 마.”

어쩐지 가슴이 이상해졌다. 고작 몇 번 잘해줬다고, 몇 번 찾아왔다고 이렇게나 달라지는 건가.

“왜 그렇게 쳐다 봐?”

“아니 그냥 신기해서…….”

난 언제나 앉아있던 의자로 다가가서 창밖을 내다봤다. 오늘따라 참 날씨가 좋았다. 하늘은 높았고, 기분 좋은 바람이 살랑 살랑 불어왔다.

그렇게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이곳에 왔을 때는 분명 한낮이었는데, 어느새 하늘은 점차 어두워졌다.

결국 참지 못하고 옆을 바라봤다.

“그래서 칼리스토는 언제와?”

“모르지. 언젠가 오겠지.”

“걱정 안 돼?”

“응. 오히려 오래오래 있다 오면 좋겠는데. 확실히 알아 왔으면 해.”

설마 진심인가 싶었는데, 정말 진심인 듯 베른은 먼 산만 바라볼 뿐이었다.

“걱정 안 돼? 여기서 나간 거잖아.”

“걱정 안 되는데?”

“그렇지만 이곳 지리도 잘 모를 텐데.”

“왜 우리가 모를 거라 생각해?”

“어? 당연히 방안에 언제나…….”

갇혀 지냈잖아. 라고 말하려 했지만 베른의 입가에 비춰진 은은한 미소가 어쩐지 날 불안하게 만들었다.

“설마……. 계속 이곳에서 나갔던 거야?”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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