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95화
이럴 때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공작님께 가 볼까.”
에단의 얼굴을 떠올리니 불규칙하게 뛰던 심장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고 그 묵묵한 얼굴로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말해 준다면 정말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다정한 면이 있으니까, 공작님은.’
걸음을 옮기는 사라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그렇게 에단의 집무실에 다 와 갔을 때, 제이드가 막 에단의 집무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메이와 론다 그리고 베론은 그 앞에서 서로 마주 보며 무어라 속닥거리고 있었다.
사라가 다가가자 가장 먼저 그녀를 눈치챈 론다가 눈을 크게 뜨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아, 론다.”
“밀런 소백작님…….”
사라를 보는 론다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갑자기 눈을 마주치자마자 변하는 얼굴에 사라는 의아한 듯 반갑게 손을 들어 올린 채로 굳어 버렸다.
“응? 왜 그래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클로드 님은 주무시고 계시나요?”
“네. 제가 재우고 왔는데 무슨 일…….”
“제가 가 봐야겠습니다.”
론다는 어색하게 삐걱거리는 몸짓으로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잠시 사라의 눈치를 보던 메이도 재빨리 그녀의 뒤를 따랐다.
뒤를 돌아보니 둘 다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고 전속력으로 내달리는 것이 보였다.
마치 실연이라도 당한 것만 같은 모습에 당황한 사라가 베론을 보며 물었다.
“베론, 론다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
“큽. 흡. 저희는 모두 괜찮습니다.”
사라의 말에 베론은 무언가 울컥했는지 주먹으로 입을 막으며 시선을 피했다.
“……?”
“저희까지 신경 써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충분히 벅차실 텐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닙니다!”
베론은 고개를 내저으며 아무것도 없는 위를 쳐다보며 눈을 격하게 깜빡였다.
아니긴 무슨. 누가 봐도 이상한 행동들에 그녀는 마지막으로 제이드를 바라보았다.
“하퍼 경?”
“……밀런 소백작님.”
“네.”
“제가 정말……, 존경합니다.”
“갑자기요?”
제이드는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경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밀런 소백작님은 정말 이 암브로시아에 강림하신 여신…….”
“하퍼 경.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저와 함께 잠깐 가시죠.”
“어, 어! 잠깐!”
그런 제이드의 목덜미를 베론이 낚아채고는 질질 어디론가 끌고 갔다.
미처 말을 다 잇지 못한 제이드가 당황하며 버둥거렸다.
하지만 어디서 이런 초인적인 힘이 났는지 베론은 제이드의 반항을 단숨에 제압했다.
“……뭐야?”
결국 홀로 남겨진 사라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잠깐 클로드를 재우고 온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었다.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기울이던 사라는 결국 그 이유를 생각해 내지 못한 채 에단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공작님, 들어가도 될까요?”
집무실 안에선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바빠서 그녀의 목소리를 못 들은 건가 싶어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려는 찰나,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아…….”
분명 에단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찾아왔지만, 정작 무겁게 가라앉은 그의 얼굴을 마주하자 사라는 자신도 모르게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공작……!”
사라가 멍하니 그를 부르려던 찰나, 에단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곤 부드럽게 그녀를 안으로 잡아끌며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가두었다.
“……!”
순식간에 에단의 단단한 품에 안긴 사라는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등 뒤로 집무실의 문이 닫혔다.
조금씩 조금씩 뒷걸음질 치다 보니 벽이 등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벽과 에단의 사이에서 갇혀 버린 사라는 잠시 동안 눈을 깜빡이며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를 생각했다.
그녀를 끌어안은 에단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다들…….”
사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어보며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에단의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단단하고도 너른 등은 그녀가 한껏 손을 뻗어도 다 감쌀 수 없었다.
“사라.”
“네, 공작님.”
“약은 먹었습니까?”
“먹었어요.”
“몸 상태는?”
“아주 좋아요.”
그녀의 대답에 에단의 굳은 몸이 조금은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것도 사라에게 안 좋은 쪽으로 말이다.
올리븐이 흑마법을 연구하고 있었다는 것 말고 그녀가 놀라야 할 게 또 있을까.
에단이 그 무엇을 말하더라도 그녀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자, 이제 말해 봐요. 다들 여기서 무슨 얘기를 나눈 거예요?”
“…….”
사라의 말에 에단은 천천히 그녀를 제 품에서 놓아주었다.
따뜻하게 그녀를 감싸던 그의 체온이 사라지자 사라는 은근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 짧지 않나.
“저한테 말씀 안 해 주실 거예요? 그럼 서운한데.”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애써 제 아쉬운 마음을 포장하였다.
에단은 여전히 흔들리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사라.”
“네.”
막상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사라의 맑고 곧은 눈을 마주하니 온 마음이 흔들렸다.
‘당신이 암브로시아의 힘을 상대할 때마다 죽어 가는 걸 알아.’
입 밖으로 뱉으면 정말 사실이 될 것 같아 두려웠고, 뱉지 않아도 그의 속에서 썩어 들어갈 것을 알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아쉬운 쪽은 암브로시아였다. 그리고 이 관계에서 처절하게 패배할 이는 에단이었다.
처음으로 홀로 피어난 마음이라는 것이 남들처럼 깨끗하고 예쁘지 못해서 꺼내 놓을 수도 없었다.
“어느 날 눈을 뜨면 당신이 없을까 봐.”
“……?”
“나와 클로드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떠나갈까 봐.”
기적과도 같았다. 살아가는 나날 동안 평생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기적이었다.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나선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그와 클로드에게 깊숙하게 스며들었다.
어쩌면 처음 그녀가 그의 눈앞에서 쓰러졌을 때부터, 아니면 어지럽게 날뛰던 그의 속을 시원한 마력으로 진정시켜 줬을 때부터 그는 어렴풋하게 알았을지도 모른다.
돌이킬 수 없게 될 거라고.
“나는 그게 두렵습니다.”
“저는 계속 여기 있을 거예요. 클로드 님과 맹약도 나눴는걸요.”
“…….”
사라의 말에 에단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그런 의무가 아닌, 그런 이유가 아닌 자신은 그녀에게 이곳에 남을 이유가 되지 못하는 걸까.
“공작님의 이런 약한 모습은 그날 이후로 처음이네요.”
“아.”
새벽에 악몽을 꾸고 부엌에서 홀로 앉아 있던 에단의 얼굴이 사라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날도 이런 얼굴을 하고 계셨어요. 오늘처럼.”
그때는 그에게 악몽으로 남은 어머니가 저런 얼굴을 하게 만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에단에게 그런 상처를 주었던 어머니로부터 그를 지켜 주고 싶다고 생각했을 만큼.
그녀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았던 얼굴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얼굴을 하게 만든 사람이 나인 것 같네요. 제 말이 맞나요?”
방금 전 이상한 행동을 보였던 에단의 수족들과 조용히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메이를 보니 어렴풋하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라는 그런 쪽으로는 눈치가 좋은 편이었다.
에단이 클로드의 시녀인 메이를 집무실까지 불러내서 무언가를 물어봤다면 분명 그녀와 관련된 일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에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본 뒤로 그녀의 건강을 극도로 걱정하지 않았던가.
그의 머릿속에서 무슨 상상이 펼쳐졌는지는 몰라도 메이의 입을 통해 들었다면 그 상상은 확신이 됐을 것이다.
“메이가 공작님에게 어디까지 말했어요?
사라의 은밀하고도 달콤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이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