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소설에 너무 많은 개입을 해서, 신이 그러지 말라고 내게 레드카드를 보내는 것인가. 아니면 원래 이게 맞는 건가.
왜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지 않을까.
“그래서 기다렸어요. 간절히. 그 문 너머로 말을 걸어주실 그분을요. 그리고……. 구원자님이 오신 거예요.”
순간 아무렇지 않게 미래를 이야기하는 여주를 보며 그런 생각도 들었다. 다른 소설들처럼 여주도 시간을 돌아온 게 아닐까?
그래서 미래에 자신을 구원해 줄, 물론 진짜 구원이 아니라 이용해 먹긴 했지만, 어찌되었든 그 존재 자체를 아는 건가.
도리어 나를 이용하려고 연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해맑은 여주의 눈동자는 거짓을 이야기하지 않는 듯했다.
정말 순수하게 신의 목소리가 들려서 기뻐하는 티가 역력했다.
‘내가 너무 소설을 많이 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거겠지?’
의심이 들긴 했지만 아무런 증거는 없었다. 난 마음을 다잡고 다시금 그녀와 눈을 맞췄다.
초롱초롱 눈빛을 빛내며 날 바라보는 여주를 향해 참다 참다 다시 물었다.
“신의 목소리가 들려?”
“네! 그리고 정말 오셨어요. 신의 뜻대로 구원자님께서…….”
마치 주인을 찾은 강아지처럼 구는 여주의 모습에 당혹스러웠다.
“어……. 그, 그래…….”
“이제 저를 데리고 도망쳐주세요.”
여주는 폭탄 발언을 던졌다.
“응?”
“신께서는 그러셨어요. 제가 이 나라에 계속 있으면 죽게 될 거라고. 악독한 악녀에 의해 죽을 거라고. 그러니 구원자님의 손을 잡고 떠나라고 하셨어요. 그러니 저를 살려주세요.”
악독한 악녀라는 말에 순간 혀를 깨물 뻔 했다.
‘그건 난데…….’
정말 신이라는 작자가 그런 쓸데없는 정보도 모두 알려준단 말인가.
‘정말 내가 겪은 그 시간들은 존재하는 시간들이었고, 신은 여주에게 다른 삶을 주기 위해 해답을 주는 걸까?’
솔직히 지난 삶에서 죽음을 맞이한 건 나뿐인데.
당혹스러운 여주의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아빠가 크게 놀랐는지 그녀를 급히 막으려 했다.
“잠깐…….”
하지만 세상에 오로지 나만 보이는 듯 그녀는 아빠의 말 따윈 무시했다.
“기다렸어요. 구원자님.”
애달프게 이야기하는 여주의 음성은 가슴을 울리게 만들었다.
이게 여주버프인 건가. 어쩐지 저 말을 따라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주의 편이 되어서 여주가 해달라는 걸 다 해줘야 할 것만 같은 기분.
“구원자님.”
“아마네트. 우선…….”
아빠는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건지 오히려 내 앞을 막아섰다.
“나는 바보가 아니야.”
“네?”
“응?”
“그리고 난 우리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가까이 다가온 아빠의 발치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이런 건 아빠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아빠의 눈동자가 조금은 흔들렸다.
“난 아빠랑 헤어질 생각은 조금도 없어. 게다가 내가 왜 너를 데리고 이곳에서 나가야 해?”
아, 아무래도 나는 또 틀렸나보다. 순간 욱해서 나도 모르게 굳은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여주랑 잘 지내보고자 마음먹고 여주도 구해왔는데. 이래서야 여주를 괴롭히던 과거와 다를 게 없잖아.
하지만 본능을 참을 수가 없다.
“네? 하지만 신께서…….”
“난 신의 말은 못 믿어. 그저 우연히 벌어진 일 가지고 의미부여하는 것도 더더욱.”
“아…….”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아빠가 여기 있는데, 너 말만 듣고 도망갈 리는 없잖아.”
툭 치면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여주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솔직히 내가 정말 못할 짓을 한 것 같아서 가슴이 아렸다.
과거에는 느끼지 못한 감정들이 느껴졌다. 아직 어려서인지, 아니면 여주에 대한 마음이 열려서인지 그 감정들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물론 매우 불편하단 느낌도 함께.
“그리고 너의 구원자는 내가 아니라 우리 아빠야.”
“…….”
“아빠가 아니었으면 난 그 문을 열지도 못했을 거야. 그리고 너를 이곳으로 데려와 입양을 추진해서 다시는 그곳으로 가지 않게 해준 것 또한 아빠인걸.”
그제야 여주의 시선이 느릿느릿 움직이며 아빠에게로 향했다.
내내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아빠 또한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거리며 웃었다.
“그, 그렇지? 내가 하자고 하긴 했지만…….”
“아…….”
여주의 눈동자에서 ‘이 사람이 내 구원자면 안 되는데’ 하는 듯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어쨌든! 너 이제 괜찮은 거지?”
“아……. 네.”
“그럼 나갈래.”
“가, 가신다구요?”
“응! 난 할 말 다 했고, 넌 멀쩡하다며.”
여주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자, 잠시만요. 이렇게 가시면…….”
“왜 안 돼?”
“안 되는 게 아니라……. 다, 다시 찾아오실 거죠?”
붙잡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 건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는 이제부터 나랑 가족이 될 거야! 그러니까 다시 찾아올게. 걱정 마!”
“아! 그런데 가족이라니…….”
“아빠가 우리 가족 만들어준댔어. 좋지?”
여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쁜 듯 웃는 모습에 다른 말을 더 하려던 난 몸을 휙 돌렸다.
“웅! 그럼 또 올게.”
“응!”
나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듯 여주는 여전히 나를 보며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담스럽네.’
무조건적인 호감이 부담스러워 급히 시선을 피하고선 밖으로 나왔다.
“또 오마.”
“……네.”
아빠의 말에 절대 대답하지 않을 것처럼 굴던 여주도 생각의 변화가 생긴 건지 작게 대답까지 했다.
“다행이로구나.”
나를 따라 밖으로 나온 아빠는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응?”
“사람을 거부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어서 말이야.”
“응! 이제 얼른 돌아가자!”
“그래……. 그런데 저 아이는 괜찮겠지.”
“응! 뭐……. 괜찮겠지.”
여전히 걱정이 많은 아빠의 손을 잡고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이제 막 여주와의 인연이 맺어졌을 뿐이니 더 지켜봐야겠다.
아직 할 일은 많다. 여주와 쌍둥이들 사이의 관계 회복도 시켜야 하고, 학대받은 아이들에 대한 인성교육도 시켜야 하고……. 바쁘네 바빠.
다른 생각을 하느라 아빠가 옆에서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 * *
다음 날. 오랜만에 만난 가족 모임이었지만 분위기는 사뭇 어두웠다.
할머니의 오빠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온 탓이었다.
힘들어할 줄 알았던 할머니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여전히 아빠와 날 볼 때마다 불편한 표정을 지어보이긴 했지만, 할머니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표정으로 다른 가족들에게 오라비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얼굴도 보지 못하고 떠나보냈구나.”
오빠의 죽음에 대한 말은 그게 전부였다.
“어머니께서 아프셨으니까요. 너무 슬퍼 마세요.”
베헬은 할머니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아무리 아프더라도 갔다 와야겠구나. 내 오라비의 장례식인데. 지금 가도 늦겠어.”
“어머니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어쩐 일로 큰아빠 베헬이 나섰다.
“네가?”
“그래도 장례식엔 참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어머니께서 가시면 좋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가시는 건 무리인 듯하니, 자식들 중 한 명이 대표로 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할머니는 어깨를 토닥이던 베헬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래. 그게 좋겠구나. 몸이 영 낫질 않아서.”
“네. 후작인 레오칼이 가야겠지만, 레오칼은 워낙 공사가 다망한 후작이니 그래도 덜 바쁜 제가 가는 게 낫겠지요.”
아빠를 노려보는 베헬의 시선을 느끼며 나도 그를 노려봤다.
이번에 가게 된다면 분명 그 아이를 데려오게 될 거고, 그럼 또 바뀔 게 분명했다.
이제 소설의 주인공들이 모두 모이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들뜬 마음과 불안한 마음이 동시에 가슴 속을 가득 채웠다.
“형님. 잘 부탁드립니다.”
평소라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을 아빠는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
“편안하게 가실 수 있게 잘 준비해놓으라 명하겠습니다.”
“정말 네놈이 바뀌긴 바뀐 모양이로구나?”
매우 불만스러운 표정의 베헬의 모습에도 아빠는 변화가 없었다.
“네.”
“하…….”
“그럼 제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하길 원하셨습니까?”
“네놈이 간다고 해야지! 준비해놓으라 명해? 네놈이 정말 뭐라도 되는 줄 아는구나!”
“뭐라도 되는 게 맞죠. 저는 후작이니까요. 형님.”
아빠의 말에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대로 말하는 게 좋겠군요. 이제부터 제대로 후작 노릇을 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