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그런데 괜찮겠어?”
“응?”
“가면 조금 피곤해질지도 모르는데?”
“응! 괜찮아! 아빠가 있으니까. 나도 데려온 친구에 대해 직접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맨 처음 발견한 건 나잖아!”
“든든해.”
아빠는 단숨에 나를 안아들었다.
“걱정 마! 내가 아빠 지켜줄게!”
“그래. 갑자기 마음이 든든해지는구나. 어떤 일이든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아.”
조금은 기쁜 듯 웃는 아빠를 향해 더 밝게 웃었다.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나 나 또한 노력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아빠는 날 안은 채 본채로 향했다.
역시나 예상처럼 본채 앞에는 떡하니 고아원의 마차가 서 있었다.
고아원 마차답게 화려하진 않았지만, 앞에는 문양이 박혀있었다.
‘정말 왔네. 원장도 꽤 급하긴 급했나보다.’
갑작스런 손님의 등장 때문에 본채는 꽤 분주한 상태였다.
저마다 급한 듯 움직이는 사람들은 누군가가 이곳에 방문했다는 걸 여실히 보여줬다.
“어머니는 어디 계시지.”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본채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던 듯 시종은 꽤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안으로 데려갔다.
이런 걸 보면 이 가문의 주인이 누구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분명 아빠가 후작인데 이곳에 있는 어떤 이도 아빠를 후작으로 생각지 않았다.
그저 할머니의 눈치를 살필 뿐.
‘아빠에게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허수아비. 딱 그 말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저 목을 까딱거리며 대충 인사했다.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어.’
이게 다 할머니의 힘이 너무 강해서 벌어진 일이다.
“아빠.”
“응?”
“여기 사람들은 왜 아빠 다 무시해?”
보란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빠는 생각지 못했는지 고개만 갸웃거렸다.
“어?”
“그렇잖아. 아빠 후작 아니야?”
“맞지.”
“그런데 아빠한테 고개 숙여 인사하는 사람들은 왜 하나도 없어?”
무언가 잘못됨을 느낀 건지 주변에 있던 이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 그래 보였어?”
“응! 아빠가 무시당하는 거 같아! 나도 무시당하는 기분이고!”
순수한 아이처럼 느껴지는 그대로 할 말을 내뱉었다.
‘이제는 저들한테 선택하라고 해야 하니까.’
이제 슬슬 사용인들로 하여금 어느 쪽에 설 건지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아빠의 힘이 강해지기 전에, 정말 아빠의 사람이 되어 줄 사람들을 찾아야하니까.
과거에 이 삶을 이미 살았다한들, 누가 어떤 쪽에 섰는지 모두 알 순 없다. 가문에 일하는 사용인들은 100명은 훨씬 넘으니까.
특별한 행동을 하는 이들 중 몇몇은 기억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천재는 아니다.
‘보통 빙의하면 엄청나게 좋은 기억력으로 다 기억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론 내가 맨날 놀고먹고 이 삶을 즐기느라 주변의 일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긴 했었다.
‘어느 누가 자기가 죽을 거라 생각하고 다 기억하며 살겠냐고!’
물론 나는 너무 망나니로 살았다.
어쨌든 과거를 엉망으로 살았으니, 현재를 더 보란 듯이 변화시켜야한다. 그래서 더 과장하며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흠.”
몇몇 사용인들은 내말에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고, 몇몇 사람들은 정신을 차린 건지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들을 보면서 아빠도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표정이 조금씩 변했다.
주변을 살피던 아빠는 한참 끝에 입을 열었다.
“나보단 아마네트 네가 낫구나.”
“아빠는 너무 착해서 문제라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보이는구나. 안일하게 생각한 일들 때문에 너도 무시를 당할 줄은 몰랐어. 참. 하나만 생각할 줄 아는 바보였어.”
그래서 사람들이 아빠를 좋아했지.
‘하지만 착해봤자 소용없어. 이용당하기만 쉽지.’
“맞아! 아빠, 나 무시당하는 거 싫어.”
“그런 생각 들지 않게 아빠가 이곳을 바꾸도록 할게.”
“응!”
불편감을 내비치는 이들은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런 이들을 눈으로 하나하나 새겼다. 대충 저 사람들은 아빠와 척질 사람들이구나, 완벽히 할머니의 편이고 후작인 아빠의 눈치를 조금도 보지 않는구나 파악이 됐다.
그 사이, 우리는 할머니의 방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방 안의 분위기는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할머니와 원장은 무슨 이야기를 그리도 하는지 하하호호 난리도 아니다.
“들어가지.”
그 소리를 들었음에도 아빠는 별 다른 표정변화가 없었다.
방문이 열리고,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 전까지 세상 즐겁게 수다를 떨던 할머니의 얼굴인 일순간 굳었다.
지난번 일 때문에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은 건지 조금은 지쳐보이던 할머니는 아빠가 오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왔느냐.”
“네. 어머니.”
“이번에 무슨 일로 널 부른지 잘 알겠지.”
앉으라든가 차를 먹겠냐는 질문 따윈 없었다.
할머니는 그저 불편한 표정만 지었다.
“네.”
“네가 한 일 때문에 고아원장이 굉장히 난처한 상황이라며 나를 찾아왔더구나.”
“이 일에 대해서는 어머니께 먼저 말씀을 드렸던 걸로 압니다.”
평소였다면 납작 엎드렸을 아빠가 도리어 어깨를 쭉 펼치고 당당히 말하자 할머니는 깊은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흠. 그래. 미리 이야기했지. 그런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닌 듯해서 말이지.”
“제가 거짓을 고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어머니는 제 말이 아닌 저 자의 말을 더 믿으시나봅니다.”
“글쎄.”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 할머니의 모습은 과거와 확실히 달랐다.
과거에는 할머니가 아빠를 이렇게까지 적대하진 않았다.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할머니도 아빠를 예뻐했다. 그런데 지금의 할머니는 사뭇 달랐다.
‘모든 시간이 빠르게 당겨졌으니, 할머니가 아빠를 싫어하게 되는 것도 더 빨라진 건가.’
그 사이 아빠는 날 들었다 놓으면서 고아원장을 바라봤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분명 아이를 입양한다 말했는데.”
그제야 고아원장은 예의 바른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그래.”
“원래라면 아이를 입양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를 전하고 추진하는 게 맞지만 그 아이는 안됩니다.”
“또 그 소리인가.”
평소에 보인 적 없던 아빠의 잔뜩 굳은 얼굴.
“대체 무엇이 안 된다는 거지?”
“그때 말씀드렸다시피 그 아이는 보통의 아이와 다릅니다.”
“다르긴 한 것 같더군. 학대를 당하고 있던 것 같아.”
“아닙니다!”
“그럼 그 아이는 왜 혼자 방에 그리 남겨져 있던 거지? 심지어 햇빛도 들지 않는 방에서 아무도 없이 홀로?”
지난번과 달리 원장은 당당하기만 했다.
“선대후작부인께 먼저 말씀을 드리긴 했지만, 정말 아픈 아이입니다. 햇빛을 보는 게 좋지 않을 뿐더러, 다른 아이들의 건강과 그 아이의 건강을 위해 격리해놓은 것뿐입니다.”
“아프다?”
“네. 그에 대한 서류도 가져왔습니다.”
이때를 기다린 듯 원장은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서류를 들어 아빠에게 내밀었다.
이미 할머니는 읽은 듯 서류의 방향은 할머니를 향해 놓여 있었다.
“그 아이의 건강이 온전하지 못하고, 다른 아이들과의 격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담긴 서류입니다.”
아빠는 별 표정 변화 없이 서류를 들어올렸다. 그리고선 찬찬히 종이를 살폈다.
“그렇군. 아이의 건강이 좋지 않고, 그에 따른 격리가 필요하다. 이건 격리당하는 아이나, 다른 아이들을 위해 꼭 필요한 거라고. 그대가 말한 대로 한글자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쓰여있군.”
“네! 그렇습니다.”
“서류상으로는 1년 전에 쓰여진 거고?”
“네!”
“1년 된 서류치고는 얼마 전에 만들어진 종이처럼 아주 빳빳하군 그래.”
그 순간 원장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 그건 보관을 잘해서입니다.”
“아무리 보관을 잘해도, 이렇게까지 종이를 잘 보존하기 쉽지 않을 텐데 말야. 그 보존 방법에 대해 나중에 한번 배워보고 싶군.”
아빠가 입꼬리를 올리며 이야기하자 할머니가 그 사이를 껴들었다.
“지금 그 이야기가 중요한 건가.”
“그저 궁금했을 따름입니다. 저도 저 나름대로 궁금한 게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죠. 그렇고 말구요. 종이에 대한 것은 제가 나중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찌되었든 그 아이는 입양보내기 마땅하지 않은 아이입니다.”
“아이의 건강 때문에?”
“네. 그게 제일 큰 이유죠. 혹여나 그 아이의 병이 퍼져서 다른 이들이 아플까봐요. 아이들을 보호하는 사람으로서 그것이 걱정될 뿐입니다.”
가식의 끝을 보여주는 그의 모습에 할머니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빠는 코웃음만 쳤다.
“아이의 건강을 그리 생각하는 자가 왜 최근에 진료 본 기록이 없지?”
“그것은…….”
“뭐. 이것도 어떻게든 핑계를 대겠지.”
“핑계라니요. 맞는 말을 한 것뿐입니다.”
원장은 도움을 요청하는 듯 할머니 쪽을 바라봤다.
“상식적으로 원장이 거짓말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왜 그렇게까지 부정적으로 말하는지 이 어미는 이해할 수가 없구나. 요새 이상해졌다 생각을 하긴 했지만…….”
할머니의 시선은 내게로 향했다. 마치 그 원인이 나라는 것처럼.
“제가 이상한 건지, 저 원장이 이상한 건지는 객관적으로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 그에 따른 증거를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