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또 다른 등장인물이 나오기 전에, 또 다른 무언가 변하기 전에.
“그래도 될까?”
당황해하던 아빠는 급하게 나와 눈을 마주쳤다.
“응! 안 될 게 어디 있어. 이제 우리는 모두 가족인데!”
“그렇지만……. 괜찮을지 모르겠구나. 엘리는……. 아니 엘리사는.”
다정하게 여주의 애칭을 말하려던 아빠는 급하게 손을 저었다.
“어쨌든 그 아이는 조금 불안한 상태인거 같아서.”
“그러니까 누구든지 만나야지. 그렇게 가만히 있는 것 보단 나을 거야. 또 알아? 세 사람이 되게 친하게 지낼지?”
운명으로 그들은 어찌어찌 잘 될 거니까.
우선 그쪽을 먼저 처리하고 나면 세상 마음이 편해질 것만 같다. 지난번 칼리스토와 베른하르트의 행동들이 영 신경 쓰이긴 했지만 말이다.
‘어차피 둘은 나와 상관없는걸.’
그 정도 했다고 설마 나를 슥삭 할 것도 아닐 테고. 지금이야 조금 미운 마음이 들었을지 몰라도, 앞으로 우리에게 시간은 많으니까.
‘죽이진 않겠지…….’
여러 생각들을 하던 나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걱정 마. 괜찮을거야.”
여전히 걱정하던 아빠는 내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한 걱정이겠지.”
“응. 아빠. 모든 건 다 잘 될 거야.”
“그래.”
“나 엘리한테 데려다 줘!”
이제는 더 이상 말릴 수 없다 생각한 건지 아빠는 그 상태 그대로 나를 데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아빠의 붉은 눈동자가 더 붉어보였다. 그걸 보며 문득 무언가 떠올랐다.
‘내가 잊고 있는 게 하나 있는 것 같은데…….’
과거에는 딱히 정치에 신경 쓸 일은 없었다. 굳이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저 하루하루 주어진 삶에 충실했다.
매일매일 놀고먹기에도 바빠서인지 딱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의 친정으로부터 데려올 그 여자애……. 분명 황제의 눈에 띄어 할머니의 애정을 듬뿍 받았었지. 어떻게 황제의 눈에 띄었더라.’
조금 후의 일이긴 하지만, 황제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할머니는 그 여자아이를 통해 황제와 어느 정도 친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특별한 무언가 있었던거 같은데. 도대체 그게 뭐지.’
“우리 따님. 무슨 생각을 하길래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 걸까?”
“아, 아냐…….”
“고민이 많아보여서.”
“그렇긴 해.”
아빠에게 내 고민을 말한다 해도 뭔가 해결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투정이 새어나왔다.
“그냥……. 황제 폐하에 대해 궁금해서.”
“황제 폐하가 어떤 분이실지 궁금한 거야? 그럼 한번 만나러 가볼까?”
“어?”
“우리 따님이 왜 이렇게까지 황제 폐하를 신경쓰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궁금해할 바에는 한번 만나 뵙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아빠의 제안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래도 되는 거야?”
“물론. 어차피 폐하를 한번 뵈러 갈 생각이긴 했거든.”
“나를 데려가면 난처해지지않을까?”
“그래도. 미리 말씀드리면 거부하시진 않으실 거야. 그러니 걱정 마렴.”
일단 만나게 되면 분명 뭔가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자신감이 들었다.
“응! 좋아!”
솔직히 아빠를 응원하고, 쌍둥이에게 잘해주고, 여주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 말고는 내가 해낸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최근 들어 내가 쓸모없는 인간은 아닐까 고민했다.
하지만, 난 살아야 한다.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
그 사이, 아빠는 엘리 방 앞에 나를 내려주었다.
“아빠는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응?”
“나를 많이 싫어하는 것 같아서.”
“처음이라 그런 걸 거야. 시간 지나면 분명히 알 거야. 아빠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경계할 필요 없는 사람이란 걸.”
“말이라도 고맙구나.”
나를 바닥에 내려준 아빠는 아주 작게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후부터는 혼자갈 수 있지?”
“응! 걱정 마! 여기가 다 내 집인데 뭐가 걱정이겠어!”
“그래. 그럼 아빠는 이만 가마. 저녁때 올게.”
바쁜 일이 있는지 아빠는 평소와 달리 빠르게 인사를 마친 후 떠났다.
가만히 아빠를 바라보던 난 뒤에 바짝 달라붙은 멜린지를 바라봤다.
“멜린지.”
“네. 아가씨.”
“간식은 오빠들 방으로 가져다줘.”
“거기 가서 드시려구요?”
“응! 왜. 별로야?”
“아뇨. 최근에 아가씨께서 거긴 가시지 않길래 여쭤 봤어요. 바로 준비해놓으라 할게요.”
“그런데, 오빠들 유모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거야?”
“아, 최근에 유모가 될 만한 이들을 찾고 계시긴 하나 봐요. 아마 내일이 되면 많은 이들이 면접을 보러 올 거랍니다.”
“좋았어.”
“그런데 아가씨 조금 이상하세요.”
보통의 시녀라면 절대 자신이 모시는 이에게 하지 않을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어냈다.
“응? 이상하다니?”
그러나 멜린지는 종종 그런 적이 많았던 지라 나도 별다른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아가씨 유모를 먼저 찾지 않고, 그분들 유모를 먼저 찾으셔서요.”
“아아. 나야 뭐 멜린지도 있고 신경 써줄 사람이 많으니까. 그럼 난 들어간다!”
멜린지가 또 다른 질문을 하기 전에 안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왔어요? 진짜 왔어요?”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이미 듣고 있었던 건지, 방문을 열자마자 여주가 강아지처럼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어……. 왔어. 그런데 왜 이러고 있어?”
“구원자님 목소리가 들리니까 못 견디겠어요!”
“나 구원자 아니라니까.”
“그렇게 부르는 게 싫으세요?”
“응.”
마치 강아지한테 먹을 걸 줬다 뺏은 기분이 들었지만, 난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냥 아마네트라고 불러줘.”
“아마네트…… 님.”
“님 말고, 아마네트! 나도 그래야 널 편하게 부를 거 아냐.”
“저를 편하게 불러주실 거예요?”
“응! 우리는 가족이니까!”
아주 잠시 여주의 눈동자가 굳어졌다.
“저희가…… 정말 가족이 되는 거예요? 저, 다시 안 돌아가도 괜찮아요?”
“응. 여기 있으면서 먹고 싶은 거 맘껏 먹고,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면서 그렇게 지내면 돼.”
“그래도 정말 괜찮은 거예요?”
“그래. 자. 그럼 오늘은 만날 사람들이 있어.”
“하지만…… 저는 아마네트님, 아니 아마네트랑 있고싶은데…….”
나는 여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안 돼. 난 바쁜 몸이야. 그러니까 빨리 가자.”
“아…….”
“사람을 무서워 하는것도 잘 알고, 누군가를 만나는 게 두려운 것도 잘 알아. 오랫동안 그곳에서 갇혀 지냈잖아.”
자리에 주저앉아 손을 잡을지 말지 고민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하는 행동들이 강요고, 널 힘들게 하는 걸지도 몰라. 하지만 한 발 더 나아가지 않으면 언제나 이 자리에 머물게 될 거야.”
“…….”
“그러니까 조금만 힘내보자. 네가 무서워하는 건 어른이잖아. 그렇지? 구원자니 뭐니 해도, 나를 볼 수 있었던 건, 아이는 두렵지 않지만 어른이 무서운 거잖아.”
비를 홀딱 맞은 강아지처럼 여주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니까 가자. 그쪽도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라…….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그럴까요?”
“응. 걱정 마. 내가 장담해. 분명 잘 어울릴 수 있을 거야. 같이 있으면 더 긍정적인 효과가 올 거야.”
그제야 마음이 조금 동한 건지 여주가 나를 바라봤다.
정말 볼 때마다 가만히 둘 수가 없다. 여주버프가 이런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마음이 자꾸만 흔들린다. 모질게 대하려다가도 자꾸만 덜 모질게 굴게 된다.
“그러니까, 그러고 있지 말고 가자.”
“우웅…….”
그제야 여주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내 손을 잡았다.
“그럼 가자.”
불안한 표정은 여전했지만, 아까보다는 걱정이 덜한 듯 여주는 내 옆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커다란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는 모습이 마치 토끼를 연상시킨다.
보호본능이 물씬 풍기는.
그 때문인지 나도 자꾸만 여주를 내 쪽으로 바짝 당겼다. 오빠들의 방에 당도하는 그 순간까지.
“바로 들어가자.”
“정말……. 괜찮은 거예요?”
오는 내내 시녀들도 시종들도 무서운 건지 네 옆에 바짝 붙어서 덜덜 떨던 여주는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응. 괜찮아. 가서 정 아니다 싶으면 그냥 나오면 돼.”
절대 그럴 리 없겠지만.
난 씩 웃으며 시종들이 열어주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나 왔어!”
이전처럼, 정말 지난번의 일이 없었던것처럼 밝게 인사를 건넸다.
역시나 베른하르트가 날선 목소리로 나를 향해 목소리를 뱉어냈다.
“웬일이야. 안 올 줄 알았는데.”
“내가 좀 바빴거든!”
“바빠?”
“어.”
평소라면 칼리스토가 먼저 나와서 내게 말을 걸어왔겠지만, 지난번 일 때문인지 칼리스토는 아예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일부러 무시하며 옆에 붙어있는 여주를 살짝 앞으로 당겼다.
“오늘은 친구를 소개해주려고 왔어.”
“그런 거 없이 와도 되는데.”
“다음에는 그런 거 없이 올게.”
“정말? 다시 올 거야?”
그 사이 화가 다 풀린 건지 베른하르트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자. 여기 봐봐. 요기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는, 엘리사. 애칭은 엘리.”
누군가와 함께 온 게 못마땅한지 베른하르트는 다시금 얼굴을 구겼지만, 여주를 마주한 그의 얼굴은 금세 바뀌기 시작했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