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53)

48화

“엘리사. 엘리사는 어떨까. 애칭은 엘리로. 그런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구나.”

“분명 마음에 들 거야.”

잘은 모르겠지만 그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주는 어린 시절 자신의 이름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서류 상 이름이 분명 존재하는 건 맞다.

원래 여주의 이름은 켈리아나. 켈리라고 불려왔었으니까.

아주 조금만 삶을 바꾸려고 했었던 것뿐이었는데 이제는 모든 게 내 예상을 심하게 벗어나는 중이었다.

“그래. 아마네트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겠지?”

이 소설의 끝은 도대체 어떻게 될까 문득 궁금해졌다. 아빠를 변화시키고, 쌍둥이들을 정상적으로 성장하게 만들고, 여주를 보통의 가문에서 자라게 한다면 모두 행복해질까.

하지만 불안감은 이내 잠식되었다.

모두가 불행하게 짜인 각본 속에 놀아나는 인형들처럼 움직이는 것보단 이게 나아.

“아빠.”

“응?”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래.”

“갑자기 무슨 말이야?”

갑작스러운 내 말에 아빠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제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말에 아빠는 놀란 듯 격하게 반응했다.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어?”

“책에서. 나 요새 똑똑해지고 있잖아. 책을 많이 읽었거든.”

“그래?”

“그때 당시 최선의 선택을 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라고.”

“아…….”

“그러니까 아빠도 후회하지 말고, 괜찮을까 하는 의심도 하지 말고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해야 해.”

아빠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나도 책에서 본 거라 이게 맞는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맞는 말이야. 맞는 말이고 말고. 아마네트, 너는 마치 아빠의 여신 같구나.”

“여신?”

아빠는 그제야 밝게 미소 지었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을 지켜주는 신이 있다고 해. 나에게 그 신은 너인 것 같구나.”

“헤헤.”

“엄마가 보내준 신.”

아빠는 그제야 마음이 정리가 된 건지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어?”

평소엔 엄마에 대해 절대 말하지 않았던 아빠도 오늘이라면 다 얘기해줄 것만 같았다.

“궁금할 만하지. 엄마는 저 방안에 있는 아이와 다름없이 살았으니까…….”

아빠는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여주가 있는 방 안까지 단숨에 들어갔다. 그리고 날 침대 옆에 내려두었다.

“엘리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러게.”

“이 아이에게도 가족이 있었겠지.”

아빠는 천천히 여주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그 가족은 있으나 마나 한 자들이겠지. 안 찾는 게 나은.’

아빠가 엘리사의 가족을 찾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아이를 고아원에 버린 건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만, 아이가 이렇게 크도록 한 번도 찾지 않았다는 건 보통의 부모는 아닐 거야.”

그러게. 왜 항상 소설 속 주인공들은 불행해야만 하는 걸까. 행복했던 사람들의 결말은 언제나 불행과 죽음으로 끝나냔 말이야.

“그래서 이 아이가 원하지 않으면 부모도 찾아주지 않을 거야.”

“그래.”

“그래서 아마네트 네가 엄마에 대해 직접 묻기 전까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단다. 진실을 듣는 게 너에겐 상처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나 했는데…….

예상치 못한 아빠의 배려에 커다란 눈만 껌뻑거렸다.

“엄마에 대해한 이야기를 해주마.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야.”

“좋아! 그래도 듣고 싶어!”

“네 엄마는 말이야. 아마네트 너랑 비슷했어. 밝고 따뜻한 사람이었지.”

“우웅 그랬구나.”

“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모두 잃은 전쟁고아 출신인데도 말이지. 그런 엄마에게 아빠는 단숨에 빠져들었지.”

“엄마를 어떻게 만났어?”

종종 엄마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아빠는 슬픈 미소만 지을 뿐 더 이상 이야기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을 바꿨는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전쟁고아들은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단기 용역자리를 얻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엄마도 그렇게 얻은 일자리에서 아빠를 처음 만났다.

마치 지난 번 내 생일파티에 할머니가 데리고 왔던 그 여자처럼 엄마는 일손이 많이 필요한 파티의 임시 직원이었다. 평소 파티 따윈 잘 참석하지 않던 아빠가 할머니의 등살에 못 이겨서 나갔다가 엄마를 만났다고 한다.

운명처럼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결혼까지 약속했으나 할머니의 반대에 부딪혔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으로 일탈을 해봤어. 집을 나갔고, 네 엄마랑 작게 결혼식을 올리고 같이 살았었지. 너를 갖고 모든 게 행복했었어.”

당시를 회상하듯 아빠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몰랐어. 철이 없던 아빠는 네 엄마의 몸이 얼마나 안 좋은지 눈치 채지 못했어. 너를 갖고 막달이 되었을 때, 쓰러진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어. 혈혈단신으로 집을 나왔으니까.”

아빠의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갔다.

“할 수 있는 건 엄마를 데리고 할머니를 찾아가는 것 뿐이었지. 다시 돌아가는 대가로 의원의 진료를 보게 했지만, 이미 늦었어.”

“아…….”

“그래서 우리 아마네트가 엄마를 보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게 만든 거란다. 다 아빠 때문이야.”

모든 걸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아빠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아빠 탓도 엄마 탓도 아니고. 그냥……. 몰랐던 것뿐이잖아.”

“아마네트.”

“그래도 엄마는 나를 지키려고 한 거 아니야?”

아빠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엄마가 죽은 건 절대 네 탓이 아냐.”

“당연하지. 난 엄마한테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엄마도 분명 내가 미안해하지 않길 바랄 테니까.”

예상치 못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면 내 태도에 아빠의 표정도 서서히 변했다.

이래서 엄마 잡아먹고 태어난 애라면서 할머니 손주놈들이 난리를 친 거구만.

날이 갈수록 새로운 방법들로 나를 괴롭히던 손주놈들이 떠올랐다. 당시의 아빠는 그런 말들은 다 무시하라며 어떠한 말도 해주지 않았다.

“네가 나보다 낫구나. 아마네트.”

“그럼! 누구 딸인데! 원래 자식이 부모보다 더 잘난 법이래.”

“하하. 그래?”

“응! 그러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

아빠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우리 딸은 씩씩하구나.”

“응!”

“구원자님은…….”

그때였다.

아빠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쯤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허스키한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 방에는 아빠와 나, 그리고 여주까지 세 사람뿐이었으니까.

“일어났니?”

아빠는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시선을 급히 침대 쪽으로 옮겼다.

하지만 아빠의 물음에 여주는 어떤 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가?”

아빠가 다시 한번 대답을 재촉했지만,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빠의 말에는 절대 대답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처럼.

“아무래도 낯을 가리는 모양이구나.”

“그런가?”

“저어……. 구원자님.”

여주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꾹 다문 입을 열었다.

나? 아니, 내가 왜 구원자냐고. 거기서 구해준 건 아빠인데.

여주의 눈빛이 묘했다.

뒤통수가 굉장히 싸늘하다. 무언가 잘못된 선택한 기분이 든다. 왜 저렇게 볼을 붉혀가며 쑥스러워하냐고.

여주가 원래 저런 성격이었던가. 소설 속이나 과거의 여주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과 친해지는 성격인데. 그래서 쌍둥이들과도 친해졌었다.

“…….”

“저어…….”

내가 말없이 가만히 여주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눈빛을 반짝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원자님의 이름은 어떻게 되시나요?”

“나? 나는 아마네트! 그런데 내가 왜 구원자야?”

단순히 구해줘서 구원자라고 하는 건 아닌 듯 보였다.

여주는 생각지도 못한 답을 꺼냈다.

“신께서 저를 구원해줄 분이 찾아올 거라 했거든요!”

“신?”

여주가 신전으로 몸을 의탁해서 성녀가 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신의 목소리가 들렸다니.

자꾸만 내가 알고 있는 과거와 너무 많은 것이 달라지고 있다.

내가 죽고 시간이 돌아와서인지, 여주의 능력이 한층 업그레이드 되었다.

뭔가, 싸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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