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53)

39화

“근데 말이야…….”

베른은 한참동안 말은 없었다. 안 그러던 놈이 그러니까 불안감이 엄습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까지 뜸을 들이는 걸까.

내가 잘못한 것도 없이 괜히 찔리는 기분이 들어 괜히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다.

“뭘 말하려고 이렇게까지 뜸을 들이는 거야.”

그러나 베른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말하기 싫음 말고.”

“너, 우리가 불쌍해?”

“뭐?”

“저번에 네가 하는 말 들었거든. 우리한테 직접적으로 한 말은 아니었지만, 밖에서 이야기하던 걸 들었어.”

순간 지난 일이 생각났다.

어느 날 멜린지가 왜 쌍둥이들에게 잘 해주냐고 물었을 때 했던 대답이었을 거다. 다른 이유를 대는 것보단 그게 더 나을 거 같아서 불쌍하다 했는데, 그걸 들었을 줄이야.

“아……. 그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최대한 상처받지 않게 둘러 말해야 하나 그런 고민이 들 때, 베른이 코웃음을 쳤다.

“맞나보네.”

내가 대답도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고 있자 베른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게…….”

“우리가 불쌍해서 잘해준 거 맞잖아. 다른 이유가 있겠어? 그냥 진짜 네 입으로 한말인지 궁금했을 뿐이야.”

“아니. 그게…….”

차마 내가 미래에서 너희를 봤고, 내가 죽기 싫어서 잘해준다는 말은 할 수 없다. 아니 한다 할지라도 불쌍해서 잘해준다는 말보다 더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게 분명했다.

내가 제대로 말도 못하고 있자, 칼리스토가 베른을 막고 성큼 성큼 옆으로 다가갔다.

“이참에 제대로 듣는 게 맞잖아 형. 형도 궁금하지 않았어? 단순히 우리에게 그런 이유로 잘해주는건지 말이야.”

“그게 진실이라 해도 지금 그이야기를 물어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누구보다 대답을 궁금해하면서 형도 참 위선자네.”

“듣고 싶었어. 듣고 싶었는데, 아마네트가 난처해하잖아. 내 동생이 난처해하는 건 싫어.”

“대단한 오빠 나셨네. 왜 이렇게 바뀐 거야?”

언제나 사이가 좋았던 쌍둥이들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베른. 그만해.”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진짜 남들이 보면 친 동생이라도 된 줄 알겠어. 난 솔직히 쟤를 볼 때마다 짜증나. 속에서…….”

어쩐지 이거 소설 속에서 본 내용인 것 같다. 아직 감정을 잘 모르는 쌍둥이들이 여주를 처음 만났을 때 이런 모습을 보였는데.

얘네들 왜 이러는 거야.

쌍둥이들의 성격이 1차적으로 변하는 게 바로 어린 여주를 만났을 시점이었다.

아직 안 되는데. 이놈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 다음 챕터가 여주를 이곳으로 데려오는 건데 벌써부터 변하다니.

“잠깐만! 둘 다 싸우지 말아 봐.”

“…….”

“네가 낄 자리가 아니거든.”

“아니 끼어들 건데. 내가 한 말 때문에 그런 거잖아. 그래 맞아. 솔직히 불쌍해. 처음 봤을 때부터 불쌍했어. 꾀죄죄 해가지고.”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표정을 굳히는 두 사람을 보며 자꾸만 가슴이 쿡쿡 찔렸다.

그렇지만 이번만은 이렇게 해야 한다.

다시는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저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의 욕심 때문에 이리저리 치이다가 이곳에 온 것뿐이었는데.

어린 시절의 기억이 행복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무리인가 보다.

“진심이야?”

“그럼 진짜지 가짜겠어? 솔직히 그냥 아빠가 잘해주라고 해서 잘해준 것뿐이야. 오빠는 무슨. 우리랑 되게 안 어울리잖아. 지금이야 사람 같아졌다지만.”

처음부터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까지 하려했지만, 그 말까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까지는 할 수 없었다. 나쁜 말을 해서 상처를 주고, 그로인해 나를 미워하게 만드는 건 아무리 마음을 먹었다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모든 말을 알아들은 쌍둥이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

“…….”

그러니까 변하지 마. 나는 너희들의 상처까지 보듬어줄 수 없으니까.

차라리 그냥 날 미워해.

“어느 정도 예상은 했는데, 네가 정말 그렇게 말하니까…….”

“베른. 그만해. 그만하자.”

다시금 둘의 관계는 돌아간 듯 보였다. 이전처럼 칼리스토는 베른을 막았고, 베른은 예전처럼 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네가 정말 싫어.”

“됐어. 됐어. 오늘은 이만 가주겠어?”

칼리스토의 말에 난 기다렸단 듯 몸을 돌렸다.

“가려고 했어. 나도 오래 있고 싶지 않거든.”

“…….”

“너 진짜 다신 오지 마.”

베른은 강하게 내 팔뚝을 잡아챘다. 그리고선 당장이라도 내쫓으려는 듯 질질 끌고 갔다.

“그만해 베른!”

“짜증나잖아. 우리가 불쌍해도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는데, 직접 말을 들으니까 너무 화가 나. 형이 널 위해 어떻게 했는데! 네가……!”

“베른. 됐어. 됐어……. 그만.”

아까와 사뭇 달라진 모습이었다. 처음으로 돌아온 듯 완벽하게 달라진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이 찔끔 나면서도 조금은 후련해졌다.

“무슨 일을 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말하지 않으면 모르지. 그리고 뭘 했든 난 상관없어.”

사실은 상관있어. 너희들이 날 위해 무언가 했다는 것 자체가 큰 변화였으니까. 우리 사이에 관계 변화의 첫걸음이었으니까.

감정이 없던 너희들이 조금은 다른 미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거니까.

하지만 난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프거든? 이거 놔.”

베른이 잡고 있던 팔을 강하게 뿌리쳤다.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는지 생각보다 쉽게 베른의 팔이 풀렸다.

“아팠어?”

“응. 그리고 앞으로 나 만지지 말아줄래?”

“정말……. 예민하게 구네.”

“예민하기는.”

이 정도충분해.

내 마음이 아파서 더는 못하겠다. 날 노려보고 있는 베른을 지나, 아까 그 자리에 멀뚱히 서 있던 칼리스토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게 맞다. 그래서 둘이 싸우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시간을 벌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

밖으로 나오자마자 가슴이 너무 아렸다. 갑자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무슨 말을 더해야 하는데 더는 말을 하는 게 무리가 될 만큼 .

“하아……. 하.”

방 밖에 있던 멜린지가 놀란 듯 내게로 다가왔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 왜 우세요!”

“안 울어. 이건 눈에……. 뭐가 들어간 것뿐이야.”

“아아. 파, 팔은 왜 이리 빨갛구요. 세상에.”

“나오다가 부딪혔어. 아 아파. 있다가 연고 발라줘.”

하지만 평소와 다른 내 모습을 이미 알아차린 멜린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내밀 뿐이었다.

멜린지가 손수 만든 듯 빳빳한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아냈다.

“아. 손수건이 이게 뭐야. 다음에 내가 손수건 선물해줄게.”

“말씀만으로 감사해요. 음……. 아가씨 우리 가서 초코케이크 먹을까요?”

“응. 그럴래. 엄청 많이 먹을래.”

“네. 바로 준비하라고 전할게요.”

살짝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봤다.

다음에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올게. 난 원래도 못되고 나쁜 인간이니까.

또 뻔뻔하게 굴면 달라지겠지. 처음처럼 거리를 두겠지만, 그래도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이렇게 된 이상 얼른 여주인공을 데리고 와야 한다. 자꾸만 달라지는 상황을 막기 위해선 예정보다 빨리 스토리 진행을 시켜야 한다. 어차피 여주도 거기에 두는 것보단 이곳에 오는 게 나을 테니까.

난 주먹을 꽉 쥐고선 빠르게 방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더 지났다.

며칠사이 아빠는 몸 만드는데 신이 난 건지 잘 찾아오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근육이 잘 안 붙었는데, 나이를 먹고선 체질이 달라진 것 같다며 아빠는 신이 난 상태였다.

몰래 가루를 타서 먹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마른사람들은 잘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몸에 좋다는 재료들을 잔뜩 첨가해 아빠에게 매일 저녁마다 먹이고 있다.

몸에 좋다는 소리에 나도 함께 마셨다. 물론 내가 먹는 건 우유에 초코를 탔고, 아빠는 몸에 좋은 온갖 것들을 섞어 주었다. 아빠의 음료엔 초코 가루와 닭고기를 간 것도 들어 있었다.

맛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아빠의 몸은 내가 만들어준 거나 다름없다.

“어때. 아빠 팔뚝 엄청 튼튼해졌지.”

“아주 좋아.”

“그런데 아마네트.”

“응?”

“요새 쌍둥이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더구나. 밥도 자기들끼리 따로 먹는다하고. 뭐 아는거 있어?”

난 아빠를 향해 어깨를 들썩였다.

“글쎄, 잘 모르겠네. 그보다 아빠. 나 외출할래.”

“외출? 그래 마차타고 구경나가자꾸나.”

“구경 말고 가고 싶은 데가 있어.”

“가고 싶은 곳?”

아빠는 제법 단단해진 복근을 자랑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따님은 어딜 가고 싶을까.”

“친구 구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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