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02화
“어디 보자 내 아가, 얼마나 컸나 보자.”
페넬로아는 제 품에서 일렉사를 잠시 떼어 낸 후 이리저리 살피며 아이의 몸을 훑어보았다.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데, 그 순간들을 놓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슬퍼졌다.
함께하기 위해서 내린 선택이지만 갈수록 이것이 맞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수백 번씩 들곤 했다.
“내가 너를 이렇게 떼어 놓고……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눈물을 글썽이며 일렉사를 살피던 페넬로아의 눈에 그제야 저쪽 구석에서 조용히 그 둘을 지켜보고 있는 사라와 클로드가 들어왔다.
흠칫 놀란 페넬로아는 일렉사를 끌어당겨 안으며 말했다.
“저, 저 사람들은 누구…….”
“내 친구예요!”
“친구?”
일렉사의 설명에 페넬로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 저택에서 갇혀 지내는 아이에게 친구가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모인 크라시다 또한 일렉사에게 친구가 있다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클로드 암브로시아고 일렉사의 친구예요.”
클로드는 사라의 품에서 내려와 페넬로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또박또박 예의 바르게 자기소개를 하는 클로드의 모습을 사라가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암브로시아……? 에단 암브로시아 공작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클로드의 이름을 들은 페넬로아는 창백해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암브로시아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는 아주 상당했다.
본래 타국의 노예 출신이던 페넬로아가 암브로시아를 알고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우, 우리 일렉사랑 암브로시아 공자가 친구라니.”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의롭고 아름다우며 제국의 황제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권력자.
그런 암브로시아 공작의 아들이 일렉사와 인연이 있다니.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백금발……. 초상화에서 봤던 에단 암브로시아와 너무 닮았어.’
암브로시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저 백금발이 아니었더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멍하니 클로드의 얼굴을 보고 있던 페넬로아는 이내 퍼뜩 생각이 난 것처럼 황급히 입을 열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죠?”
페넬로아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 채 사라에게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경비가 삼엄할 뿐만 아니라, 감시당하고 있는 만큼 이곳에 들어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일렉사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는 이유만으로 기사들이 방 안으로 들이닥치지 않았는가.
“기사들은 왜 이럴 때…….”
지금 그녀가 이렇게 일렉사랑 대화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은 잠잠했다.
원래대로라면 일렉사가 그녀를 부른 순간 들이닥쳐선 끌고 나가야 하는 것이 맞았다.
충분히 경계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사라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건 제가 설명해 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그쪽은 누구죠?”
“안녕하세요, 페넬로아 님. 저는 사라 밀런이라고 합니다.”
사라의 이름을 들은 페넬로아는 미간을 좁히며 누구인지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3황자에게서 받은 정보로 공부한 귀족들 중 사라의 이름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6년 전에 칩거해서 이제야 막 활동을 다시 했기 때문이었다.
“밀런 백작가의 소가주이자, 클로드 님의 유모이기도 하지요.”
“아.”
페넬로아는 그제야 3황자에게서 얼핏 들었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크롬벨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결혼도 하지 않은 레이디가 소백작의 지위를 인정받았다고 했었나.
그 당시에 동경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었던 페넬로아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사라를 보았다.
“제가 일렉사 님을 모시고 페넬로아 님의 방으로 들어왔어요.”
사라는 두 손에서 마력을 일으켜 암브로시아를 상징하는 하얀 세계수와 밀런 백작가를 상징하는 자작나무를 허공에 그려 냈다.
그 신비로운 광경에 페넬로아는 두 눈을 부릅뜨며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마법사…….”
경악한 페넬로아의 목소리가 느리게 흘러나왔다.
동화 속, 혹은 호사가들의 입에서나 오르내리던 마법사가 지금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제국의 황제도 만나 보기 힘들다던 그 마법사가.
“방 안의 소리를 밖에선 듣지 못하도록 마법을 썼어요. 그러니 마음 놓고 소리를 지른다고 한들 기사들은 모를 거예요.”
“…….”
“제가 어떻게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아시겠지요?”
멍하니 입을 벌리는 페넬로아의 모습은 일렉사와 꼭 닮아 있었다.
그런 페넬로아에게 사라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여 보이며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사과했다.
“허락도 없이 이렇게 무작정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아, 그런, 아니, 아닙니다…….”
과하게 예를 차리는 사라의 모습에 페넬로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두 손을 내저었다.
그녀가 정말 밀런 소백작이고 마법사라면 페넬로아는 사라에게 함부로 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3황자의 연인이었지만, 크롬벨 제국에서는 평민 신분.
게다가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목덜미에는 노예 인장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페넬로아는 자신도 모르게 제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미간을 좁혔다.
“아뇨, 이건 제가 무례했던 게 맞아요. 귀부인의 침실에 이렇게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손님이라니. 그게 누구든 불쾌하실 거예요.”
“…….”
사라는 다시 한번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 모습을 본 페넬로아는 그녀가 진심으로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페넬로아는 정말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사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라는 이 저택에 있는 그 누구보다 고귀한 신분에 대륙의 모든 황족과 왕족들이 모셔 오고 싶어 안달이 난 마법사였다.
그런 사라가 그녀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상황이 굉장히 낯설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말 귀부인으로서 3황자의 반려로서 인정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 여자는 내 신분을 알고 있을까? 타국의 노예였다는 걸 알면 태도가 바뀌게 될까?’
페넬로아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암브로시아의 사람들에 비해 자신이 너무나 초라했다.
‘페넬로아, 이 저택은 너를 위한 거야. 이곳의 주인은 너고 네가 가장 고귀해. 그러니 제발, 스스로를 낮춰서 생각하지 마. 이곳에서 네가 말을 올려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네가 곧 나고, 내가 곧 너야. 아무리 노력해도 기가 죽으면 그걸 생각해. 너를 향한 모욕은 나를 향한 모욕이라는 거. 그리고 크롬벨 제국의 황자에게 모욕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거. 그걸 잊지 마.’
‘너는 내 평생의 반려야. 자신을 가져, 페넬로아.’
페넬로아는 의식적으로 연인인 3황자 일레온이 했던 말들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녀를 위한 저택이었지만, 일렉사의 유모인 크라시다를 포함한 다른 사용인들과 기사들은 은연중에 페넬로아를 낮잡아 보았다.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눈빛, 은근히 의견을 묵살하는 말투, 그녀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는 행동.
싫어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지금도 그녀는 마음대로 일렉사를 볼 수도, 일레온에게 말을 전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보호라는 명목으로 감시를 당하고 있음에도 항변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일레온의 발목을 붙잡고 싶지 않았으니까.
“제 신분을 아시면, 그런 말씀은 나오지 않을 거예요.”
“알고 있어요. 3황자님의 연인이라는 것도, 일렉사의 어머님이라는 것도 다 알고 있죠.”
“……!”
사라는 놀라 눈을 크게 뜨는 페넬로아를 보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크롬벨 제국을 포함한 이 대륙에 존재하는 국가들에는 강력한 신분제가 존재했다.
노예가 불법인 크롬벨 제국에서도 신분의 차이는 무척이나 강력했다.
심지어 타국의 노예로 살아온 페넬로아가 가지고 있을 고통을 사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박혜연의 기억이 있는 사라와는 달리 평생 그것을 당연시하면서 살아온 페넬로아였다.
사라가 옆에서 신분 따위는 상관없이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중해 준다고 해도, 페넬로아는 믿지 않을 것이다.
아마 평생 신분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겠지.
그것을 생각하면 씁쓸해져 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사라는 지금 이 순간 페넬로아가 가장 안심할 수 있는 말로 그녀를 위로했다.
“옛날의 신분은 버리세요. 페넬로아 님은 3황자님의 반려이고 장차 황실의 일원이 될 분이세요. 새로운 신분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계셔야 앞으로 일렉사 님을 지킬 수 있을 거예요.”
“……일렉사를.”
제 품에 안긴 일렉사를 바라보는 페넬로아의 눈이 조금은 더 단단해졌다.
아이를 지키려는 마음이 그녀를 조금씩 더 강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사라는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럼 이제 제 무례를 용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용서할게요. 일렉사를 볼 수 있게 해 주셨으니까요.”
조금은 홀가분해진 얼굴로 용서를 말하는 페넬로아와 눈을 맞추며 사라는 기분 좋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페넬로아는 일렉사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다가 이내 사라를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다 하세요.”
사라는 손을 내저으며 살갑게 말을 붙였다.
미래의 황후에게 좋은 점수를 얻은 듯했다.
“그리고 일렉사를 제게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오랫동안 아이의 얼굴을 못 봤거든요.”
“클로드 님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일렉사 님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겠다고 하지 뭐예요.”
사라는 깨알같이 클로드의 세심하고 따뜻한 배려심을 어필했다.
‘어둠의 꽃’에서는 대립각을 세우는 관계였지만, 일렉사와 친구가 된 이상 좋은 인연을 맺었으면 했다.
“암브로시아 공자, 신경 써 주어 고맙습니다.”
페넬로아는 사라의 앞에 서 있는 클로드에게 눈을 맞추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클로드는 쑥스러운지 손을 꼼지락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일렉사가 기뻐하니까 저도 좋아요.”
그 훈훈한 광경을 보고 사라는 웃으며 덧붙였다.
“오늘 제 무례는 아주 비싼 값으로 갚을 거예요. 일렉사 님을 모셔 온 건 그 값의 일부라고 생각해 주세요.”
“……?”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는 페넬로아를 보며 사라는 이 방 너머에 있는 크라시다 오를린의 존재를 떠올렸다.
클로드의 원만한 교우 관계를 위해 호랑이를 등에 업은 여우를 처리해 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