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어지간한 일은 다 넘어가던 할머니도 힘든 듯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휙 돌렸다.
평소와 다른 할머니의 모습에 큰아빠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말은 해야겠는데, 자기 자식들이 벌인 일 때문에 할머니가 죽을 뻔했다는 걸 차마 입 밖으로 내고 싶진 않은 듯 서로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
“그러니까 그게…….”
“아니 우리는 그냥, 그냥……. 할머니를 위해서…….”
혹시나 내 꼴 날까 봐, 나처럼 미움 당할까 봐 레트와 칼은 입술만 잘근 잘근 깨물었다.
어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평소라면 괜찮다고 했을 할머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의자에 앉았다. 그 순간에도 너무 힘든 듯 숨을 헐떡였다.
“뭐……. 다 알고 그러셨을 거라 생각지는 않습니다…….”
새하얗게 질린 사람들을 보며 의원 또한 같이 눈치 보기 바빴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뭐, 이유가 그게 아닐 수도 있구요.”
평소라면 나서지 않을 아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어머니가 이렇게 된 이유가 뭐지?”
“그것이…….”
과거에 아빠는 이 상황을 한발 뒤에서 떨어져서 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빠는 달랐다.
“의원이라는 자가 원인도 모르고 진단을 내리고 약을 먹였단 건가? 돌팔이도 아니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아빠는 이전과 확연히 달라보였다. 나 혼자만 느낀 건 아닌 듯, 모두의 시선이 아빠에게로 쏠렸다.
“아니 그것이 아니라…….”
“무엇을 먹었냐고 물었고 알레르기라고 진단을 내려놓고 이제와 말을 바꾼다는 건가? 그럼 어머니에게 먹인 약은 도대체 뭐란 거지? 그냥 아무 약이나 먹인 건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단 걸 알아차린 듯 의원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확실히 드신 음식 때문에 생긴 알레르기였습니다. 이 부분은 확실합니다. 절대 아무 약이나 먹인 게 아닙니다.”
“그렇다는 건 그 음식이 원인인 게 맞는 거지.”
“진짜 우린 아무 잘못 없어. 우린 그냥…….”
“할머니한테 맛있는 걸 드리고 싶었을 뿐이야!”
“맞아 우리가 잘못한 건…….”
“물론 그 마음이 잘못 되었다는 건 아니지만, 결론적으로 너희들 때문에 어머니가 저렇게 되셨다는 거야. 그건 인정하지?”
“네…….”
“네.”
레트와 칼이 동시에 대답을 했다.
하지만 그런 모습에 그들의 부친인 아펠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애들이 잘못한 게 뭐가 있어. 그냥 애들이, 애들이……!”
“형님. 감싸봤자 이 상황을 옆에서 지켜봤다면 알지 않습니까.”
“…….”
“뭘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저 어머니께 사과하라고 하고 싶었을 뿐. 누구나 잘못을 할 수 있지만, 사과하지 않으면 또 똑같은 실수를 벌이겠죠. 이런 일은 아무 일도 아니라면서.”
“네가 뭔데 그렇게 확신을 하느냐!”
여전히 큰아빠들은 아빠를 깔봤다. 아니, 언제나 깔보던 상대가 자신들의 말에 꼬치꼬치 말대답을 하자 못 참겠는지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언제나 그러지 않았습니까. 형님들이 그렇게 아이들을 끼고 돌다보니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된 게 아닙니까.”
“이놈이!”
“그만 하거라. 이 어미는 죽을 고비를 겨우 이겨냈는데, 자식 놈들이 하는 짓이 어미 앞에서 싸우는 것이냐?”
할머니는 다 나가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어머니!”
“네놈들이 정말 나를 걱정했다면 여기서 시끄럽게 굴지도 않았겠지. 다 필요없다. 어차피…….”
아직 간지러운 듯 몸을 긁적이던 할머니는 손주놈들을 바라봤다. 아무리 미워도 사랑했던 아이들이란 사실은 달라질게 없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의는 아니었을 테니 괜찮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으면 되니까……. 그래. 설마 알고 그랬겠느냐. 날 위해서 그런 거지.”
“마, 맞아 우린 몰랐어!”
“맞아 맞아!”
“할머니가 레몬 때문에 힘들어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할머니가 용서해줬다는 사실에 신이 난 듯 레트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케일럽은 어쩐지 찝찝한 게 있는 것처럼 급히 레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제야 레트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러니까 다들 그만하고 넘어가거라.”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물러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물론 여기서 끝낼 내가 아니었다.
“할머니 얼른 나아.”
“아프지 마세요.”
“맞아요. 다 나으면 그때 올게요.”
할머니에게 한 마디씩 건네는 이들을 보며 난 씩 웃었다.
“근데 그거 말이야. 다 알고 있었던 거 아냐?”
“뭐, 뭘 알고 있어!”
찔리는 게 있는 듯 칼이 급히 내 입을 막았다. 얼마나 급하게 고개를 돌리고 말을 했으면 볼살이 떨릴 정도였다.
“레몬이나 그거나 성분이 비슷하잖아. 설마 그걸 정말 몰랐던 거야? 정말로?”
“그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지금 이 세계에서 새콤한 맛을 내는 과일은 몇 없었다.
과연 정말 모르고 저걸 만들어 온 걸까.
“정말 몰랐어?”
“몰랐어!”
“에에. 새콤한 맛을 내는 과일은 몇 없을 텐데. 그 모든 과일의 시초가 레몬이란 걸……. 정말 몰랐다고?”
내가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레트가 버럭 짜증을 냈다.
“알았으면 어쩔 건데! 그리고 레몬이랑 다른 거잖아!”
“호오. 겉모습은 레몬이랑 똑 닮았을 텐데.”
“그래서 어쩌라고!”
그 말에 급히 아펠이 제 아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만 하거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느냐.”
하지만 할머니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차갑게 굳어졌다.
“설마 너희 알고 있었던 것이냐.”
“아, 아닙니다. 알고 있던 게 아니라……. 그러니까 알고는 있지만, 이렇게 될지 몰랐던 겁니다. 단순히 레몬에 대해서…….”
얼마나 당황했으면 아펠은 제 아들의 입을 막았으면서, 그 어린애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
“아펠, 아니 레트, 칼, 그리고 케일럽.”
“아뇨. 제가 만든 거 아니에요. 난 아무것도 몰랐어요. 할머니.”
기다렸다는 듯 케일럽이 발을 뺐다. 그걸 보며 아펠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저, 저희 아이들도.”
“그러고 보니 두 아이들이 재료를 다 골라왔죠. 이거면 할머니의 맘에 들 거라고. 안 그래도 제가 이것의 재료 또한 레몬과 관련되지 않았냐고 물어봤었는데 둘이 아니라고 한 것 같습니다.”
“형이 언제 그랬어!”
“맞아! 형도 같이 골랐잖아!”
“글쎄. 나는 오히려 물어본 거 같은데.”
단호한 케일럽의 모습에 열심히 반박하던 레트와 칼의 입이 굳어졌다.
한마디만 더하면 너희들을 가만 두지 않겠노라고, 살기어린 그 눈빛이 둘의 말문을 막게 만들었다.
“…….”
물론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본인들이 저렇게 이야기하니 어떤 말도 더 물을 수 없었다.
“여기서 이야기는 그만 하자 .피곤하니 이만 나가 보거라. 나도 방으로 가서 쉬고 싶으니까. 중요한일을 앞두고 이게 무슨……. 하아.”
실망감이 꽤 큰 할머니는 문앞에 있던 시종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직도 간지러운 듯 몸을 벅벅 긁던 할머니는 가까이 다가온 시종의 부축을 받으며 방에서 나갔다.
아주 잠시 방에 적막이 흘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은 멀어져가는 할머니를 바라 지켜보았다.
“레오칼.”
“네 형님.”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한 줄 아느냐?”
“무슨 짓이랄 게 있나요. 저나 제 딸이나 현실을 말한 것뿐이죠.”
나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 예민하게 구는 아빠는 품에 날 안은 채 몸을 돌렸다.
“허. 네놈이!”
“지금 다들 정신이 있다면 저한테 뭐라할 게 아니라 어머니를 찾아가도록 하세요.”
“감히 나를 가르치는 것이냐!”
“형님들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늘 제가 죄인 같았는데 말이죠.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지난번 레트와 칼의 일도 그렇고,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 같군요. 그리고 제 아이를 지키려면 제가 나서야 겠어요. 이젠 그런 말로 이제 주눅들지 않아요.”
아빠의 다짐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유난히도 붉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허허. 이놈이! 정말 네가 미쳤구나!”
아빠는 더 이상 상대하기 싫다는 듯 앞으론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말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레오칼!!”
아빠를 부르는 목소리가 쩌렁 쩌렁 울렸지만, 아빠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아빠, 괜찮아?”
물론 사람이 하루아침에 나아질 리 없으니 아빠의 몸은 덜덜 떨렸다.
아빠의 볼에 살짝 손을 얹었다. 하지만 감정을 숨기려는 듯 아빠는 내 방에 도착할 때까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저 한숨만 푹푹 내쉴 뿐.
그리고 마침내 방에 도착한 아빠는 날 의자에 내려놓자마자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마네트…….”
“아빠.”
“나 잘하고 있는 거겠지?”
“응!”
크는 건 어린 아이 하나가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도 같이 성장한다.
“난 지금의 아빠가 너무 좋아!”
“그래?”
그제야 안심한 듯 아빠의 안색이 밝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