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마, 마치 우리가 그걸 못하게 한 것같이 말하는구나!”
“찔리는 게 있으시지 않나요?”
“찔리는 게 있을 리가 없지!”
뻔뻔할 정도로 목소리를 높이는 큰아빠의 말에 아빠는 코웃음을 쳤다.
“찔리는 게 있으셔야 할 텐데요. 사실상, 그동안 못하게 하신 게 맞지 않나요. 저를 허수아비처럼 두고 마음대로 하려 하지 않으셨습니까.”
큰아빠는 황당하다는 듯 입술만 바르르 떨었다.
“허. 지, 지금 내게 따지기라도 하는 것이냐?”
“물으시기에 대답한 것뿐입니다. 따지려고 했거든 이렇게 하지 않았겠죠.”
“레오칼!”
내내 두 사람을 바라보던 난 아빠의 손을 꼭 잡았다. 아직은 내가 나설 때가 아니다.
초석을 다 다진 후에는 내가 나설 거다. 그렇기에 입을 꾹 다문 채 아빠에게 무언의 응원 보냈다.
다행히 내 응원이 통한 건지 미세하게 떨리던 아빠의 손이 잠잠해졌다.
“소리 지르실 것 없습니다. 이제부터 저도 당하고만 있진 않을 겁니다. 이제 진실을 마주하려합니다.”
“허. 황당하구나. 황당해! 어머니랑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가만히 두셨지요. 사랑으로 한번 보듬어주시길 하셨습니까, 어딜 한번 데리고 나가주셨습니까.”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건지, 내내 냉정하던 아빠의 목소리가 조금씩 차가워졌다.
마치 가시에 찔린 것처럼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심장이 따끔따끔해질 정도였다.
“그건……! 네가 어릴 적부터 몸이 좋지 않아서 그랬지. 픽하면 쓰러지고!”
“그때는 그랬지요. 하지만 한번이라도 제대로 돌봐주셨다면, 마음속에 이리도 큰 상처가 남지 않았겠죠.”
“허튼소리. 돌보는 이가 수십인데, 뭘 돌봐달란 것이냐! 어린아이처럼 쨍쨍거리는 건 여전하구나!”
“네. 맞아요. 딱 한번 관심 가져달라 했던 그 행동 때문에 어머니와 형님들은 저를 비난하기 바빴죠. 그러니까 네놈이 그런 거라고. 그렇게 어린아이에게, 언제나 제 탓만 하셨죠.”
틀린 말은 아니었는지 큰아빠는 입만 벙긋거렸다.
아주 오랜 세월 정신적으로 학대를 당해온 이가 자신을 마주보는 건 죽음을 겪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자신이 살아온 모든 시간을 마주하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아빠는 지금 그걸 하고 있는 거다.
단 한번도 마주하지 않으려 했던 인생을, 잊고 싶은 과거들을 헤집고 헤집어 그 모든 악몽을 견뎌내고 있는 거다. 나를 위해. 우리의 미래를 위해.
“허. 피해망상에 찌든 놈이로구나.”
“맘대로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그런다 한들 제게 하셨던 일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런다 한들 바뀌는 건 없습니다. 허수아비든 뭐든 어머니께서 저를 후작으로 세우셨으니까요.”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던 할머니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네놈이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그 감정을 가감 없이 내비치던 할머니는 급히 진정시킨 건지 손을 내저었다.
“그만하거라. 요새는 가족들끼리 만나면 싸우는구나. 이게 가족인지, 원수인지.”
“어머니. 레오칼놈이 하는 말을 들어보십쇼. 우리 잘못이란 듯이 말하지 않습니까.”
“되었어. 말을 더 해봤자 저놈은 계속해서 우리를 저런 식으로 말할 테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어머니…….”
베헬은 못내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아빠를 보다가 콧방귀를 꼈다.
“어머니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니 더 할 말이 없군요.”
“하지만 키우던 개가 주인을 물려한다면, 나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아까보다 훨씬 여유로운 표정의 할머니를 보니, 그녀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빠를 후작위에서 끌어내리려는 거구나.’
확실하다.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여유로워진 건 그 탓일 거다.
할머니는 이후에 아빠를 후작위에서 내리기위한 밑작업을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황가에 정식적인 승인이 있어야 한다.
하나 다행인 건 할머니가 황가와 그리 친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네. 어떤 행동을 하든 기다리겠습니다.”
“그래.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 있나 보자. 너의 그 자리가 너 혼자가 만들어낸 자리가 아님을…….”
“압니다. 알기에 그동안 납작 엎드린 건데, 이제 그러지 않으려 합니다. 오늘 가족모임은 이대로 끝내도 되겠습니까. 할 말은 모두 전한 거 같아서 말이죠.”
“네놈이……. 어머니도 일어나지 않으셨는데!”
“이런 날도 있어야죠. 그럼 가자꾸나. 아마네트.”
“응!”
아까보다 아빠는 더 손을 꽉 잡았다.
“그곳에는 잘 다녀오십쇼. 형님.”
“…….”
“불편하신일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씀해주시구요. 물론 말한다 해도 제가 도와드릴게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오늘 내내 상황을 살피느라 한마디도 못했던 둘째 큰아빠나, 매번 실수하느라 찍소리도 못했던 손주놈들도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릴 뿐이었다.
피식 웃은 아빠는 그들의 모습을 잠시 훑다가 내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평소와 달리 방으로 돌아가는 아빠의 표정이 한결 후련해 보였다. 그런 아빠의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
“아빠.”
“응?”
“황제폐하는 어떤 분이셔?”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아빠는 조금 당황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분이냐면…….”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리 없었다. 누구보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자리를 온건하게 지키기 위해 이전의 황제들이 하지 않았던 공작가와 긴밀한 관계까지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쌍둥이 흑막들의 모친인 릴리가 황제의 배다른 동생이라는 것.’
욕심에 눈이 먼 릴리의 모친은 아무 남자나 다 만나고 다녔다. 미천한 가문 출신이었으나 한 번 보면 눈길이 갈만큼 화려한 외모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 덕분에 그녀에게 꽤 많은 사람들이 꼬여들었다.
그 중에 한 명이 선대 황제였다.
황제는 황후가 있고 자신의 자식들이 있음에도, 그녀에게 넘어갔고, 그녀는 황제의 아이를 낳게 된다. 물론 태어난 아이는 황제의 아이인지 의심을 할 정도로 황제와 닮지 않은 게 문제였지만.
‘그래서 황제는 그녀의 존재 자체를 감추게 되었지.’
때문에 릴리는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죽은 걸로 처리가 되어 버려진 황궁에서 키워지게 되었다.
그래서 릴리의 삐뚤게 자라게 되었다.
‘그것 때문에 자신의 배로 낳은 쌍둥이들을 그리 미워하게 된 걸지도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현 황제는 릴리의 오빠였고, 어디에도 딱히 성격이 묘사된 게 없었다.
“황제 폐하는, 굉장히 무서우신 분이시란다.”
“그래요?”
“응. 공과 사가 확실하신 분이고, 개인적으로 누군가와 친하게 지내는 걸 싫어하시는 분이시란다. 공적으로의 친함은 있어도 사적으로의 친함은 없는.”
아마도 그건 자신의 부친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딱히 언급되지 않았던 황제.
그런 그를 어떻게 하면 아빠와 친하게 만들 수 있을까.
황제에게 있어 아빠나 할머니는 별반 다를 것 없는 사람일 텐데.
“그러고보니 황제 폐하께서 요새 고민이 많아 보이시던데.”
“고민이요?”
“그래. 황제폐하께서는 굳건한 황권을 다지길 원하시는데 현재 제국은 황제파와 대공파 그리고 귀족파로 나뉘어져있으니……. 대공쪽을 흡수하고 싶은데 맘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야.”
“움…….”
“귀족의 힘도 너무 강해져버렸으니까.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그저 속에 있는 말을 친우에게 하는 것처럼 뱉어내던 아빠는 금세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내게 할 말이 아니라는 것처럼.
“우웅.”
“걱정 말거라. 네가 신경쓸거리는 아니야.”
이나 아빠. 지금 아빠가 한 말로 인해 우리에게 조금의 희망이 생긴지도 모르겠어요.
난 바닥을 보며 살짝 미소지었다. 황제와 대공간의 관계를, 아니 황권을 강하게만 만든다면 그는 분명 아빠의 편에 서줄 것이다.
서주지 않더라도 적어도 할머니가 주장하려는, 아빠가 후작에 마뜩치않은 자라는 것에 대해 반대하겠지.
“언제나 아빠가 널 피곤하게 하는 거 같아. 아빠는 그저 네가 평범한 아이로 사랑받으며 자라길 바랄 뿐인데.”
“응?”
“최근에……. 그래 쌍둥이들을 데려온 이후부터 무언가 잘못된 거 같구나.”
“아니야. 아빠. 잘 데려왔어. 아빠가 하는 것 중에 잘못된 거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
“하지만…….”
여전히 걱정하는 아빠를 향해 양팔을 쭉 펼쳤다. 안으라고 할 때마다 하는 행동임을 알기에 아빠는 날 안아 들었다.
“아마네트?”
그런 아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는 행복해질 거야.”
“응?”
“행복해질 거니까 의심하지 마. 쌍둥이 오빠들을 데려온 것도, 고아원에서 그 아이를 데려온 것도. 할머니에게 맞서야겠다 생각한 것도.”
아빠가 기가 죽어있으면 나도 기운이 없잖아.
솔직히 나도 너무 힘들어. 내가하는 이 행동들이 맞는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후회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거 같아.
바꾸려고 마음먹었으면 끝까지 해야지.
해보고 안 되면, 그래도 최선을 다했으니까 라고 하면 되니까.
“아마네트…….”
“자 그럼! 오늘은 그 아이들이랑 오빠들을 소개시켜줄래.”
“어?”
이제 미래를 바꿀 때야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