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03화
사라는 품에서 영상 수정구를 하나 꺼내 그 안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영상 수정구가 점차 투명해지더니 이내 그 모습을 감추었다.
“그건?”
“페넬로아 님과 일렉사 님이 서로 편하게 만나려면 방해가 되는 건 치워야죠.”
사라가 생긋 웃으며 말하자 페넬로아의 얼굴이 급격하게 밝아졌다.
그녀가 말하는 것이 크라시다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하지만 기뻐하던 것도 잠시, 페넬로아는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크라시다 오를린은 황후 폐하께서 특히나 아끼는 자매예요. 일레온도 깊게 신뢰하고 있고요.”
“그래서요?”
“제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에요.”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
사라는 페넬로아의 말을 곱씹어 보다가 이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3황자 전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죠?”
“……!”
“황후 폐하의 가장 아끼는 자매이자, 3황자님이 깊게 신뢰하는 크라시다 오를린이 이곳에 오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뭐죠?”
그 물음에 페넬로아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식으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사라는 조용히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크라시다 오를린은 오직 페넬로아 님과 일렉사 님을 위해 준비된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제 본분을 망각하고 당연히 해 주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데, 왜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하세요?”
페넬로아가 평생에 걸쳐 사람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3황자의 반려가 될 사람이었고, 크롬벨 제국의 황자가 될 일렉사의 어머니였다.
언제까지고 과거에 묶여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사라는 조금 더 강한 울림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제국에서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제외하곤 페넬로아 님께 하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세요. 그럼 더 편해지실 거예요.”
3황자가 페넬로아를 사랑하고, 그녀의 자식인 일렉사를 정식으로 황족으로 입적하려고 하는 이상 그녀는 이제 황족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아야 한다.
황후의 자매인 크라시다가 이곳에 와 있다는 것은 황후의 허락이 떨어졌다는 뜻.
제국의 황후가 인정하는 3황자의 연인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클로드 님에게 했던 말을 또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사라는 페넬로아를 보며 싱그럽게 웃어 주었다.
“이르세요.”
“네?”
“3황자 님에게 다 일러 버려요.”
옆에서 듣고 있던 클로드가 사라의 말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야무지게 끄덕였다.
아버지에게 이르면 다 된다. 아버지가 다 치워 준다.
클로드는 이제 그 말을 아주 맹신하고 있었다.
“맞아요. 나도 아버지한테 일렀더니 못된 형들을 쫓아내 줬어요.”
페넬로아는 멍하니 입을 벌리며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깔깔 웃었다.
“맞네요. 일레온에게 이르면 되는 걸…….”
“어머니, 그럼 우리 이제 유모를 쫓아낼 수 있는 거예요? 나 유모 싫어요.”
일렉사가 화색이 도는 얼굴로 물었다.
순식간에 밝아지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페넬로아는 크게 결심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우리 같이 못된 크라시다를 쫓아내자.”
페넬로아가 그간 크라시다가 저지른 만행을 이르기만 해도 유약하다는 평을 듣는 3황자도 입에서 불을 뿜게 될 거다.
“3황자 님께서 바쁘시다고 해도, 페넬로아 님과 일렉사 님에게 신경을 못 쓸 정도는 아니에요.”
사라는 그렇게 말하며 투명하게 변한 수정구를 페넬로아의 방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석에 걸어 두었다.
이것이 크라시다가 완벽하게 감추고 있는 이중적인 면모를 밝힐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영상 수정구를 놔뒀어요. 페넬로아 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크라시다의 속을 살살 긁어 주세요. 아셨죠?”
“그건 잘할 수 있어요. 그 여자는 내가 이름만 불러도 더러운 것이 묻는다는 것처럼 펄펄 뛰거든요.”
페넬로아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맺혔다.
몸이 좋지 않아 창백해졌던 피부에도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역시 그녀의 병은 크라시다가 일렉사를 못 만나게 할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부탁드릴 것이 하나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크라시다가 제가 병이 들었다고 주는 약이 있어요. 어쩐지 그걸 먹을 때마다 몸에 기운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조사해 주실 수 있을까요?”
페넬로아를 싫어하는 크라시다가 절대 고운 마음으로 약을 주진 않았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의심하는 건 싫었지만, 페넬로아는 일렉사를 위해 단호해지기로 했다.
“제게 맡겨 주세요. 그런 걸 잘 아는 제자가 하나 있거든요.”
사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페넬로아를 안심시키는 한편 아직도 코를 찌르는 약 냄새에 미간을 좁혔다.
만약 페넬로아가 먹는 약에도 크라시다가 손을 쓴 거라면 이건 한 번 골탕 먹이고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이건 제가 가져갈게요.”
사라는 페넬로아의 옆에 놓인 약병을 집어 들고는 품에 잘 넣어 두었다.
치료 마법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벨루나에게 가져다주면 약재들의 효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조만간 일렉사 님과 클로드 님이 편하게 교류할 수 있게 되겠네요.”
만약 크라시다가 물러나게 된다면 3황자는 그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다른 조력자를 찾으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사라는 3황자가 그녀를 찾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러려고 이토록 공을 들였지.’
페넬로아와 일렉사의 신뢰를 한 몸에 받게 된다면 3황자는 알아서 굴러 들어오게 될 테니까.
미래의 황제와 황후에게 줄을 댔으니 클로드의 앞날도 앞으로 평안할 것이다.
“좋은 소식 기대할게요. 일렉사 님은 밖으로 나가실 때 그 브로치를 쓰세요.”
사라는 그렇게 말하며 클로드를 안아 올렸다.
이제 돌아가 봐야 할 시간이었다. 도망치듯 나온 외출이었으니 길게 머무를 순 없었다.
클로드도 그것을 알고 일렉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안녕, 일렉사! 또 보자!”
“응, 클로드. 또 보자.”
아이들이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페넬로아 역시 사라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밀런 소백작님.”
“그냥 사라라고 편하게 불러 주세요, 페넬로아 님.”
눈을 찡긋해 보인 사라는 웃으며 손가락을 따악, 하고 튕겼다.
그러자 사라와 클로드의 모습이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
페넬로아는 사라가 마법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다시 한번 놀랍다는 듯이 경악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다.
“클로드는 좋겠다.”
그 모습을 보며 일렉사가 부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클로드의 유모는 착하고, 예쁘고, 그리고 멋있었다.
자신의 유모와는 다르게 말이다.
“……그러게. 암브로시아 공자는 아주 좋겠다.”
아이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며 페넬로아는 품 안의 자식을 꼭 끌어안았다.
사라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때 페넬로아는 있는 힘껏 제 자식을 지킬 생각이었다.
* * *
페넬로아의 방을 나선 사라와 클로드는 다시 일렉사의 저택 밖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클로드는 잠시 페넬로아의 방이 있는 쪽을 바라보다가 사라에게 말했다.
“유모, 일렉사의 유모는 진짜 나쁜 사람인 거 같아.”
“그쵸?”
사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저택 밖에서도 보이는 가장 큰 창을 보았다.
활짝 열린 창으로 크라시다의 모습이 보였다.
저곳이 바로 크라시다의 방이었는데, 페넬로아의 방보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장식들이 가득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크라시다가 저택의 주인인 줄 알 것이다.
“저렇게 한가하게 차를 마실 시간은 있으면서 3황자 전하께 연락할 시간은 없나 보네요.”
크라시다는 창을 열고 테라스에 있는 의자에 앉아 찻잔을 기울이며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흥.”
클로드는 불만스럽게 콧방귀를 뀌었다.
페넬로아는 아파 누워 있고, 일렉사는 펑펑 울고 있었는데.
크라시다는 저렇게 평안한 얼굴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니.
그 모습이 영 못마땅했다.
“잠깐 골탕 먹여 주고 갈까요?”
“어떻게?”
“이렇게요.”
사라가 클로드를 안고 있지 않은 손을 들어 마력을 불어 넣자 그녀의 손바닥 위로 시원한 바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무얼 하려고 하는지 눈치챈 클로드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서로 그렇게 마주 보며 씨익 웃은 두 사람은 이내 날 선 눈으로 크라시다를 보며 손에 모은 바람을 그녀에게 쏘아 보냈다.
“뭐, 뭐야! 아아악!!”
예고도 없이 갑자기 불어닥친 돌풍에 크라시다는 찻잔을 든 채로 뒤로 홀라당 넘어가 버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찻물을 뒤집어쓴 크라시다가 비명을 지르자 밖에 있던 기사들이 달려 들어왔다.
“크라시다 님!”
“무슨 일이십니까!”
평소 품위를 지키며 고고한 레이디의 정석을 보여 줬던 크라시다가 볼품없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것을 본 기사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크라시다는 창피함을 이기지 못하고 붉게 물든 얼굴로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갑자기 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바람 말입니까?”
기사들은 크라시다의 말에 창밖을 바라보았지만 얇은 레이스 커튼조차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밖은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크라시다가 뒤로 넘어갈 정도로 바람이 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뭐, 그러실 수 있지요.”
기사들은 크라시다가 민망함에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며 어색하게 뒤로 물러섰다.
“정말이에요, 정말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니까.”
“예, 그렇게 생각하겠습니다.”
크라시다가 답답하다는 듯 계속 변명했지만 기사들은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몸 관리를 해야 한다며 잔소리를 늘어놓고 나갔다.
여태까지 귀족으로서 작은 실수 하나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던 크라시다로서는 아주 끔찍한 상황이었다.
“아악!”
결국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내지르며 옷을 갈아입으러 방 안쪽으로 사라지는 크라시다를 보며 클로드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유모가 최고야.”
“그쵸?”
사라는 자신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주는 클로드에게 맑게 웃어 주고는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눈앞이 화악 하고 바뀌었다.
“……클로드 님, 밀런 소백작 님!”
갑자기 튀어나온 클로드와 사라를 보고 놀란 사용인들이 경악하며 다가왔다.
그중에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론다도 있었다.
사라는 잔소리를 들을 각오를 하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다녀왔어요.”
“피곤하진 않으세요? 괜찮으신 거예요?”
“그럼요. 겨우 이것 때문에 몸이 아프거나 그러진 않아요.”
“하…….”
사라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론다는 이내 비장한 얼굴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부터인가. 이제부터 잔소리의 시작인 건가, 하고 사라가 은근히 긴장할 때였다.
“죄송합니다, 밀런 소백작님.”
“……네?”
뜬금없이, 론다를 비롯한 사용인들이 사라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