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웃음이 나오려는걸 애써 참아가며 그들을 바라봤다.
‘네가 못한 걸 우리는 해냈다’라는 표정을 짓는 놈들. 차마 대놓고 비웃을 수는 없기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꾹 참았다.
“할머니를 위해서 선물을 준비하느라 늦었어요!”
“우리가 할머니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세요?”
친정에 가야한단 사실만으로 기분이 좋지 않았던 할머니의 얼굴이 일순간 밝아졌다.
“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한 거냐.”
“얼른 오세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열려있던 문을 통해 시녀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과거의 나도 할머니 준다고 어설프게 음식을 만들어 갔었다. 물론 무시란 무시는 다 당했고, 할머니는 내가 만든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다음번에 할머니를 만났을 때까지도 내가 만든 음식을 먹지 않은 덕분에 상해버린 음식을 눈 앞에서 봐야만 했다.
조물조물 작은 손으로 만든 어설픈 팥빵. 팥을 좋아하는 할머니가 생각나 나름 노력한 거였는데, 내 정성은 늘 무시를 당했었다.
그때 펑펑 울었던 내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짠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할머니의 손주놈들은 보란 듯이 할머니의 예쁨을 받기 위해 할머니의 몸에 좋은 음식들을 마련해온다.
역시 예상대로 과거와 똑같은 상황이 펼쳐진다.
시녀가 은색 뚜껑으로 닫힌 접시를 건넸다. 난 말없이 아빠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할머니. 이거 우리가 할머니를 위해 만든 거야.”
“맞아! 누구처럼 말만 하지 않고 직접 행동으로 옮겼다고!”
레트와 칼이 자랑스럽다는 듯 차례로 이야기했다.
“이게 뭐지.”
“할머니가 좋아하는 셔벗! 그런데 저번에 레몬은 못 먹는다고 해서 우리가 레몬이랑 전혀 관계없는 걸로 만들라고 했지.”
할머니는 감동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크게 놀랐다.
그 놈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은색 뚜껑은 찬찬히 열렸다.
“세상에…….”
잘 익은 귤색이 도는 셔벗. 멍청하게 할머니가 왜 셔벗을 좋아하게 됐는지는 생각을 안 했나 보다. 최근 소화가 잘 안되니까 자꾸만 상큼한 걸 먹으려는 건데.
아빠 품에 안긴 채 아무 표정 없이 그들을 바라봤다. 난 정말 신경이 안 쓰이는데, 저쪽에서는 내가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듯 열심히 나를 노려보았다.
“너희 셋이 날 위해 준비한 것이냐.”
“당연하죠. 뭐 물론 내가 제일 많이 노력했지만.”
“아냐. 내가 더 많이 노력했지.”
“됐어. 둘 다 그만해. 그냥 저희 모두 노력했어요. 할머니.”
둘째 큰아빠, 아펠의 두 자식인 레트와 칼이 앞다투어 이야기하자 케일럽이 급히 둘을 막았다.
제일 나이가 많아서인지, 아니면 굳이 여기서 그런 사소한 것 따위 따지고 싶지 않은 건지 케일럽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망아지처럼 굴던 두 놈들도 케일럽의 말은 어찌나 잘 듣는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발 물러섰다.
“고맙구나. 너희밖에 없어.”
그 사이 감동받은 표정을 지은 할머니는, 세 손주의 머리를 번갈아가며 쓰다듬었다. 그리고선 아이들이 가져온 셔벗을 스푼으로 조금 떠먹었다.
“훌륭하구나.”
입에서 셔벗이 녹기도 전에 할머니는 칭찬하기에 급급했다. 그걸 보며 난 피식 웃음이 나오려는걸 참았다.
‘이제 조금 있으면 일이 터지겠네.’
아빠는 내가 신경이 쓰이는 건지 내 머리를 연신 쓰다듬기 바빴다.
괜찮다고 아무리 고개를 끄덕여도, 아빠의 행동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네가 해온 것도 충분했단다. 아마네트”
그때였다. 아빠가 툭 내뱉은 한마디가 내 신경을 확 거슬리게 만들었다.
“어? 내가 해온 거?”
“응?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내 질문에 도리어 아빠는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아빠가 방금 해온 것도 충분하다고 했잖아.”
“그랬어……?”
“난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았는데?”
“기억이…… 나질 않구나.”
방금 전에 분명 한 말이었는데 아빠는 고개만 갸웃거릴 뿐, 정말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거짓말을 하는 건가 싶었지만, 조금의 거짓 없는 아빠의 표정이 내 기분을 더 기묘하게 만들었다.
그 사이 할머니는 셔벗이 꽤 마음에 든 건지 연이어 칭찬하기 바빴다.
“날 위해 너희들이 이런 걸 준비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구나. 너희들을 위해 뭐든 해주마.”
레몬과 비슷한 느낌의 신 맛이 나는 그 재료는, 설익으면 설익을수록 신맛이 강해진다. 어린아이부터 나이든 노인까지 누가 먹어도 아무 이상이 없는 음식 재료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 재료를 빨리 수확했을 때다. 신맛을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 설익은 상태에서 수확하고, 재료랑 맞지 않는 조리법을 썼을 때 문제가 생긴다.
그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만들어 낸 게 바로 저들이 가지고 온 셔벗이다.
물론 레몬과 비슷한 맛을 내니까 맛으로선 휼륭하지.
그런데 할머니가 레몬뿐 아니라 신맛을 내는 재료에 알러지가 있다는 걸 저들이 알 리가 없다.
단순히 레몬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만들어온 음식. 이 세계에 신맛을 내는 음식 재료는 몇 없기에 나름 생각해서 저 재료를 선택한 건 나도 안다.
그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도.
“아마네트. 그만 갈까?”
아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런 아빠를 보며 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그래도 너도 노력했는데……. 항상 칭찬도 받지 못하고. 아빠가 뭐든 다 해줄 수 있는데 그건 해줄 수 없는 일이니까.”
슬픈 표정으로 끝을 흐리는 아빠를 보며 아까보다 더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아빠. 괜찮아 나는 정말로.”
그러니까 여기에 있어. 이제부터 재밌어질 타이밍인데 가긴 어딜 가.
하지만 아빠는 내가 마음을 애써 숨긴다고 생각한 건지 안쓰러운 표정으로 등을 토닥였다.
“너무 참지 않아도 된단다. 아빠는 네 마음 다 알아.”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아빠는 간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할머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어머니, 저희는 이만-”
다시금 아빠를 막으려던 그때였다.
방금 전까지 활짝 웃고 있던 할머니의 얼굴색이 점점 변했다. 그저 할머니가 조금 흥분해서 얼굴이 붉어졌구나 생각하던 이들은 그 변화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그 미세한 변화를 알아챈 나는 급히 버둥거리며 아빠 품에서 내려왔다.
“아마네트?”
“아빠! 얼른 의원, 의원 불러와!”
“뭐? 무슨 일이야?”
과거에는 큰아빠가 제일 먼저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그것도 숨이 거의 깔딱 깔딱 넘어갈 때 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선 할머니가 잘못되든 말든 상관없지만, 이렇게 쉽게 할머니를 죽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과거에 나랑 아빠를 그렇게 괴롭힌 만큼 이번 생엔 그보다 더 괴롭힐 테다. 나는 다시 한번 아빠를 향해 소리쳤다.
“할머니가 이상하다고!”
“까불지 마. 잡종아.”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괜히 질투 나니까 헛소리 하지 마.”
한마디씩 덧붙이는 손주놈들을 노려봤다.
“안 보여? 이 똥멍청이들아?”
그제야 할머니가 숨을 들이마시기만 하고 쉽게 내뱉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알아챘다.
목을 손으로 급히 감싸고 도와달란 표시를 하고 있는 할머니를 본 큰아빠의 얼굴도 굳어졌다.
“당장 의원 불러와!”
하지만 내가 이상한 걸 느낀 아빠가 먼저 나가버린 후였다.
“할머니 눕혀요! 숨 쉴 수 있게!”
알레르기는 괜찮다가도 저렇게 순식간에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만큼 위험했다.
평소라면 내 말을 신경도 쓰지 않았을 이들은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뭐가 문제인 거야!”
두 큰아빠들이 번갈아가며 소리 쳤지만, 소리친다 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할머니는 점점 더 괴로워했다. 난 얼른 할머니의 기도를 확보했다.
‘죽지만 마. 할머니. 이대로 죽으면 안 돼.’
진심으로 할머니가 죽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러는 사이 아빠는 의원과 함께 후다닥 안으로 들어왔다.
“차, 찾으셨다고.”
“어서, 어서 어머니를 보거라. 어머니를 보라고!”
의원은 허겁지겁 할머니에게로 다가왔다. 뭔가 안 좋은 상황을 알아차린 듯 헉 하는 소리를 내던 그는 빠르게 가방에서 이것저것 꺼내서는 할머니에게 먹였다.
지난번 일 때문인지 미리 준비해놓은 건지 할머니에게 약을 먹이는 속도가 빨랐다.
다행히 약을 먹으니 할머니의 상태도 급격히 좋아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붉었던 얼굴색은 본래의 색을 되찾았고, 할머니의 호흡도 돌아왔다.
물론 완벽하진 않았고, 아직 숨쉬기 힘든 듯 할머니의 입에선 쌕쌕거리는 소리가 나오긴 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결국 큰아빠 베헬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그것이…….”
“왜! 무엇이 잘못된 거야.”
“그게…….”
“왜 말을 하지 못하는 거지?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어머니의 건강을 책임지는 네 놈의 탓으로 모두 돌릴 것이다!”
자신의 뒤를 든든히 지켜주는 할머니가 잘못될까 봐 두려운 듯, 큰아빠는 귀가 아플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상황을 파악한 의원은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방금 뭘 드셨는지 말씀주시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음식 알레르기 같은데……. 드신 음식의 문제 같습니다. 게다가 지난번보다 심하셔서…….”
의원의 진단에 방금 전까지 자신만만하던 손주놈들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