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응! 아빠는 정말 잘하고 있어! 잘 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설프지만 최선을 다하는 아빠를 보며, 아이를 키우면서 어른도 함께 자란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처음부터 부모인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렇기에 아빠가 더 좋다.
난 자리에 주저앉은 아빠의 머리를 차분히 쓰다듬었다.
“사랑해. 아빠.”
“아빠도 아마네트를 너무 사랑해.”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운 내. 아빠. 조금씩 더 강인해져야 해.
나중에 할머니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이겨낼 수 있게 단단해지라고.
“응! 그러니까 오늘은 어서 가.”
“응? 벌써? 왜? 아, 그렇다고 아빠가 아마네트한테 막 집착하는 건 아닌 거 알지?”
다람쥐가 도토리를 빼앗긴 것처럼, 아빠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애처로운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알지. 아니까 오늘은 얼른 가.”
단호한 내 태도에 아빠의 입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역시……. 아빠가 집작했어야 하는 걸까?”
고민하는 아빠를 보며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아니! 어찌되었든 아빠 내일 봐!”
“아아……. 예전에는 아빠 없으면 밤에 잠도 안온다고 하더니.”
“요새는 쑥쑥 크려는지 자꾸 잠이 오네.”
난 아빠의 자립심을 길러 주기 위해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끝까지 아쉬움을 토로하던 아빠는 결국 오늘도 그렇게 물러나야만 했다.
이정도 되면 포기할 법 한데 매일같이 내가 축객령을 내리는 데도 불구하고 아빠는 늘 포기할 줄 몰랐다.
귀엽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나약했던 우리의 과거를 다시금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 나는 밖으로 아빠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미래를 바꾸기 위한 여정이 이제 막 첫 발을 떼었다.
* * *
며칠 후, 언제나처럼 쌍둥이 오빠들과의 아침 식사를 마친 나는 후다닥 방으로 돌아왔다.
나를 볼 때마다 할 말이 있는 듯 다가오는 쌍둥이를 피하는 것도 이제 조금 난감했다.
“언제까지 피할 수도 없고……. 아니 근데 나 왜 자꾸 도망치는 거지?!”
문득 내가 뭘 그리 잘못을 했다고 쌍둥이들을 피하는 걸까.
사실 그날 누구 때문에 다친 건지 말 안 한 것 외에는 크게 잘못한 게 없는데!
그런 생각이 들자 쭈구리처럼 문에 등을 대고 있던 허리가 바짝 세워졌다.
“갔다 와야겠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나는 그들에게 줄 책 몇 권을 골라 집고,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쌍둥이분들한테 가시려구요?”
내 뒤를 따라오던 멜린지가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응!”
“다행이에요.”
“응? 다행이야?”
“네. 생전 문 밖으로 나오지 않으시는 두 분이 매일같이 문밖으로 고개 내미시고 아가씨를 기다렸거든요.”
그 말에 가슴 어딘가가 쿡쿡 찔렸다.
“그랬어? 내가 조금 많이 바빴잖아.”
“그래요? 매일 방에서 뒹굴…….”
정곡을 쿡쿡 찌르는 말에 괜스레 목소리를 가다듬은 나는 당당하게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아니거든. 나름 생각을 한 거야.”
“그런데 아가씨는 외출은 안 하시나요?”
“외출?”
“네. 주인님이 외출을 싫어하실 거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매일 집에만 계신 게 지겹지 않을까 하구요.”
그러네. 아마네트는 언제나 집에 있었다. 과거에는 굳이 밖에 나갈 필요성을 찾지 못했다.
한국에서 살던 내가 휘황찬란한 사람들의 머리색과 옷차림에 적응 못한 게 제일 큰 이유였다. 게다가 필요한 게 있으면 알아서 다 가져다 주니 언제나 집안에만 있었다.
“금방 나갈 거야.”
“정말요?”
“응! 나 밖에 구경 나가고 싶어.”
“언제든지 나갈 수 있게 준비해놓으라 할게요!”
귀족가의 외출이라고 해봤자 대부분 마차를 타고 움직이거나 근처 호수에 구경 가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내 외출은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미래를 바꾸기 위한 첫 번째 발걸음을 내딛었으니 그 다음이 필요할 때이다.
소설 속에서 맨 처음 여주인공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게 이쯤이니까 타이밍이 왔다.
쌍둥이들을 위해서라면 소설 속 내용이 바뀌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모두에게 이것만큼 좋은 건 없을 테니까.
나는 품에 있는 책을 더 꽉 끌어안고, 쌍둥이들 방 앞에 도착했다.
“아 맞다, 아가씨.”
“응?”
“그……. 레트와 칼님 말이에요.”
“아. 왜. 반성 중인 거 아냐?”
“방에서 잘 안 나오고 계신다고는 하시는데, 이상한 게…… 나오실 때마다 어딘가 다치신다고 해요.”
“다친다고?”
멜린지의 말에 흥미조차 주지 않았던 내가 고개를 돌렸다.
“네. 그게 참 이상한데……. 이유조차 알 수 없다 하더라구요. 그래서 레트와 칼님은 가문에 귀신이 있다고 난리이신가 봐요.”
이게 무슨 소리지. 이런 이야기는 과거에도 없었는데.
레트와 칼에게는 언제나 호위 기사들이 각자 다섯씩은 붙어있고, 돌봐주는 시녀가 서른 명에 각자 유모도 따로 붙어있었다.
24시간 거의 누군가가 돌봐주고 있는데 귀신이라니.
“물론 귀신 같은 게 있을 리 없지만요. 아가씨도 절대 걱정하지 마세요. 세상에 귀신같은 건 없으니까요.”
본인이 말해놓고 걱정스러운 건지 멜린지가 손을 강하게 내저었다.
“알아.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어. 그런 건 걱정 안 해.”
“정말요? 제가 쓸 데 없는 말을 했네요…….”
“걱정 마. 그런 걸로 겁 먹을 거 없으니 떠오르는 건 모두 말해도 돼.”
“네!”
해맑게 웃는 그녀를 보며 아무 걱정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행히 멜린지는 내 말을 믿는 듯 아이처럼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끄덕였다.
“그럼 나 갔다 올게.”
“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쌍둥이들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평소라면 내가 들어오자마자 문으로 달려왔을 쌍둥이들은 미동도 없었다. 언제나처럼 창가에 앉아있을 뿐.
불러야하나 잠시 고민하던 그때였다.
“진짜 안오려나 봐…….”
“우리가 싫어진 거겠지 언제나처럼. 근데 냄새가 나는데?”
둘이 이야기하던 쌍둥이들이 동시에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나는 너무 갑작스러워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어?”
“왔네…….”
“아, 안녕?”
아주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쌍둥이도 나도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잘 지내고 있었어?”
그리고선 아무렇지 않은 듯 책을 창틀 위에 얹어두었다.
하지만 쌍둥이들은 그런 내 행동에도 미동 없이 고개만 돌렸다.
“왜 그렇게 쳐다 봐. 내가 온 게 싫어?”
“아니. 안 싫어. 보고 싶었어.”
먼저 입을 연 건 칼리스토였다.
“어? 보고 싶었어?”
“다시는 우리를 보러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누가 들으면 보기 싫어서 그런 줄 알겠다. 그냥 조금 바빴거든! 그리고 아침마다 같이 밥 먹을 때 얼굴 보는데 뭐.”
그리고선 몸을 휙 돌려 쌍둥이들과 눈을 맞췄다.
잘 지내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쌍둥이들은 마치 비 맞은 강아지들처럼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잘 못 지냈어?”
“아냐. 잘 지냈어. 그냥…….”
하지만 베른의 표정은 달랐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세모눈을 한 베른은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잘 지냈다니 다행이다. 너희들 주려고 책을 좀 가져왔어. 방에만 있는 거 재미없지?”
“그게 다야? 할 말 없어?”
“할 말?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야.”
“나는, 아마네트가 우리를 더 이상 보기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냐. 내가 왜 싫어해.”
“내가 한 행동 때문에……. 아마네트가 우리를 찾지 않던 그 순간부터 후회했어.”
원래 이렇게 적극적인 사람이었던가. 난 촉촉이 젖은 눈망울을 지닌 칼리스토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건…….”
“혹시 내가 하는 행동이 싫은 거야 아마네트?”
“싫을 리가. 내가 오빠들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래? 그럼 계속 해도 돼?”
“뭘 계속해?”
내 말에 칼리스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그냥…….”
“예전이랑 달라진 것 같아. 칼리스토.”
“처음으로 무서웠어.”
“응?”
“그냥 그랬다고. 그래서 이제…… 아니다.”
뭐라 말하려던 칼리스토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지 말고 여기 앉아있어. 다리 아프잖아.”
“응! 그러려고 했어.”
“그런 모습이 좋아.”
“응?”
“아냐.”
생긋 생긋 웃는 칼리스토의 얼굴에서 어쩐지 불안감이 몰려왔다. 며칠 오지 않았다고, 이렇게까지 사람이 변하기도 하나.
갑자기 잘해주니까 불안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라는 듯 베른은 불편하게 나를 바라봤다.
“근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