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05화
* * *
방으로 들어간 사라는 잠들었을 거라는 베론의 말과는 달리 침대 머리맡에 비스듬하게 기대앉아 있는 에단을 볼 수 있었다.
에단의 얼굴을 살펴보니 베론과 론다가 말했던 것과 같았다.
약간은 창백한 듯한 안색과 살짝 좁혀진 미간, 그리고 굳게 다물린 입술에도 혈색이 모자란 듯했다.
피로가 가득한 얼굴에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잠들었나?’
천천히 조심스럽게 에단의 옆으로 다가간 사라는 침대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인기척이 느껴졌을 법도 한데, 에단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
확실히 평소와는 달리 약간은 흐트러진 듯한 그의 머리칼을 바라보다가 사라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머리카락을 정리해 줄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감고 있었던 에단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선명하게 빛나는 군청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헉!”
에단은 제게 뻗어진 손을 단숨에 잡아챘다.
크게 놀란 그녀는 숨을 급히 들이쉬며 손이 잡힌 채로 굳어 버렸다.
“사라……?”
에단은 사라의 얼굴을 확인하곤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생각보다 강하게 힘을 주었던 게 미안했는지 그는 사라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놀라서…….”
에단은 사라의 손을 놓아주었고 그녀는 황급히 제 손을 가져와 등 뒤로 감추었다.
어쩐지 그에게 잡혔던 손에 열기가 화끈거리며 남아 있는 듯했다.
“제가 혹시 깨웠나요?”
“아닙니다. 잠깐 생각에 잠겼었습니다. 오히려 내가 놀라게 했군요.”
“…….”
에단은 머리가 아픈지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미간을 좁혔다.
그 모습이 어쩐지 자신 탓인 것만 같아서 사라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처리할 일이 많은 에단에게 자신이 걱정을 보태 준 것만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죄송해요.”
“……?”
“오늘 말도 없이 가출해서요.”
“아.”
사라가 의기소침해져서 사과를 하자 에단은 작게 웃었다.
저렇게 기가 죽어 있는 모습은 또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런 그녀를 달랬다.
“사라가 사과할 필요가 없습니다. 답답하게 만든 내 쪽이 더 나빴으니까.”
“공작님…….”
“당신 제자들과 이미 다 이야기했습니다.”
“벤야민과 벨루나 말인가요?”
에단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벨루나와 벤야민은 에단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암브로시아의 힘을 연구하고 있었다.
가끔씩 에단은 그들의 연구를 위해 사라가 준 반지를 빼고 암브로시아의 힘을 사용하곤 했다.
‘공작님, 집중하셔야 합니다.’
‘조금만 더 끌어 올려 주세요. 이 정도로는 스승님께서 감당하시는 힘의 크기에 절반 정도밖에 미치지 못해요.’
벤야민과 벨루나와 함께 연구를 진행할 때마다 느껴지는 절망감은 언제나 묵직하게 그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해일처럼 덮치는 타오르는 갈증을 느낄 때마다 그는 자신이 인간이 아닌 괴물이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하는 선에서 힘을 조절하다 보니 신경은 언제나 날카롭게 서 있었다.
“암브로시아의 힘을 상대할 때만 제외하고 다른 마법을 사용하는 건 몸에 무리가 없다고 하더군요.”
사라가 피를 토한다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 그는 강박적으로 그녀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붉은 피를 뿌리며 그의 품 안으로 쓰러지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선연하게 그려졌다.
언젠가 자신이 사라를 그렇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가 끔찍해져 몸부림치고만 싶어졌다.
“오직 암브로시아만, 당신에게 좋지 않은 거겠지.”
에단의 입가에 아릿한 미소가 맺혔다. 씁쓸하게 읊조리는 듯한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는 벤야민과 벨루나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 * *
“갈수록 쇠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말씀드릴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스승님께서 그 힘을 잘 견딜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떠나서 피를 토하는 것은 스승님의 몸이니…….”
벤야민은 분하다는 듯 주먹을 꽉 쥐었고.
“지금 스승님의 몸이 얼마나 버텨 줄지는 모르겠어요. 스승님께서는 믿는 구석이 있다고 하셨고, 그것을 알고는 있지만. 배움이 부족해 저희로서는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벨루나는 불안감을 떨쳐 내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저 괜찮다는 사라의 말만 믿어야 한다는 소리인가?”
“지금으로서는 그렇습니다.”
사라의 제자들과 에단 사이에는 매번 이렇게 무거운 침묵이 흐를 때가 많았다.
각자의 생각은 달랐지만 원하는 것은 같았다.
사라가 그저 평온하게 그녀가 원하는 바를 이루었으면 좋겠다는 것.
“아직 포기하기엔 이릅니다. 암브로시아 공자가 발휘한 암브로시아의 힘은 오히려 스승님을 회복시켰지 않습니까.”
“그랬었지.”
그때 클로드에게 발현되었던 힘을 떠올린 에단은 복잡하게 꼬여 가는 속을 달래며 말했다.
“하지만 클로드는 안 돼. 그걸 확인하기 위해 암브로시아의 힘을 쓰게 만들 순 없어.”
“물론 저희도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벨루나는 귀엽고 뽀짝한 클로드를 떠올리며 손사래를 쳤다.
스승의 품에 안겨 있던 클로드를 떠올리는 그녀의 뺨에는 희미하게 붉은 기가 떠올라 있었다.
벨루나는 가끔씩 정원을 산책하거나 저택을 돌아다니는 클로드를 훔쳐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저런 얼굴을 했다.
작은 몸짓으로 뽈뽈 돌아다니는 게 귀엽다고 했던가.
그런 벨루나의 얼굴을 벤야민은 난생처음 본다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보았다.
‘……당돌한 게 봐 줄 만하긴 하다만.’
벤야민은 클로드가 그를 스승에게서 떼어 놓기 위해 그 순진한 얼굴로 과감한 수를 썼던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사라의 제자라는 이유로 클로드는 벤야민이 근처에 맴도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다른 꼬맹이들보다는 어른스럽긴 해.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그런 건가.’
클로드를 떠올리던 벤야민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가 느슨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도로 얼굴을 굳혔다.
그러다 벤야민은 한숨을 깊게 내쉬며 말했다.
“암브로시아 선조들이 남긴 기록 중 젊은 시절 가출을 했다가 돌아왔다는 가주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암브로시아의 힘을 받아들이지 못해 방황했다는 것 같습니다. 그자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뭔가가 나올 겁니다.”
“필요한 건 암브로시아에서 내어 줄 테니 뭐든 하도록 해.”
에단의 말에 벤야민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암브로시아가 뭐든 내어 준다는 말의 무게를 그는 요즘 실감하고 있었다.
마탑에서 연구를 했을 때도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아 본 적 없었다.
하지만 암브로시아 공작이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는 것은 아주 다른 느낌이었다.
평소에 어떤 것이 필요하면 먼저 어디서 구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암브로시아에는 이미 다 준비되어 있어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느낌 자체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고 할까.
“……감사합니다.”
그 모든 것들을 별거 아닌 것처럼 취급하는 에단 암브로시아를 보면서 벤야민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당장은 사라의 몸에 이상이 없다고 하니, 그녀가 조심해야 할 것은 오직 나 하나뿐이군.”
서늘하게 흘러나오는 에단의 목소리에는 스스로를 향한 짙은 혐오가 묻어 나오고 있어서, 벤야민과 벨루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 *
에단은 그가 가지고 있는 암브로시아의 힘이 사라를 해치는 것만큼이나 두려운 것이 있었다.
“그러니 사라는 평소대로 편안하게 머무르면 됩니다. 더는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그의 과보호 때문에 사라가 떠날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이 에단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두려웠다.
아까 그녀가 제 손아귀에서 손쉽게 벗어나는 것을 보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하루아침에 사라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
저주에 걸린 끔찍한 사내를 그 누가 좋아해 주겠는가.
에단이 믿을 것은 오직 클로드와 사라가 나누었던 맹약,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건 감사하지만…….”
사라는 어쩐지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에단을 살피며 말을 늘였다.
그는 평소처럼 정중했고,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아슬아슬해 보였다.
크고 단단하게 그녀를 지탱해 주었던 에단이 지금 거세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사라는 에단이 자신을 놓아 버릴 것 같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저는 암브로시아가 두렵지 않아요.”
“…….”
“저를 걱정해 주시는 것도 싫지 않았어요, 클로드 님과 닿고 싶었고, 나가서 놀고 싶었을 뿐이에요. 싫은 게 아니었어요.”
사라의 말에 에단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낮게 가라앉았던 그의 군청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공작님이 엄청 바쁠 텐데도 제 상태를 살피러 자주 와 주시는 것도……. 사실 좋았, 좋았었거든요.”
사라는 어쩐지 낯부끄러운 기분이 되어 말을 더듬었다.
사실 피곤하고 지칠 때 에단의 얼굴을 한 번만 보면 혈색이 돋고 기분이 좋아졌다.
무표정하게 가라앉았던 에단의 얼굴이 사라를 발견하는 순간 부드럽게 풀어지는 것이 좋았다.
가끔 그녀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는 것도 눈이 녹아내릴 것처럼 환상적이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은 얼굴을 시도 때도 없이 볼 수 있고 심지어 그녀만을 걱정해 주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절대 싫을 리가 없었다.
“얼굴이 복지다라는 말 아세요? 사용인들이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다들 공작님 얼굴이 장관이고 절경이고 영광이고 광영이라고…….”
“하.”
사라의 말에 에단의 입술 사이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