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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109화 (109/190)

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09화

그렇게 바삐 걸어가던 일리오르는 저 멀리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3황자 일레온과 마주할 수 있었다.

“…….”

“…….”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두 형제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오랜만입니다, 일리오르 형님.”

“……그래.”

일리오르는 본능적으로 일레온 또한 이번에 알톤 영지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황제를 찾아가는 길이라는 걸 깨달았다.

황제에게 내놓을 패가 있으니 저렇게 찾아가는 것일 테지.

한때 우애 좋은 형제였던 일레온과 자신 사이에 황위 계승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생긴 이후로 미묘한 거리감이 생겼다.

일리오르는 그것이 못내 씁쓸했다.

“카제르 형님이 없어지고 나니 우리 둘의 관계도 예전 같지가 않구나.”

씁쓸함이 묻어나는 일리오르의 목소리에 일레온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는 이전과 같습니다, 형님.”

“일레온, 내 말은…….”

“알고 있습니다. 황위를 욕심낼 것 같지 않은 제가 이리 나서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것이겠지요.”

일레온의 말에 일리오르는 마치 들키기 싫었던 비밀을 들킨 것처럼 움찔, 몸을 떨었다.

그렇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카제르만 치운다면 황위는 당연히 그의 차지가 될 줄 알았다.

얌전히 여행만 다니고 책만 읽을 줄 알던 아우가 계승권을 주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당연히 일레온에게도 권리가 있으니 황위 계승권을 행사한다고 한들 그가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황위 계승에서 일레온의 존재를 아예 배제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을 때 일리오르는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것을 일레온이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듯 말을 하니 민망함에 굳게 닫힌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저 또한 만약 누군가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면, 카제르 형님이 아닌 일리오르 형님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

“적어도 형님은 내가 가진 것을 전부 빼앗아 가며 황위에 오를 사람이 아니니까요.”

일리오르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황위에 그리 욕심을 보이지 않는 일레온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공동의 적이었던 카제르를 몰아내고 난 뒤 각자의 세력들과 함께 서로 신경전을 벌이지 않았던가.

“너는 황위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황위는 제게 수단일 뿐입니다. 내가 가진 것들을 지키기 위한.”

“…….”

“형님께서는요? 형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황위를 탐하십니까?”

“그야 당연히…….”

일레온의 물음에 답하려던 일리오르의 얼굴이 순간 굳어지더니 이내 와락 일그러졌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왜, 황제가 되려 했을까.

“처음엔 그저 아버지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말이야.”

처음에는 정말 아버지가 인정하는 단 하나뿐인 아들이 황위에 오르는 꼴은 보기 싫다는 생각뿐이었다.

그와 동생이 오직 카제르 드 크롬벨이 통치하는 제국을 위해 쓰여야만 하는 도구처럼 취급당하는 것에는 이미 질릴 대로 질렸다.

일리오르는 언젠가부터 카제르가 아닌 자신이 황제가 되었을 때 무참히 일그러질 아비의 얼굴을 상상하며 희열을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카제르의 안위에 문제가 생기자마자 그 꼴을 보게 되다니 썩 유쾌하진 않군.”

일리오르는 조용히 미소 짓고 있는 일레온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준 뒤 그를 스쳐 지나갔다.

단 한 번도 고민해 보지 않은 문제를 이제 와 생각하기에는 그는 너무나 멀리 와 있었다.

“…….”

일레온은 그런 일리오르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내 걸음을 옮겼다.

* * *

사라는 의자에 앉아 반짝이는 눈으로 벨루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떠니?”

“……음.”

“벨루나, 네가 보기에도 그냥 평범한 약이니?”

벨루나는 은색 마력을 실처럼 뽑아 사라가 알아봐 달라고 했던 약의 성분을 분석하고 있었다.

약병에 찰랑이는 약물이 벨루나의 은색 마력을 따라 조금씩 신비로운 색으로 반짝이며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사라의 눈도 오르내리는 약물을 따라 위아래로 움직이며 반짝였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서 함께 눈을 빛내던 클로드도 호기심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벨루나 누나, 이거 나쁜 약이야?”

“……아직은 모릅니다.”

그런 두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벨루나는 미약하게 긴장으로 떨리는 손끝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사라가 클로드의 친구의 유모가 사용하는 약이라며 약병을 가져다준 뒤로 벨루나에겐 막중한 임무가 생겼다.

이 약병에 담긴 약물이 과연 멀쩡한 것인가 조사하는 일이었다.

“일단 확실한 건 이 약이 몸을 회복하기 위해 먹는 약은 아니라는 겁니다. 어떤 효과를 주는지는 더 알아봐야겠지만 독성이 있습니다.”

“……역시 그렇구나.”

벨루나의 말에 클로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럼 일렉사의 엄마를 그 무서운 유모가 해치려고 한 거야?”

“…….”

사라는 놀란 것처럼 보이는 클로드의 몸을 부드럽게 안아 들었다.

그리고 품에 안고 등을 토닥이며 잠시 동안 달래 주었다.

“정말 못된 사람이네요.”

“응, 진짜 나쁜 사람이다.”

클로드는 사라의 옷자락을 꽉 잡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일렉사의 유모처럼 무서운 사람이 자신의 유모가 됐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하니 소름이 끼쳤다.

그는 사라가 좋았다. 사라가 자신의 유모인 게 너무 좋았다.

그래서 클로드는 더욱 사라의 품으로 파고들어 갔다.

“일렉사가 불쌍해.”

“저희가 일렉사 님을 도울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사라는 제게 꼭 안겨 오는 클로드를 조금 더 단단하게 끌어안아 주었다.

그러면서 벨루나에게 조용히 눈짓했다. 그러자 허공에 사라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글자가 조용히 나타났다.

[클로드 님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는 게 좋겠구나.]

벨루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사라와 마찬가지로 마력을 사용해 글자를 만들어 보였다.

[생각보다 독성이 심각합니다. 지금은 미량이지만 조금만 양을 늘린다면 바로 의식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확실하니?]

[확실합니다. 약재의 종류도 곧 밝힐 수 있을 겁니다.]

[부탁할게, 벨루나. 네가 있어서 다행이구나.]

사라의 말에 굳었던 벨루나의 얼굴에 아주 희미하게 붉은 기운이 돌았다.

그때 마력으로 이루어진 글자로 대화를 나누는 사라와 벨루나를 저 멀리에서 지켜보고 있던 벤야민이 말했다.

“저도 해독 마법은 할 줄 압니다.”

벤야민은 클로드와 함께 있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그렇기에 저 멀리서 큰 소리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그게 필요한 게 아니란다, 벤야민.”

사라가 상냥하지만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밝히자 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약간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려던 벤야민은 사라의 품에 안겨 자신을 보고 있던 클로드와 눈을 마주했다.

“흥.”

클로드는 새침한 얼굴을 하고선 그와 눈이 마주치자 혀를 날름 내밀었다.

“하.”

마치 약이라도 올리는 것처럼 구는 클로드의 모습에 벤야민은 헛웃음을 삼켰다.

클로드가 없다면 그는 스승의 곁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클로드와 스승이 떨어져 있을 때는 거의 없었고, 벤야민은 이렇게 늘 멀찍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 꼬맹이도 그것을 알고 매번 저렇게 그를 약 올리곤 했다.

‘저 꼬맹이, 벨루나는 그럭저럭 좋아하는 것 같은데.’

클로드는 대체로 스승의 제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벨루나는 조금 좋아했다.

벨루나가 작고 귀여운 것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가끔 클로드가 자그마한 손으로 벨루나의 옷자락을 잡을 때면 그녀는 뻣뻣하게 굳어 버리곤 했다.

클로드는 그것을 좀 즐기는 듯했다.

‘……나는 싫어하면서 말이야.’

그의 첫인상이 좋지 않았기 때문일까.

클로드는 벤야민만 온 힘을 다해서 경계했다.

스승에게 틈만 나면 벤야민이 무섭네, 자길 노려보았네, 하면서 말이다.

사실 벤야민에게 저렇게 혀를 내밀며 약 올릴 정도면 이젠 그가 무섭지 않은 게 확실했다.

“진심으로 겁에 질리는 것보다는 낫지만.”

벤야민은 자신의 앞에서 벌벌 떨면서도 스승의 앞을 막아섰던 클로드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말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클로드의 말에 벤야민은 그 수고로움을 덜 수 있었다.

“유모, 저 아저씨 웃는 게 무서워.”

“벤야민, 두 걸음만 더 뒤로 가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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