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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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황자 일리오르는 초조한 발걸음으로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천천히 가십시오.”
그의 부관이 힘겹게 따라오며 헐떡였지만 일리오르의 발걸음은 더더욱 빨라졌다.
“알톤 영지에 보낸 파견단은 연락이 없던가?”
“아직 상황 파악 중인 걸로 보입니다.”
“젠장.”
일리오르는 입술을 깨물고는 눈앞에 보이는 황제의 집무실을 노려보듯이 바라보았다.
일선에서 물러나 양위를 하겠노라 선언했던 황제가 다시 집무실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 말인즉 양위를 하겠다던 그의 말을 철회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1황자. 그 머저리 같은 자식 때문에 말이다.
“네이슨 자작은?”
“수도에 남아 있는 친인척조차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끝까지 쓸모없는 작자로군.”
일리오르는 짧게 혀를 찼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는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골랐다.
“어찌 됐든 내가 폐하보다 가지고 있는 정보가 더 많아야 할 거야.”
“물론입니다.”
“좋아.”
부관의 대답에 일리오르는 굳었던 얼굴을 펴며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황제의 서슬 퍼런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당장 카제르를 수도로 데려와! 당장!”
황제의 노성에는 초조함이 듬뿍 묻어 나왔다. 일리오르는 진땀을 빼고 있을 귀족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황제의 앞으로 나섰다.
“부르셨습니까.”
“오, 일리오르. 마침 잘 왔구나!”
황제는 이제야 화색이 도는 얼굴로 일리오르를 맞이했다.
일리오르는 웃는 낯으로 황제의 상태를 냉철하게 살폈다.
역시 예상한 대로 황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가 살아생전 인정하는 유일한 아들인 1황자 카제르 드 크롬벨의 신변이 위험하게 생겼는데 오죽하겠는가.
일리오르는 절로 샐쭉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소식은 들었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카제르 형님께서는 무사하시답니까?”
“무사하기는! 지금 카제르가 저 영지에서 어떤 꼴이 되었을지 누가 알고 있다더냐.”
황제는 그에게 아무런 대답조차 해 주지 못한 귀족들을 하나하나 노려보았다.
일리오르가 오기 전부터 한참 동안 황제에게 시달렸을 귀족들은 하나같이 영혼이 빠져나간 모습이었다.
“…….”
그중에는 1황자의 외척이자 죽은 전 황후의 아비인 벌룬 후작도 함께 있었다.
그는 1황자가 실각했을 때부터 가문의 문을 닫고 칩거를 했는데, 황제의 난리에 황궁으로 불려 온 모양이었다.
벌룬 후작은 그렇지 않아도 노쇠한 몸이 더욱 쇠약해졌는지 지친 얼굴로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일리오르는 흥분한 듯 얼굴을 붉히는 황제를 두고 벌룬 후작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벌룬 후작도 고생이 많습니다.”
“아닙니다, 고생이랄 것도 없지요.”
“상속자는……, 결국 찾지 않는 겁니까?”
“카제르 전하께서 건재하신데, 상속자를 미리 찾아 무얼 한단 말입니까.”
“아, 물론 그렇겠지요.”
일리오르는 속으로 비웃음을 삼키며 안타깝다는 듯 탄식했다.
벌룬 후작은 딱 보아도 황제와 비슷한 연배였다. 아니, 그것보다도 훨씬 더 노쇠한 것 같아 보였다.
지금 당장 침대에 누워 오늘내일할 작자가 또 하나 남은 핏줄의 일이라고 황궁까지 달려오다니.
황제도 그의 장인도 참 지독하다 싶었다.
‘죽은 황후가 대체 어떤 여자였길래.’
일리오르는 벌룬 후작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죽은 황후는 벌룬 후작이 성인이 채 되기도 전에 후작 부인과 사고 쳐서 낳은 딸이었다.
그로 인해 후작 부인은 물론이고 벌룬 후작까지 가문에서 파면당할 뻔하였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의 반대와 비난에도 지켜 온 딸이라 더욱 소중한 것일까.
벌룬 후작가를 이끌 다른 핏줄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는 첫째 딸이 남기고 간 1황자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자신의 손자 손녀로 인정하지 않았다.
마치 황제처럼 말이다.
그 여자와 엮인 남자들은 전부 다 저 모양이었다.
일리오르로서는 대체 어떤 여자인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카제르 형님께서 무사하셔야 벌룬 후작의 꿈이 이루어질 텐데요.”
“…….”
일리오르의 말에 벌룬 후작의 날카로운 눈이 그를 향했다.
“그 입, 조심하시는 것이 향후 2황자 전하께 이로울 것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후작.”
일리오르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후작을 지나쳐 황제에게 다가갔다.
벌룬 후작은 황위 계승에서 실각한 카제르가 자신의 뒤를 이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벌룬 후작가가 황족인 카제르의 후광을 등에 업고 대공가로 날아오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림도 없는 소릴.’
그는 카제르가 알톤 영지에 나타난 알 수 없는 장막 뒤에서 서서히 죽어 갔으면 했다.
그래야만 저렇게 아들 걱정으로 체면도 위엄도 잃고 날뛰는 황제의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이 아닌가.
“쓸모없는 것들! 카제르를 구해 올 방법을 찾기 전에는 얼씬도 하지 말거라!”
황제는 이제 노발대발하여 귀족들을 전부 쫓아내고 있었다.
그 성난 음성에 쫓겨나는 귀족들의 얼굴은 미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제 그들의 충심은 오롯이 황제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폐하의 혜안도 예전만 못하군.”
“그만큼 나이가 드신 것이지. 슬슬 물러나셔도 될 듯한데.”
“일리오르 전하를 한번 보게. 얼마나 냉철하신가.”
귀족들의 시선은 이성을 잃지 않고 덤덤하게 황제의 화를 받아 내는 일리오르에게 향했다.
권력이라는 것은 유효한 기간이라는 것이 있어서, 하나의 권력이 물러나야 할 때 떠오르는 사람이 그것을 움켜쥐게 된다.
“……이만 가지.”
“그래, 애먼 불똥이 여기까지 튀겠군.”
귀족들은 서둘러 황제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드디어 황제와 둘만 남겨진 일리오르는 힘겹게 절뚝이며 나가는 벌룬 후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황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알톤 영지에 생겨난 장막은 사람이 통과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정확히 마물의 숲의 절반까지 생겨났어요.”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중요한 건 그 안에서 카제르가 무사한지야.”
“……알톤 영지의 영지민들 또한 두려움에 떨고 있을 겁니다.”
일리오르는 황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을 언급했지만 이미 그의 머릿속은 못난 아들 생각으로 꽉 차 있는 것 같았다.
“암브로시아 공작을 데려와!”
“폐하, 그렇지 않아도 가장 먼저 그에게 연락해 두었습니다. 곧 입궁할 겁니다.”
“사라 밀런도 함께 대동하게 해.”
“……밀런 소백작 말입니까?”
“그래. 반드시 에단 암브로시아가 사라 밀런을 데려오도록 만들거라, 일리오르. 할 수 있겠느냐?”
황제의 눈이 새파랗게 빛나며 번뜩였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압박은 나이 든 노인에게선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 흥분해 날뛰던 황제는 이제 없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과 냉철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단 한 줌의 노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귀족들에게 한 행동은 그저 보여 주기 식에 불과했다는 것처럼 말이다.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일리오르는 목이 조여드는 기분에 미간을 좁히며 힘겹게 답했다.
“왜, 밀런 소백작을 찾으십니까.”
“그걸 내가 네게 말해 줄 이유는 없겠구나. 네가 내게 해 줄 말은 하나뿐이다.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올 수 있겠느냐.”
황제의 눈빛에 짓눌릴 것만 같은 기분에 일리오르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아직도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사라 밀런의 모습을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암브로시아 공작은 밀런 소백작의 건강이…….”
“이 제국에서 그 여자의 안부를 걱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리오르의 반항을 단호하게 잘라 낸 황제는 이제 그에게 더 이상 볼일이 남아 있지 않다는 양 손짓했다.
“일리오르 전하.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자 황실 기사단이 그에게 다가왔다.
일리오르는 이것이 황제가 그에게 내리는 축객령임을 알았다.
‘망할 늙은이.’
그는 그제야 자신이 황제에게 놀아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황제의 집무실에서 쫓겨나듯이 나온 일리오르에게 그의 부관이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빌어먹을 황제. 귀족들 앞에서 내가 무능하다는 꼴을 보여 주고 싶은 모양이야.”
“……전하를 신임하신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랬더라면 내게 더 중요한 일을 맡기셨겠지. 고작 암브로시아 공작과 밀런 소백작을 불러오는 일이 아니라.”
일리오르의 말에 부관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그는 방금 전 황제의 집무실을 빠져나오던 귀족들의 눈빛이 어느 정도 바뀌어 있는 것을 느꼈던 참이었다.
일리오르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
이번 사태에서 정당한 명분을 얻어 확고하게 자리 잡길 바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정작 황제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암브로시아 공작일 뿐이었다.
2황자인 그가 겨우 연락책에 불과한 일만 받았다고 한다면 귀족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무능을 떠올릴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리오르를 자연스럽게 배제하는 것이 황제가 원하는 것이었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의 생사가 달려 있는 와중에도 날 경계하시는군.”
주먹을 꽉 쥔 일리오르의 입술 사이로 씁쓸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번에야말로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었던 위기감이 찾아들었다.
“그래도 밀런 소백작을 만나게 될 명분을 얻어 냈으니…….”
일리오르는 사라의 얼굴을 떠올리며 지끈거리는 두통을 떨쳐 내려 애썼다.
“암브로시아 공작의 저택으로 가지.”
“직접 가시겠습니까?”
“에단 암브로시아가 황제와 이야기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를 만나야 해.”
황제가 맡긴 일은 에단 암브로시아와 사라 밀런을 데려오는 일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공작의 협상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적어도 황제가 원하는 것처럼 그의 무능을 부각시키는 일은 피할 수 있겠지.
‘그런데 밀런 소백작은 이번 일과 무슨 연관이 있기에 찾는 거지?’
일리오르는 사라 밀런에 대해 그가 더 알아볼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퍽, 나쁘지 않았다.
그는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부관에게 물었다.
“밀런 소백작에게 보낸 초대장에 답이 온 것이 있나?”
“……없습니다.”
“역시나 그렇겠지.”
나아졌던 기분이 금방 다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