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설마. 여주의 능력은…….’
치유력은 아주 어릴 적부터 발현한 능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원래는 어느 정도 이야기가 진행된 후 갑자기 생긴 능력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보다.
어릴 적부터 갇혀 지냈던 여주가, 아프지 않고 그나마 살아갈 수 있었던 건 몸에 있는 치유력 덕분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던 거구나. 밥도 제대로 주지 않고, 빛도 보지 못하게 하고 살아있는 송장처럼 방에 가둬놨음에도 살 수 있었던 건 모두 치유력 덕분이었다.
“이상하군. 그럼 제대로 돌봤다는 건가?”
반면, 치유력을 전혀 떠올리지 못하는 아빠의 생각은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아니 아무리 봐도 정서적인 학대가 있어 보인다고!’
“그렇지만 제대로 돌본 것치곤 말랐으니 참으로 이상할 노릇이군요.”
그나마 최근에 정신을 차린 의원이 아빠의 의견을 반박했다.
“그래.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알아보지. 몸에 다른 이상은 없는 게 확실한가?”
“네.”
“이 아이가 있던 곳에 의하면 분명 몸에 이상이 있다하던데. 전염병일지도 모르고. 제대로 본 게 맞나.”
아빠는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흘겨봤다.
“허. 누가 그러던가요. 제 실력을 걸겠습니다!”
“그런가? 그쪽도 확신을 담아 말하던데.”
“그, 그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방금 전까지 당당하던 의원은 금세 꼬리를 내리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지 여기저기 아까보다 더 꼼꼼히 살폈다.
그렇게 삼십여 분이 지난 뒤에야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정말 없습니다. 정말 건강합니다. 보통 병이 생기면 나타나는 작은 증상들이 있습니다.”
“그래.”
“그 작은 증상들이 합쳐져 하나의 병증이 되는 것이고, 그 병증들의 사례를 살피어 다른 부분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고요.”
“그래서.”
“정말 아무리 살펴도 조금의 병증이 없습니다. 작은 증상들도요.”
의원의 미간에 주름이 쫙쫙 갔다.
“모든 병의 기초가 되는 미열조차 없는 몸입니다. 오히려 체온은 이다지도 정상일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상온도입니다. 이 몸을 가지고 이상이 있다고 한 그들을 직접 만나고보고 싶을 지경입니다.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건지.”
내가 이 의원을 좋아하진 않지만, 지금 이순간은 아주 조금 마음에 든다.
“으음.”
“믿기지 않으시면 다른 의원을 부르셔도 됩니다. 도리어 다른 이들을 통해 제 실력이 잘못된 게 아님을 증명하고 싶군요.”
다른 이를 들이는 걸 죽을 만큼 싫어하는 의원이었지만, 자신의 억울함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도 쓸 듯이 굴었다.
평소와 다른 그의 당당한 모습에 아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아빠는 의원을 빤히 바라봤다.
“그럼, 지금 했던 말들을 서류로 적어줄 수 있나.”
“서류요?”
예상치 못한 제안에 그의 안색이 조금은 굳어졌다.
“그래, 이 아이의 몸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진료서. 뭐 그 정도는 어려운 게 아니지 않나.”
“아. 그것은…….”
“자신만만해하더니 그건 안 된다는 건가?”
“아뇨. 해, 해드릴 순 있습니다! 제 실력과 관련된 일이기도 하니까요. 그렇지만 혹여나 이게 저한테 피해가 오거나 하진 않겠죠……?”
절대 피해가 오는 일은 하지 않으려는 듯 그는 매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 말도록. 그대뿐 아니라 다른 의원의 진료도 받게 할 거니까.”
“그들에게도 똑같은 서류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하실 겁니까?”
“그래.”
“좋습니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써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 당장 쓰도록.”
“말씀 지키셔야 합니다. 나중에 제 서류 하나만 남았다던가…….”
불안한 마음에 계속해서 말이 길어지는 의원을 보며 아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결국 우물쭈물하던 의원은 왕진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여주의 건강 상태에 대한 전체적인 상황들을 적어 내려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서류를 가만히 보던 아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생했다.”
“고생은요. 허허…….”
“그럼 나가보도록 해.”
이때를 기다린 듯 그는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께 다녀와야겠어.”
“응?”
“그리고 간 김에 다른 의원들도 들여서 저 아이의 상태를 봐야겠구나.”
아빠는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지금 바로 가는 거야?”
“응. 어차피 방금 저 의원이 어머니께 말할 테니까 간 김에 말하는 게 낫겠지. 그러니 아마네트.”
“응?”
아빠는 내 어깨를 보드랍게 쓸었다.
“네가 이 아이를 지켜주려무나. 아빠가 갔다 오는 동안 말이야.”
“아아! 좋아.”
“알았지? 이 아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그리고 차려서 그 곳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 말하기 전까지. 네가 지켜주려무나.”
“알았어. 잘 때도 지킬게!”
그 말에 아빠가 피식 웃었다.
“아냐. 아빠가 올 때까지만 지키면 돼. 그 외에는 믿을 만한 자들을 시켜 지키라 하면 되니까.”
“응!”
“그럼 갔다 오마.”
그 말과 함께 아빠는 밖으로 나갔다. 나가면서도 여주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수십 번이나 했다.
‘데려온 건 나인데 아빠만 피곤하게 생겼네.’
그저 친구로 삼아 몇 번 왕래하면서 아빠의 눈에 띄게 해서 우리 가문에 위탁할 수 있게 하는 게 내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바로 입양으로 넘어갈 줄이야.
급변하는 상황에 조금 당황스러웠으나, 예상보다 훨씬 좋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여주를 바라보는 내 시선도 조금씩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내가 그곳에서 널 데려오는 게 맞는 거겠지?’
여주는 한참이 지나도록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빠는 아주 늦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다섯 명의 의원들과 함께. 아빠는 그들과 함께 들어와서 여주의 건강을 체크할 것을 명했다.
엄청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아빠 괜찮아?”
“으응.”
“엄청 졸려 보여.”
“아니야. 어머니한테 조금 시달리긴 했는데,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의원들을 보는 아빠의 눈은 잔뜩 풀려있다. 당장이라도 잠에 들 것처럼.
괜찮다고 했지만 전혀 안 괜찮아 보인다. 게다가 의원들은 후작인 아빠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건지 한참의 시간을 할애하며 진료를 봤다.
“피곤하면 저 사람들 보내고 좀 자.”
“서류가 필요해…….”
“서류?”
“아마네트……. 미안한데 정말 너무 피곤해서 그러는데 잠시만 눈을 붙이마. 다 끝나면 깨워주겠니?”
왜 이렇게까지 서류에 집착하는 걸까.
궁금증이 몰려왔지만 피곤해하는 아빠에게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대신 아빠의 부탁대로 의원들이 여주 진료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눈에 불을 켜고 그들을 노려봤다.
* * *
일이 터진 건 바로 다음날이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각자의 방으로 가서 잠에 들었던 아빠와 나는 다음 날 점심, 여주가 있는 방에서 모였다.
여전히 그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미 이런 상황은 예상한 듯 아빠와 나는 말없이 여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후작 각하.”
우리가 있는 방에 낯선 이가 하나 찾아왔다.
그의 등장을 어느 정도 예상한 듯 아빠는 그를 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무슨 일이지.”
“찾으십니다.”
앞뒤 다 잘라먹고 이야기하는 남자를 보며 난 경계 태세로 전환했다.
“어머니가?”
“네.”
할머니가 보낸 사람인 걸 알게 된 후 더 경계심을 세웠다.
“무슨 일이지.”
“고아원장이 찾아왔으니, 직접 해결하라고 전하셨습니다.”
“아…….”
고아원장은 아빠가 아닌 할머니를 찾아갔다.
“알았다. 내가 가보도록 하지.”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 할머니가 많이 화난 거야?”
“응?”
나는 시종의 말에 따라 나서려는 아빠의 손을 잡았다.
“글쎄. 이미 말씀드린 부분에 대해서 왜 또 이야기 하시려는지 모르겠구나.”
“으음…….”
여주의 능력에 대해 할머니에게 솔직히 이야기하면 분명 이곳에 있는 걸 환영받겠지만……. 인생이 고달파지겠지.
차라리 소설속의 내용대로 흘러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괜찮아.”
고민들 때문에 말이 없어지자 아빠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나와 있을 때는 아이처럼 굴던 아빠는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만 같다.
그런 아빠를 보며 난 굳은 결심을 하나 했다.
“아빠. 나도 같이갈래.”
“네가?”
“어.”
아빠는 미간을 찡그리며 가만히 날 바라봤다.
“내가 가서 다른 걸 하려는 건 아니고 어찌되었든……. 내가 데려오자고 한 거니까.”
반대할 줄 알았던 아빠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꾸나.”
“정말?”
“응. 보여주마. 아빠가 우리 딸을 위해 어떻게 노력하는지.”
이건 무슨 소리일까 싶었지만, 아빠의 얼굴은 아까보다 밝았다. 도리어 나를 할머니에게 데려가는 걸 꽤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으응!”
뭐 같이 가면 좋은 거니까, 난 아빠의 손을 냉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