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증거는 무슨. 더 이상 볼 게 무엇이 있느냐. 고아원장이 아이를 생각해서 입양을 못 보낸다는데, 그것에 말을 덧붙이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지.”
“…….”
“게다가 굳이 그 아이를 입양하고 싶어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듣기로는 그 아이가 원했다지?”
할머니의 말에 아빠는 피식 웃고 말았다.
“네. 제 딸이 원한 겁니다.”
“딸이 원하니 다른 아이를 입양한다고? 그 아이가 우리 가문의 아이인지도 잘 모르겠는 이 상황에서?”
“어머니. 말씀이 심하십니다. 그 문제는 이미 끝난 걸로 아는데요. 얼마나 많이 증명해야 하는지 이제 모르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나는 반대야.”
“반대하셔도 마음의 결정은 했습니다. 그 아이를 원장의 밑에 두지않겠노라구요. 저는 입양을 진행하겠습니다.”
그 말에 원장과 할머니가 동시에 아빠를 향해 눈을 흘겼다.
“레오칼!”
“후작님!”
“그리 난리치실 것 없습니다. 두 분 다.”
순간 뒷목이 당긴 건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던 할머니의 몸이 급히 옆으로 쓰러졌다.
물론 할머니가 쓰러질 일은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쓰러지기 전에 할머니의 팔이 본능적으로 소파를 부여잡았으니까.
당연스레 아빠가 자신을 잡아줄 거라 생각했던 건지, 할머니의 표정이 더욱 더 굳어졌다.
‘천천히 옆으로 쓰러질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마치 누군가 뒤에 실을 묶어놓은 것처럼 할머니의 행동은 참 부자연스러웠다.
“이제는 이 어미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 모양이구나.”
“그럴 리가요.”
“말은 참으로 잘 해. 레오칼. 아무리 봐도 말이다. 네가 이 어미를 진정 죽일 생각인 게 확실한 모양이다.”
“…….”
“가뜩이나 몸이 성치않아 힘든 와중에 이런 일로 신경쓰이게 만들고.”
화조차 내기 힘들다는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할머니는 끙끙대기에 이르렀다.
“어찌되었든 내 의견은 그러하니, 고아원에서 온 아이는 당장 내보내도록 해. 굳이 분란을 만들고 싶지않구나.”
“그 아이를 받지 않는 이유가 단순히 아마네트 때문입니까. 아니면 저 원장의 말을 믿기 때문이십니까?”
당장이라도 나 때문이라고 말하려는 듯 입을 열려던 할머니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옳지 않은 일이니 반대하는 것이지. 후작이라는 놈이 사사롭게 딸아이가 원한다 해서 이런 짓을 한다는 것이 말이 안 돼 말리는 것뿐.”
타당한 이유라고 생각했는지 할머니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만족스러운 듯 씩 웃으며 원장을 바라봤다.
“그리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그제야 아빠는 포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 이상의 분란을 만들지 말고 돌려보내라.”
“하지만 이걸 봐주셔야겠습니다.”
아빠가 뒤편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자 시종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그의 품에는 종이 몇 장이 들려 있었다.
“이제 와 볼 게 뭐가 있다고.”
“정말 아이를 생각해서 데려가려는 거면 얼마든지 돌려보내겠습니다. 하지만 저 원장은 그런 생각 따윈 전혀 없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잘 돌보지도 않은 아이를 데려가려는 것뿐!”
“모함입니다. 제가 그럴 리가요. 제가 얼마나 아이들을 사랑하는데요!”
“그런 자가 아이의 최근 진료기록하나 보유하지 못하고 있단 건가?”
“그건 그 아이가 워낙 예민하여 다른 이들의 진료를 보지 못하게 하여서 그랬을 뿐입니다.”
지난번과는 사뭇 달랐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듯, 그는 아빠의 날선 질문에도 주저없이 반박을 해보였다.
“그렇군.”
“네. 제가 아이를 정말 학대하려 했다면, 그랬다면……. 그날 그 방을 열어 보여주었겠습니까.”
마치 자신은 어떠한 문제가 없다는 듯, 절대 나쁜 의도 따위 없고 모든 건 아빠가 곡해해서 들었다는 것처럼 굴었다.
“본인이 모든 걸 다 보여준 것처럼 말하는군. 내 딸아이가 보여달라고 했을 때 끝까지 무시하고 안 보여주려 했으면서.”
“그건…….”
“뭐 다 필요 없지. 이 서류는 그 아이를 데려온 그날 많은 의원을 통해 아이의 건강상태를 확인했던 자료니다.”
“…….”
“어머니께서 정말 논란을 만들고 싶지 않다면 저 아이를 원장에게 보낼 게 아니라, 우리가 거둬들이는 게 맞습니다.”
어제 만들었던 그 서류들이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은 정말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가문의 의원에게 받은 진단서부터 다른 의원들에게 받았던 것까지.
시종이 할머니 앞에 서류를 내려놓자마자 아빠는 더 굳은 표정을 지었다.
“이것들은 고아원장이 거짓말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 때문에 어제 늦은 밤인데도 의원들에게 여주를 살피라고 한 거구나.
“이번에도 보지 않으려고 하실 겁니까. 어머니. 아무런 문제가 없는 고아원장에게서 아이를 빼앗듯 데려오는 게 문제가 될 순 있지요. 하지만 문제가 뻔히 있는걸 아는 데에도 불구하고, 학대 사실을 알면서도 돌려보낸다면, 그건 우리 가문에도 문제가 될 것 같은데요.”
아빠의 얼굴에 드디어 미소가 번졌다.
언제나 할머니 말에 고분고분했던 아빠가 이렇게까지 반대 의견을 내비친 건 처음이었다.
할머니의 얼굴에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처음부터 고아원장의 편을 들려고 한건 아니었다. 그저 아빠의 기를 죽이기 위해, 제 뜻대로 하지 않는 아빠를 어떻게든 정신 차리게 하기 위해 이런 짓을 감행한 것이다.
오히려 할머니는 고아원장이 반가웠을 테지.
“끝까지 읽지 않으신다면, 어머니의 의도가 정말 아이를 위하거나 가문을 위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쐐기를 박듯이 아빠는 조용히 제 할 말을 내뱉었다.
“변했구나. 레오칼.”
“어머니야말로 변하셨습니다. 아니. 원래 이러셨던 분인데 제가 잘못 봤던 것일까요. 무엇보다 가문을 우선시하시는 분이셨는데…….”
그제야 못마땅한 얼굴을 해보이던 할머니가 아빠가 내민 서류를 들추었다.
“이게 뭐 어쨌단 것이냐.”
“고아원장이 정말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았다면 필시 현재 진료를 본 게 하나라도 있어야겠죠.”
“그건 아이가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현재는 어떻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거지?”
이거까진 생각하지 못했는지 원장은 손톱을 물어뜯기 바빴다.
“그러니까 그건…….”
“모두가 다 핑계라는 거겠지. 어머니가 보시기에는 어떠십니까. 이래도 아무 문제없는 아이를 제가 데려오려고 하는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서류들을 보았다면, 제대로 살펴보기만 했어도 아빠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할머니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듯 깊은 침음과 함께 고아원장을 바라봤다.
이참에 아빠의 기를 죽이려던 걸 완전히 실패해서일까, 할머니의 안색이 점점 나빠졌다.
“나는 고아원장의 말을 듣고 판단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서류로 나와 있다니, 아무래도 그가 내게 거짓말을 한 것 같구나.”
끝까지 자신의 잘못은 없었다. 자신 또한 고아원장에게 이용당한 거라고 생각했고, 손사래를 치며 부정하기 급급했다.
“그것이, 그것이 제 탓이라기 보단 그러니까…….”
그 사이 아빠는 할머니가 보고 있던 서류를 고아원장에게 집어 던졌다.
“내일 당장 서류를 가져오도록. 이 일에 대해서는 최대한 조용히 넘어갈 테니.”
“…….”
“정식으로 고발당하고 싶나? 고아원장이라는 사람이 아이들을 학대하고 있었다고. 그러면서 후원금을 쳐 받았다고.”
아빠의 목소리가 점점 더 격양되었다. 그제야 고아원장은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바닥으로 숙였다.
“더 변명하고 싶으면 하도록. 들어는 줄 테니까.”
“…….”
“아이의 입에서 학대 받았다는 말이 나와야 정신을 차릴 건가?”
“아닙니다.”
결국 그는 포기한 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럼 당장 갔다 오도록.”
더 이상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원장은 아까보다 한층 더 어두워진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의 눈빛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원장은 한참이나 아빠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결국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할머니는 매우 불만스럽게 아빠를 바라봤다.
“이번엔 네 말이 맞았다. 레오칼.”
“다행입니다. 이번에도 인정해주지 않으실까 봐 걱정했는데.”
“그래. 하지만 레오칼. 남들 앞에서 이 어미를 그리 대해야만 했느냐?”
“…….”
“조용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를 이렇게 키우다니. 이 일로 남들이 얼마나 나를 무시하겠어. 가뜩이나 남편도 없이 자식에게 빌붙어 사는 주제에 아들에게 무시까지 당한다고!”
“…….”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말이 이럴 때 하는 말이구나 싶구나. 이 꼴 안 보려면 일찍 죽어야 하는 거였어.”
“어머니. 그만하세요.”
단호하면서도 감정 없이 내뱉는 말에 나도 할머니도 놀라 아빠를 쳐다봤다.
“그만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무엇을 그만하라는 것이지?”
“그런 말들로 사람의 심리를 어지럽히는 일이요. 이제야 제대로 보입니다. 어머니가 그 말을 하는 의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