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06화
“아. 방금 웃었다, 그쵸.”
드디어 에단에게서 웃음을 끌어낸 사라의 얼굴이 환해졌다.
사라는 마치 따스한 햇살처럼 환히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에단은 가슴이 크게 술렁였다. 이내 심장이 기분 좋은 박동으로 뛰기 시작했다.
“……당신은 참 신기한 재주가 있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의식이 어두운 저편으로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던 에단이었다.
그러나 고작 사라의 몇 마디에 그는 지옥에서 끌어 올려진 사람처럼 헐떡이고 있었다.
에단은 느슨해진 입가를 매만지며 작게 웃었다.
그녀의 말에 명백하게 휘둘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달콤하게까지 느껴졌다.
“이제 조금 괜찮아지셨어요? 안색도 안 좋고, 기분도 안 좋아 보여서 걱정돼요.”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조금만 이렇게 쉬어 주면 괜찮을 겁니다.”
에단은 그렇게 말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사라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쉬이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그녀를 붙잡아 두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스스로가 놀랄 만큼 어둡고 질척한 감정이라 자제하지 않는다면 들켜 버리고 말 것이다.
“…….”
그때 눈을 감은 에단의 얼굴을 바라보던 사라가 팔을 뻗어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손바닥에 마력을 일으키자 시원한 기운이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맑아졌다.
“……사라.”
에단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고 사라를 보았다.
그와 눈을 맞추며 사라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이런 것뿐이라서요.”
“…….”
“앞으로는 제멋대로 굴지 않을게요.”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에단은 이내 사르르 눈을 접어 웃으며 사라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그리고 아직도 시원한 마력을 두르고 있는 손을 뺨으로 가져와 비비며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
윽, 하고 사라는 에단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심장에 가져다 댔다.
해로운 얼굴, 해로운 표정, 해로운 저 눈웃음.
심장에 해로운 에단 암브로시아!
잘생긴 게 죄라면 저 남자는 존재 자체가 유죄였다.
“제가 더 잘할게요…….”
사라는 결국 얼굴에 화끈하게 오르는 열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 앞으로 사라에게 오는 초대장을 제가 관리해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그렇게 하세요.”
“외출할 때는 저도 함께했으면 좋겠습니다.”
“공작님 없이는 절대 안 나갈게요.”
“산책도…… 제가 볼 수 있는 정원에서 자주 해 줬으면 합니다.”
“물론이에요!”
낮게 내리깔았던 시선을 올려 사라를 바라본 에단은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은근히 미소 지었다.
‘이런 쪽이 먹히는군.’
에단은 그렇게 사라를 학습했다.
* * *
페넬로아의 방.
사라가 두고 간 영상 수정구에서는 크라시다의 막말이 아주 선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이미 일레온은 수차례 보고 또다시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이제 핏발 선 눈으로 크라시다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외울 것처럼 영상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더러운 피가 어디 가겠습니까? 일렉사 님에게 그 피를 긁어낼 수 있다면 난 뭐든 할 겁니다. 아니, 솔직히 일렉사 님의 그 천박한 자태만 본다면 다른 씨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금발만 아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어디서 굴러먹었을지도 모르는 천박한 몸뚱이로 감히 일레온 전하를 유혹해…….]
페넬로아가 어떤 식으로 그녀를 긁어 놓았는지는 모르겠으나 크라시다는 속에 담겨 있던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 내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어. 어떻게 이모님이 내게 이러실 수가…….”
일레온은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했다.
황후가 2황자와 3황자를 출산한 뒤 그녀의 옆에서 그 누구보다 정성껏 그 둘을 돌봤던 크라시다였다.
그녀의 손에서 자라다시피 했던 일레온은 크라시다를 믿었던 만큼 밀려드는 배신감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렇게 한참 괴로워하던 그는 더듬거리는 손길로 페넬로아의 손을 잡았다.
“용서해 줘, 페넬로아.”
“일레온.”
“너와 일렉사가 이렇게 고통받는 줄도 모르고, 황위를 차지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어.”
떨리는 목소리에서는 깊은 자괴감과 괴로움이 뚝뚝 묻어 나왔다.
페넬로아는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도 자신과 일렉사를 더 걱정하는 일레온을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에 불안감을 느낀 일레온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내게 실망했어? 미워졌어?”
“…….”
“당장 이모님을 이곳에서 쫓아낼게. 저택을 지키던 기사들도 전부 다 처리할게.”
이제 일레온은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애처롭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제발 내게 화내지 마. 나를 선택한 걸 후회하지 마.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줘, 페넬로아.”
크롬벨 제국의 고귀한 황자가 한낱 노예였던 페넬로아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랑을 구걸했다.
페넬로아의 애정이 사라질까 잔뜩 겁을 집어먹은 일레온은 그녀의 앞에서만큼은 한없이 나약한 사내였다.
페넬로아는 일레온의 이런 면에 아주 약했다.
“일레온, 나 괜찮아.”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려움에 떠는 일레온을 달랬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역효과였다.
“세상에……! 페넬로아. 내가 얼마나 잘못한 거야? 그 정도로 화가 난 거야?”
“…….”
그는 부드럽고 상냥한 페넬로아가 낯설다는 것처럼 사색이 되어 더 벌벌 떨었다.
몸도 아프고, 크라시다 때문에 은근히 자신감도 많이 떨어진 탓에 페넬로아는 제 성질을 많이 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일레온이 처절하게 비는 꼴을 보고 있으니 속에서 열이 슬슬 올라왔다.
“사람 미치게 하지 말고 적당히 해, 일레온.”
“……페넬로아!”
서늘하게 흘러나오는 페넬로아의 목소리에 일레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생각해 보면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런 모습이었다.
혼자서 여행 다니는 걸 좋아하던 일레온은 신분을 감추고 돌아다녔던 탓에 종종 위험한 상황에 빠지곤 했다.
그때마다 그가 고용한 무능한 용병 때문에 노예였던 페넬로아가 일레온을 지켜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었다.
들짐승으로부터, 강도로부터, 때로는 마물로부터 피를 흠뻑 뒤집어쓰면서도 일레온을 지켰던 페넬로아에게 그는 반했다며 의뢰가 끝난 뒤에도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귀찮다고 욕설을 퍼붓고 미쳤냐고 걷어차기까지 했는데도 일레온은 꿋꿋했다. 용병단에게 막대한 거금을 빼앗기다시피 하면서 페넬로아를 빼내 주었다.
“변태 같은 자식. 꼭 내 입에서 이렇게 험한 말이 나와야 직성이 풀려?”
“응……. 이제야 내 여자답네.”
“하, 진짜 미친놈.”
“응, 나도 사랑해, 페넬로아. 용서해 줘서 고마워.”
일레온이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페넬로아는 이제야 겨우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사실은 조금 긴장했었다.
그녀는 겨우 노예에 불과했고 일레온의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내쳐질 수 있는 처지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크라시다는 조금이나마 일레온과 피가 섞인 혈육이었고, 외척이었다.
그런 크라시다에게 대항했을 때, 일레온이 정말 자신의 편을 들어줄지 페넬로아는 확신이 없었다.
“……나도 고마워.”
하지만 결국 연인을 믿지 못한 건 페넬로아였다.
일레온은 자신과 일렉사를 위해 뭐든지 다 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그녀가 그런 그를 의심했다.
그 사실이 미안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당연하게 그녀의 편이 되어 준 일레온에게 고마웠다.
‘밀런 소백작님이 아니었더라면…… 평생 그 의심 속에 갇혀 살았겠지.’
페넬로아는 그녀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던 사라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사라는 그녀에게 무례에 대한 빚을 갚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페넬로아가 사라에게 커다란 빚을 졌다.
그녀는 이 일을 결코 잊지 않고 반드시 은혜를 갚겠노라 결심했다.
먼저, 해야 할 일을 한 뒤에 말이다.
“그래서 그 망할 크라시다는 어떻게 처리할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