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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41/53)

41화

“귀한 곳에서 오신 분인 건 알겠으나, 우선 누구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나름의 선을 지키고 있으나 그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느껴졌다.

‘그럴 만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제대로 인사를 하지도 않았으며, 내가 타고 온 마차는 가문의 문장이 없긴 했으니까.

보통은 어느 가문의 누구라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타고 온 마차의 문장만 봐도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내가 타고온 마차는 그저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보통의 마차와 다를 게 없었다.

처음부터 예사 가문의 분이 아니라고 한 것도 그냥 예의상 한 말이겠지.

“왜. 별로 대단하지 않으면 친구 못 사귀어?”

“아, 아닙니다 그런 건. 하지만 어린 분이 혼자 오셔서 친구를 구한다고 하니 조금 당황스러워서요.”

그러는 사이 멜린지가 옆으로 나섰다.

“오랜만입니다. 원장님.”

“누구지?”

사랑으로 아이들을 대했더라면, 몇 년을 이곳에 살았던 멜린지를 못 알아 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원장에게 아이들은 그때그때 필요할 때 쓰고 버리는 도구나 다름없었기에 멜린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원장은 직접 나서서 멜린지를 한미한 백작가로 입양을 보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15살이라는 늦은 나이였다.

정말 아이가 필요해서 백작가에서 입양을 한 건 아녔다. 그저 하녀 대신 공짜로 쓸 용도로 멜린지를 입양했고,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마음에 멜린지는 최선을 다해 백작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 덕에 그곳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고아원보다 백작가에서 생활하는 게 더 행복했다. 성도 부여 받았고, 덕분에 후작가에서 시녀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가끔 어릴 적 이야기를 할 때마다 멜린지의 얼굴이 굳어졌던 건 모두 이곳에서의 기억이 끔찍해서였을 것이다.

이곳은 여주인공이 아주 불행한 과거를 살았던 그 곳이니까.

멜린지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몰라도 여주인공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명확히 묘사되어 있었다.

여주인공이 쌍둥이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던 건 모두 이곳에서 겪은 일 때문이었다.

“기억을 못하실 거라 생각했지만 정말 기억하지 못하시는 군요.”

“나를 아나.”

“네. 저는 멜린지입니다. 5년 전까지 이곳에 있었던 고아예요. 원장님이 직접 입양까지 보내셨어요. 어쨌든 제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이 분은 제가 모시고 있는 아가씨입니다.”

“오호.”

멜린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듯 입을 동그랗게 말던 원장은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자신에게 여전히 시선조차 주지 않는 원장을 보며 멜린지는 허탈한 표정을 짓다가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레이제 후작가의 아마네트 레이제 아가씨입니다.”

“오오. 레이제 후작가라면 익히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지요. 그런데 그런 귀한 가문의 아가씨께서 고아원에서 친구를 구하시다니.”

말끝을 흐리던 그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위아래로 흘겨봤다.

“안 되는 거야?”

“친구는 어디서든 쉽게 구하실 수 있는 분이 오신 것도 신기한데, 어른도 없이 혼자 오신 것 자체가…….”

“난 어릴 적부터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했고, 내가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질 수 있었어. 아빠는 언제나 해줬으니까.”

이럴 때는 아이처럼 해맑게 구는 게 최고다. 나는 보통의 아이처럼 입을 뽈록 내밀었다.

“아, 그렇군요.”

“책에서 봤는데 고아원에는 내 또래 친구들이 많다했어. 그래서 그 친구들 보러 왔어. 맘에 드는 아이 있으면 친구 삼을래.”

“아하……. 하하.”

“안 되는 거야?”

난 어색하게 웃는 원장을 무시하고 멜린지에게 시선을 옮겼다.

“안 될 게 뭐가 있을까요.”

“응! 그러면 들어가도 되지?”

난 원장을 지나쳐서 안으로 들어갔다. 입양할 아이를 데리러 왔다고 하면 갖은 핑계를 대어서라도 내보낼 수 있었을 테지만, 친구를 만나러 왔다는 아이 말에는 원장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우물쭈물거리던 그는 나보다 앞장섰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응!”

“그런데 정말 단순히 친구를 구하러 오신 게 맞나요?”

“응!”

“아…….”

그의 시선이 멜린지에게로 옮겨진 것도 그때였다. 정말 내 말이 맞는지 멜린지를 향해 턱짓했다.

그러나 멜린지는 원장을 무시하려는 것처럼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아빠가 보낸 마차에서 기사들이 차례로 내려서 우리 뒤를 졸래졸래 따랐다.

그리 크지 않은 보육원 건물 안에는 조그만한 어린아이를 따르는 수많은 기사들의 모습이 장관을 이뤘다. 물론 보육원아이들은 놀라서 급히 숨기 바빴지만.

그러는 사이 보육원장과 쿵짝이 맞는 몇 명의 보육교사들이 아이들을 한 데 모으기 시작했다. 잠시 후, 원장의 방으로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그 곳에 모인 열 명의 아이들.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 아마도 원장에게 예쁨을 받은 덕에 그나마 사람답게 지내는 아이들인 것 같았다.

“이 아이들은 어떤지요. 후작가의 아가씨의 친구가 되기에 충분한 아이들입니다.”

“우움.”

난 그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나 여주인공은 여기에 없다. 당연히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별로 놀랍지도 않다.

“별로이십니까?”

“응! 내가 찾으러 다닐래.”

“네? 하지만……!”

“왜 내가 가면 안 되는 곳이라도 있는 거야?”

“여기는 크, 큰 병이 있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제가 사랑으로 보살펴 주고 있긴 하지만, 아가씨께서 가까이 하시기에 그리 좋지 않은 아이들입니다. 그러니…….”

나름의 변명을 하려는 듯 그는 손사래까치 치며 횡설수설 했지만, 난 더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마구간 바로 옆에 붙어있는 방은 방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밤도 낮도 구분도 되지 않을 만큼 어두컴컴했다. 나는 언제나 그곳에서 살았다.

말의 울음소리가 자장가가 되어주었고,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침을 알려주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난 그곳에서 갇혀 지냈다. 아마도 독특한 머리색 때문이었겠지.

원장은 분명 나중에 가치가 있을 거라며 날 그곳에 가둬놨었다. 보석을 보물 상자에 넣어놓는 것처럼, 아니 보석을 똥에 파묻어 놓는 것처럼.]

여주인공의 서사로 담담하게 써내려간 어린 시절에 대한 묘사는 가슴이 아려올 정도였다.

그리고 그 부분에 분명히 명시된 내용.

마구간 옆에 있는 창문조차 없는 방. 이곳으로 오면서 마구간이 어느 쪽인지 확실하게 봐뒀다.

“어, 어디 가십니까!”

“친구 찾으러!”

“아, 아니 그렇게 혼자 다니시면 안 됩니다. 정말 큰 병이라도 옮기다고요.”

“괜찮은데.”

그러는 사이 우리는 누가 봐도 수상한 방 앞에 도착했다. 쇠사슬로 문이 칭칭 감겨있는 곳.

“여기는 뭐야?”

“여, 여기는 그냥 창고입니다.”

때마침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들어 가볼래.”

“네? 아뇨. 이곳은 안 됩니다. 아무리 후작가의 아가씨라고는 하나 이렇게 맘대로 돌아다니시는 건…….”

“후작 각하께서 이 고아원에도 꽤 많은 돈을 후원하는 걸로 아는데요.”

멜린지는 눈을 흘기며 그를 봤다. 방금 전까지 적극적으로 문을 막던 원장은 아, 소리를 내며 한발 물러섰다.

착해빠진 우리 아빠는 이곳뿐만 아니라 제국에 있는 모든 고아원이나 보육시설에 후원을 하고 있었다.

그 돈이 꽤 큰돈인지라, 원장은 입만 어물거렸다.

“어찌되었든 그곳은 안 됩니다. 고아원의 다른 곳은 모두 보여드릴 수 있으나-”

“단순히 창고라면서 왜 그렇게까지 못 보여준다는 거야?”

“그건…….”

“진짜 뭐가 있긴 있나 보다. 나 여기 볼래. 여기만 보고 갈래. 여기 안 보여주면! 아빠한테 이른다!”

원래도 고집이 심했던 아이었던지라 후작가에서 같이 온 어느 누구도 놀라워하지 않았다.

“아, 아니 그건…….”

“그냥 문만 열어달란 건데! 되게 수상해! 나 열어줄 때까지 여기서 안 나올 거야!”

“아…….”

이런 진상이 있나. 원장은 어이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다른 이들에게로 시선을 옮겼지만, 나와 함께 온 어느 누구도 날 말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말려봐야 내가 더 난리칠 걸 알았으니까.

그런 대치가 한참이나 계속 되었다.

오 분, 십 분…….

내가 그 앞에서 자물쇠를 만지작거리며 별다른 미동도 보이지 않자 결국 한참 끝에 보육원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병에 걸려도 전 모릅니다.”

“응.”

“이곳에서……. 아닙니다.”

뭐라 더 말하려던 그는 말을 덧붙여봤자 나중에 내가 말꼬리를 잡을 걸 알았는지 말을 급히 줄였다.

오히려 못하게 할수록 아이들은 더 하고 싶어하는 걸 아는 듯 그를 한참 고민 끝에 품에서 열쇠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마침내 굳게 걸어둔 자물쇠가 풀렸다.

어차피 원장도 방 안에 있는 아이를 상품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좀 특별한 아이. 고급 상품이기에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꺼운 철 소리를 내며 자물쇠가 풀렸고, 끼이익 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두컴컴한 방 안으로 마침내 빛이 들어갔다. 그리고 드디어 난 그곳에서 여주인공을 만났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인간이 아닌 것 같다. 라는 생각만 들었다.

햇빛을 보지 않아서였을까 유난히도 하얀 피부에, 백발인지 은발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머리카락.

갑작스럽게 들어온 빛에 급히 손으로 눈을 막았지만, 루비를 박아놓은 듯 영롱한 붉은 눈동자는 그냥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나…… 친구를 찾은 거 같아.”

“네? 아, 안 됩니다. 이 아이는 마, 많이 아픈 아이예요.”

“요정님 같아. 나 저 애 친구할래.”

“안 됩니다. 그건!”

그때였다.

“내 딸이 원한다는데 뭐가 문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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