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예상치 못한 말인지 할머니는 입만 어물거렸다.
“허허……. 마치 모든 게 내 탓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 같구나?”
“처음엔 제가 오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를 생각해주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곡해해서 듣는 거라고, 정말 순수한 의도로 말씀하시는 거라고. 하지만 이제야 알겠습니다.”
“무엇을! 내가 뭐 어찌했단 말이냐.”
“어머니가 정신적으로 계속해서 저를 지배해 왔다는 사실을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있다 보면 제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네가 제정신인 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이제는 막나가기로 마음 먹은 건지 할머니는 버럭 소리를 지르기에 이르렀다.
평소라면 주변 시선에 굉장히 신경 썼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도저히 분노를 참지못한 듯 할머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까 전처럼 쓰러지거나 비틀거리는 일 따윈 없었다.
누가 봐도 멀쩡해보인다.
아빠도 나와 같은 걸 느낀 건지 피식 웃으며 할머니를 바라봤다.
“이 어미를 얼마나 우습게보면 이 상황에서 그런 식으로 웃는단 말이냐!”
“아프시다는 분이 너무 멀쩡하게 일어나셔서 그렇습니다. 방금 전까지는 쓰러지실 듯 구시더니.”
그제야 아까와 다르단 걸 깨달은 듯 다시 안색이 파리하게 굳어졌다.
“그건……. 어, 어쨌든! 넌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시비를 걸고 싶은 모양이구나?”
“설마요.”
“그럼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이지?”
“이제는 정신차리려고 합니다. 이 가문이 어머니의 것인지, 제 것인지 구분이 잘 가지않아서요.”
“하? 누구의 것이 어디 있어. 후작가는-”
“완벽히 어머니의 것이 되었지요.”
할머니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지금…….”
“아니라고 할 수 있으실까요. 사실상 저를 후작으로 올린 것조차 어머니의 입맛에 맞게 계획해서 실행한 일 아니었습니까.”
“레오칼!”
“앞으론 그러지 않을 겁니다. 언제나 무슨 일이 벌어질 때마다 제 탓을 하시면서 제가 부족하고 모자라서 나쁜 일이 생긴 거라고 그러셨죠.”
“그건……. 네가 부족한 게 맞으니까!”
할머니는 분노를 잠재우려는 듯 크게 심호흡을 하며 아빠를 빤히 바라봤다.
“그래. 레오칼. 내가 종종 강압적으로 굴긴 했었지. 하지만 말이야. 그건 다 너를 위한 일이다. 이 어미만큼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지 않느냐.”
아빠는 황당한 말을 들었다는 듯 코웃음만 쳤다.
아빠는 어떤 말로 반박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잠시 침묵을 지켰다.
결국 이 상황을 더 지켜봤다가는 구역질이 날 것 같은 마음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데 왜 그래요. 할머니는?”
“뭐?”
“사랑하면 예뻐해주기도 모자라잖아요. 그런데 할머니는 맨날 아빠한테 나쁜말만 해…….”
“애, 애가 낄 자리가 아냐!”
“할머니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예뻐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아빠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아빠한테 그래요.”
“네 까짓게 뭘 안다고!”
“아무 것도 몰라도 사랑하는 사람한테 어떻게 해야 할진 알아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사랑한다는 말로 상대의 자존감을 깎는 행위는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다.
할머니와 정식으로 맞붙는 건 나중에 하려 했다. 아빠의 마음이 완벽하게 정리된 이후에.
그런데 할머니의 이런 행동들을 더는 용납할 수 없었다.
이만큼 했으면 된 거잖아! 얼마나 사람을 더 바닥으로 밀어붙이려고. 얼마나 더 자존심을 없애버리려고.
저건 아무리 봐도 사랑이 아니다.
“어린애가 별 말을 다하는구나. 딸이라고 데리고 있는 것이 저 따위로 나오니, 그동안 레오칼 네놈이 이 어미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확실히 알겠구나.”
“…….”
“그동안 나를 무시하고 우습게봤겠지. 그러니 애가 할머니한테 버릇없이 구는 게야!”
할머니의 호통에 아빠는 가만히 나를 내려다봤다. 그러다 마음을 굳힌 건지 할머니를 바라봤다.
“우습게 본 적도 없고, 딸아이에게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저렇게 나와?”
“저 어린아이가 그렇게 느낄 만큼 어머니가 절 그렇게 대했다는 증거겠죠.”
“레오칼!”
“이제야 확실히 알겠습니다.”
아빠의 눈에 굳은 심지가 어렸다. 하루아침에 사람이 변하진 않지만, 아빠는 확실히 변해가는 중이었다.
“레오칼!”
“네, 어머니.”
“…….”
“더 이상 저도, 제 딸도 무시당하는 일은 없게 할 겁니다. 저 고아원장 앞에서조차 저를 무시하려 하셨죠. 저는 앞으로 제 힘으로 후작가가 나아갈 길을 찾을 겁니다.”
“너, 마치 그 말은 나를…….”
“네. 어머니. 솔직히 다 큰 아들이 후작인데 어머니께서 이렇게 본채를 차지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할머니는 절망한 사람처럼 소파에 몸을 털썩 눕혔다.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봤지만 그런다고 해서 할머니의 상태가 나아질 리가 없었다.
“네가 나를 뒷방 늙은이를 만들 생각이로구나. 이 어미는 일찍 세상을 떠난 네 아비를 대신해 아등바등 너희들을 키웠는데……. 다 필요 없었어.”
할머니는 똑똑한 사람은 아니었다. 똑똑한 사람이 되기 위해선 이 자리를 지키고 싶다는 욕심이나 가지지 못한 것에 결핍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자리를 견고히 하기 위해 노력할 테니까.
하지만 할머니는 부족함이 없었다. 결혼 후 후작부인이 되었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이 가문이 할머니의 것이 되었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따랐다. 별 다른 노력 없이 가만히 있어도 이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아뇨. 어머니가 저와 형들을 키워주시느라 고생한 건 너무 잘 압니다. 그러니까 이제 내려놓으라는 말입니다.”
“레오칼.”
“조금 더 나쁘게 말하자면 이젠 뒤로 물러나주시죠. 어머니 탓에 후작가에서 제 입지가 작아졌으니까요.”
“하. 그래서 지금…….”
할머니가 우물쭈물 거릴 때마다 아빠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동안 어머니가 너무 과한 욕심을 부리셨습니다. 이번 일만 하더라도 집안의 제일 큰 어른으로서 반대할 순 있지만, 이 모든 건 가문의 주인인 제가 선택한 일이니 반대하실 순 없으실 겁니다.”
속 시원하게 할 말을 모두 뱉어낸 아빠가 나를 다시금 꽉 껴안았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이 가문에 남고 싶으시다면, 변하셔야 합니다. 혹여라도 이전과 같은 태도를 보이실 거라면 이곳을 떠나시면 그만입니다.”
“허. 나를 내쫓겠다?”
“그게 싫으시면 보통의 선대 귀족부인처럼 제발 가만히 계세요. 이만 가보도록 하죠.”
할머니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든 말든 아빠는 다 무시하며 밖으로 나갔다.
우리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할머니가 쓰려졌는지 시종들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지만, 아빠는 신경조차 쓰지않았다.
* * *
방으로 돌아오는 내내 아빠는 아무 말도 없었다. 일부러 말을 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나를 향해 웃어주거나 입을 여는 일따위도 없었다.
“아빠.”
상처가 많아 보이는 아빠의 볼을 쓰다듬었다.
“응?”
“괜찮은 거야? 할머니랑…….”
아빠가 이렇게 될 줄 알았기에 후회가 되기도 했다. 차라리 아빠가 조금 더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 고아원을 찾아갔어야 했나.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다.
“글쎄.”
“후회돼?”
“아니라고 하기엔 조금 그렇구나. 후회가 되는 부분은 분명히 있어.”
그 말에 난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아빠.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변화가 생긴대.”
“그래?”
“웅. 아빠는 정말 많이 변했어. 예전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들을 했으니까.”
아빠가 피식 웃었다.
“아마네트, 넌 마치 이런 일을 겪어본 사람처럼 말하는구나.”
“마, 말이 그렇단 거지!”
“그래. 그런데 네 말이 맞아. 예전이라면 이런 말들을 절대 하지 못했을 거야.”
“그래! 변화하려고 노력한 것만으로도 잘했어. 난 아빠가 너무 멋졌어. 이제는 아빠에게 맘껏 기댈 수 있을 것 같아!”
아빠는 살짝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이마를 콩하고 부딪히더니 부비적거렸다.
“네 응원히 큰 힘이 되는구나.”
“응! 그러니까 힘내!”
“그래.”
“이제 나뿐만 아니라, 여…….”
“여?”
‘여주’라고 말하려던 나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여, 여동생인지 언니인지 친구인지 모를 그 아이도 지켜줘야지!”
“그렇지.”
“이름은 어떻게 할 거야?”
“분명 갖고 있는 이름이 있을 텐데, 그 이름을 불러주고 싶진 않구나. 그곳에서 학대를 받은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아서.”
“그럼 새 이름을 지어주는 거야?”
아빠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낫겠어. 으음……. 엘리사. 엘리사는 어떨까. 애칭은 엘리로.”
어, 이게 아닌데. 여주인공의 이름이 바뀌었다.
그저 나의 행복을 위해 소설을 조금만 바꾸려고 했을 뿐인데 너무 중요한 게 바뀌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