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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97화 (97/190)

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97화

사방에서 마물이 녹아내리며 지르는 비명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지겨워.”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올리븐은 제 주변에 소음을 차단하는 마법진을 그렸다.

그 안에 콕 박혀서 제게 뭐라 하는 카제르를 가볍게 무시했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깊은 상념에 잠겨 있다가, 스승이 자신에게 남긴 메시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끝까지 내게 큰 실망만을 안겨 주는구나.

지금이라도 네 잘못을 깨우치고 용서를 구하면 너는 내 제자로 남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못하겠다면 이제부터 나는 네게 세 번의 기회를 줄 거란다.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나는 그걸 충분히 막을 힘이 있거든.

올리븐 네가 내 마음을 세 번 저버리게 된다면 더 이상 스승이 아닌 마탑의 대장로로서 해야 할 일을 하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나는 정말 슬플 것 같구나.

정말, 정말 내가 많이 참고 있다는 걸 알아주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올리븐은 다시 무릎 사이로 고개를 처박았다.

“스승님은 변했어.”

그 힘을 연구했을 때부터 스승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자신의 몸조차 돌보지 않고 처절하게 매달리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마탑 밖에서의 생활을 중요하게 여기던 스승이 그 연구를 시작한 후로 연구실에만 꼬박 틀어박혀 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곁에 있는 건 좋았지만, 그럼에도 함께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이 연구가 끝나게 된다면 스승이 영영 어디론가 가 버릴 것만 같은 느낌에 올리븐은 내내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의 본능적인 감은 꽤나 좋은 편이라서 더욱 그랬다.

그리고 그의 감은 정말 딱 맞아떨어졌다.

“너무 다르잖아.”

그는 스승이 클로드를 바라보던 눈빛과 에단 암브로시아와 함께 있을 때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보는 스승의 얼굴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보석을 박아 넣은 듯한 눈동자는 예쁘게 빛났다.

그 눈동자 속에 비치는 암브로시아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올리븐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제 그는 스승의 삶에서 그저 한 명의 제자로서 일부분이 되었다고.

앞으로 그녀와 인생을 함께 만들어 나갈 암브로시아 공작과 공자와는 다르게.

“……스승님이 나빠.”

올리븐은 부글거리는 속을 끌어안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아이처럼 아직도 스승을 놓지 못하고 떼를 쓰고 있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정말, 정말 암브로시아 따위에게 스승을 빼앗기기 싫은 걸 어떡해.

“스승님이 암브로시아에게 힘을 쏟을 이유가 없어지면 되잖아.”

비뚤어진 애정이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는 것도 몰랐다.

스승은 언제나 그에게 자비로웠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스승님 곁에 아무도 없으면, 나만 있으면…….”

혼자 중얼거리던 올리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어차피 세 번은 봐주신다고 하셨으니까 조금은 더 어리광을 피워도 되지 않을까.

“……또 저렇게 웃네. 징그러운 자식.”

그런 올리븐을 바라보는 카제르의 얼굴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올리븐 따위는 필요 없었다.

오직 에단 암브로시아에게 당한 굴욕을 갚아 줄 수 있는, 그가 당연히 가졌어야 할 영광을 되찾아 줄 수 있는 자를 원했다.

“1황자님!”

그때 저 멀리서 알톤 영지의 장남인 파이튼 알톤이 불안을 감추지 못한 얼굴을 하고선 달려왔다.

그는 양옆에 올리븐이 데려온 마법사 둘을 끼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물들이 보일 때마다 몸을 움츠렸다.

“쯧.”

앞으로 대업을 함께해야 할 측근이 저런 나약한 상태라니.

카제르는 파이튼이 탐탁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이 천박한 시골 영지에서 가장 그의 비위를 맞출 줄 아는 자였으니까.

“무슨 일이냐.”

카제르는 다시 한번 힘을 써서 달려드는 마물을 처리하며 그 피를 뒤집어쓴 후에야 파이튼에게 물었다.

파이튼은 마물의 피를 아무렇지도 않게 뒤집어쓰는 1황자를 향해 토악질을 할 것만 같아 잠시 숨을 참으며 말했다.

“이, 이제 더 이상 아버지와 동생을 가둬 둘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

그게 대체 무슨 문제냐는 듯 되묻는 카제르의 말에 파이튼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카제르가 수상한 마법사에게서 받은 힘으로 무언가를 만들어야겠다며 끊임없이 실험을 빙자한 학살을 했다.

그래 놓고 그것을 버리지도 못하게 한 탓에 그의 방에 감춰 둔 마물들의 시체를 동생 파웰에게 들켜 버린 것이었다.

동생은 그 즉시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고, 1황자의 명에 따라 황제에게 전령을 보내려는 아버지와 동생을 잡아 가둔 지 벌써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럼 영주인 아버지가 부재중인데 영지가 멀쩡할까!’

영주인 아버지가 영지를 돌보지 않으니 행정부터 시작해서 알톤의 곳곳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카제르가 이렇게 학살을 일삼는 탓에 영지 내에 마물 출현이 훨씬 적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영주의 지시가 필요한 일들이 하루에 수십 건씩 발생했다.

“영지민들이 이제 슬슬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상인들까지 오고 가는 걸 막으니……, 그렇지 않아도 물자가 부족한 영지인데.”

파이튼의 말에 카제르는 별 시답지도 않은 걸 말한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깟 평민들의 불안 따위가 지금 무슨 상관이라고 저렇게 벌벌 떨고 있는 것인지.

카제르는 한심해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그까짓 것들의 눈치나 보니까 네놈이 여태 중앙에 진출하지 못했던 거야.”

카제르의 말에 파이튼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중앙 귀족으로 발돋움하는 것이 그의 평생의 숙원이었다.

변방에서 마물들이나 상대해야 하는 열악한 영지가 그의 발목을 잡고 질질 끌었지만 그는 노력했다.

중앙 정계에 진출한 귀족 자제들이 간다는 아카데미에서 온갖 무시와 모욕 속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어울리려고 빌빌 기었다.

게다가 아버지와 동생의 눈치에도 겨우겨우 돈을 얻어 틈만 나면 수도에 머무르려고 했다.

카제르의 말은 그런 파이튼의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눈치라니요! 제가 언제 눈치를 봤단 말입니까! 저는 그저 1황자님께서 걸어가시는 길에 방해가 될까 염려가 돼서……!”

“흠.”

이번에야말로 파이튼의 말은 별 볼 일 없기 짝이 없었으나 카제르의 마음에는 든 모양이었다.

그는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파이튼의 어깨를 꽉 잡았다.

“잡음 없이 처리하도록 해, 잡음 없이. 다른 귀족들은 반발하지 않던가?”

“1황자님의 힘을 한번 보더니 기가 팍 죽어서 아직도 덜덜 떨고 있습니다.”

“그래? 그것들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나 보군. 하하하하!”

알톤 영지에는 1황자와 함께 이곳으로 보내진 귀족들이 몇 있었다.

네이슨 자작을 포함한 그의 세력이었던 일부 귀족들 말이다.

그들 역시 1황자가 불길한 힘을 사용하는 것을 보곤 얌전히 영주 성에 갇혀 있었다.

다행히도 완전히 실각해 버린 1황자와 그를 따라 알톤 영지에 내려가게 된 귀족들을 신경 쓰는 자들은 없었다.

그렇기에 여태 큰 문제 없이 카제르는 일을 벌일 수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늙은 황제의 목을 치고, 이 형님의 것을 넘보는 건방진 동생들도 손봐야지, 응?”

카제르는 불안한 듯 흔들리는 눈을 하고 있는 파이튼을 달래려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그때 너를 잊을 것 같은가? 이 알톤 영지의 알톤 가문은 이제 크롬벨 제국의 공신 가문이 되는 거야. 내가 써 내려갈 새 역사의 공신.”

“……!”

“아, 그래. 내가 공작위를 약속하지. 크롬벨 제국 유일의 공작이 되어 보는 건 어때?”

카제르는 생각만 해도 기분 좋다는 듯 킬킬 웃었다.

찝찝한 감각을 감추지 못했던 파이튼의 어깨에도 약간의 기대감이 실렸다.

그의 아비와 동생이 본다면 땅을 치고 피눈물을 흘릴 광경이었다.

“쓸데없는 잡담은 그만해. 이제 시간이 없어. 곧 내 스승님께서 이리로 오실 거야.”

올리븐은 카제르와 파이튼에게 다가가 두 사람을 떼어 놓았다.

아주 그냥 버러지 같은 것들 둘이서 서로 격려하는 꼴을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네 스승이라니? 그게 누군데?”

“그걸 내가 알려 줘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올리븐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카제르의 물음을 흘려 넘기고는 말했다.

“이미 마탑에서 스승님께 내가 흑마법을 연구했다는 걸 알렸을 거야. 가만히 계실 리가 없어.”

그의 말에 파이튼의 양옆에 서 있던 마탑의 흑마법사들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대장로님이 아셨다면…… 곧!”

“그러니 우리는 더 꼭꼭 숨어야 해.”

“이 대륙에서 대장로님의 눈을 피할 곳은 없어!”

“……알아. 그래서 인질을 좀 잡아 볼 생각이야. 다행히도 우리 스승님께서는 이 제국과 인간을 사랑하시는 귀족이니까.”

올리븐의 말에 마탑의 흑마법사들은 무언가 감을 잡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알톤 영지 전체에 내가 연구했던 마법진을 구동해. 제아무리 스승님이라고 할지라도 쉽게 깨진 못하실 거야.”

* * *

어디서 누가 내 얘기를 하나.

사라는 코가 간질거리는 느낌에 고개를 뒤로 젖히다가 이내 크게 재채기를 했다.

“엣취!”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자 사라는 아차 싶어서 서둘러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암브로시아 저택의 모두가 눈을 번뜩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밀런 소백작님!”

“괜찮으십니까!”

“다친 곳은 없으세요?”

“약, 약을 가져오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쏟아지는 말들에 사라는 노이로제가 걸릴 것만 같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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