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10화
벤야민은 결국 어쩔 수 없이 뒤로 두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맹랑한 꼬맹이 같으니라고.’
스승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얼굴이 달라지는 클로드를 보며 벤야민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아이의 속은 훤히 다 들여다보일 듯하면서도 보이지 않았다.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는 아쉬움에 혀를 차며 그간 암브로시아에서 지내는 동안 클로드와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 * *
벤야민과 벨루나는 암브로시아 공작의 눈 밖에 나는 일을 최대한 만들지 않기 위해 몸을 사렸다.
암브로시아 공작이 자비를 베풀어 주어 스승과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당연했다.
그런 벤야민과 벨루나를 경계하던 클로드였지만, 사라가 아닌 다른 마법사들이 궁금했는지 아이는 종종 그들을 찾아왔다.
벨루나는 연구에 집중하려고 최대한 애쓰는 모습을 보이며 그에게 물었다.
“오늘은 클로드 님이 얼마나 더 가까이 왔지?”
“세 걸음.”
처음 그들을 찾아왔던 클로드는 멀찍이 떨어져 표정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거리를 유지한 채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어느 날은 짓고 있는 표정이 보였고, 옷의 장식이 보였고, 또 어느 날은 조금씩 씰룩이는 아이의 입매까지 보였다.
클로드가 자신들을 찾아와 지켜볼 때마다 점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벨루나는 그런 클로드가 귀여웠는지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언제쯤 말을 걸어 주실까?”
“관둬. 스승님께서 돌보시는 아이에 네가 관심을 줘서 뭐 하려고?”
“스승님께서 돌보니까 더 특별한 거야. 지금 푹 빠져 계시는 거 안 보여?”
벨루나는 조용히 벤야민을 타박하고는 저 멀리서 장식장에 몸을 숨긴 채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는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붉은 혈색이 돌았다.
“왜 스승님께서 그토록 아끼시는지 알 것 같아.”
“흥.”
멍하니 중얼거리는 벨루나의 목소리에 벤야민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벨루나야 귀여워한다지만, 그는 어린아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툭하면 울고 치대고 지켜 줘야만 하고. 그가 살아온 세상에서 어린아이는 그저 짐 덩어리에 불과했다.
목숨이 수도 없이 오고 가는 전쟁터에선 말이다.
“저렇게 겁이 많아서야. 스승님께서 신경 쓰실 것이 한두 개가 아니겠어.”
벤야민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연구에 집중했다.
암브로시아의 지원을 받아 그 힘에 관해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새로운 것들이 자꾸만 발견됐다.
어째서 역대 암브로시아 공작들이 힘을 키우는 것에 집착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저 꼬맹이의 힘도 연구할 수 있다면 더 수월할 텐데.”
“그건 스승님께서 절대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
“알아. 그냥 해 본 소리야.”
벤야민은 단호하게 그의 말을 잘라 내는 벨루나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물론 올리븐이라면 주저 없이 저 꼬맹이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겠지만.
그는 그 정도까지 미쳐 있진 않았다.
‘올리븐 녀석, 슬슬 사고 칠 때가 됐는데. 이렇게 잠잠할 리 없어.’
벤야민은 마침 떠오른 올리븐의 생각으로 얼굴을 굳혔다.
저택을 나간 올리븐은 마력의 흔적조차 지운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스승은 무엇인가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벤야민에게 말해 주진 않았다.
하지만 스승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으로 그는 올리븐이 심상치 않은 짓을 저지르려 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벤야민, 벤야민.”
그때 그를 다급하게 부르는 벨루나의 목소리에 벤야민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왜.”
“클로드 님이!”
“그 꼬맹이가 뭐…….”
벨루나의 호들갑에 고개를 든 그는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아이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클로드는 맑고 투명한 눈을 들어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스승에게 무섭다며 난리를 쳤던 것치고는 꽤 당돌한 시선이었다.
“…….”
“…….”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서로가 서로를 뚫어져라 보는 상황이 계속됐다.
그러다가 클로드가 그 작은 입술 사이로 한숨을 휴, 하고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나 꼬맹이 아니야. 클로드야.”
“……뭐?”
“아저씨 바보야? 내 이름이 클로드라고. 클로드 암브로시아.”
“그거야 알고 있는데.”
“알면서 왜 꼬맹이라고 해?”
“넌 꼬맹이니까.”
덤덤하게 흘러나오는 벤야민의 대답에 클로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이는 잠시 주먹을 꽉 쥐더니 이내 다부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 꼬맹이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지.”
벤야민은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유모는 내가 장차 암브로시아를 이을 큰 사람이라고 했어. 그러니까 꼬맹이 아니야, 바보 아저씨.”
“장차 큰 사람이 될 거라는 거지, 지금 큰다는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유모한테 가서 물어볼래?”
“…….”
저게 진짜. 그가 사라에게 꿈쩍도 못 한다는 걸 다 알고 저렇게 말하는 클로드를 보며 벤야민은 결국 졌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앞으로 이름을 불러 주마.”
“됐어. 별로 아저씨한테 이름 불리기 싫어.”
“……하.”
벤야민의 입에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어린아이의 농간에 그가 휘둘린 것이다.
그에게 한 방 먹였다고 생각했는지 클로드의 입가에는 승리의 미소가 떠올랐다.
“내 이름은 벤야민이다, 꼬맹아. 아저씨가 아니라.”
“알아. 유모가 말해 줬어.”
“근데 너는 왜 내 이름을 안 불러 주는 거지?”
“아저씨 바보구나? 내가 아저씨를 싫어하니까 그렇지.”
클로드는 새침한 얼굴로 그렇게 말한 뒤 몸을 돌렸다.
아이의 목적은 벤야민의 속을 무참히 긁어 놓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아하하, 네 꼴이 좀 볼만해졌네.”
그 대화를 듣고 있던 벨루나가 웃으며 벤야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클로드에게 미움받지 않는 스승의 유일한 제자로서 벨루나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웃던 벨루나는 클로드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제가 밖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응.”
클로드는 제게 내밀어지는 벨루나의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아직 손을 잡기에는 낯을 가리는 것이다.
“…….”
벨루나는 클로드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쪽 팔을 들어 올려 손으로 입을 막았다.
정말, 아이가 귀엽다고 난리를 치는 스승의 기분을 맛본 것 같았다.
“하. 벨루나까지…….”
그렇게 홀로 연구실에 남겨진 벤야민은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탑에 있을 때보다 느슨하게 풀린 벨루나의 분위기도, 아이의 앞에서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는 스승도. 전부 다 적응이 안 됐다.
무엇보다 적응이 안 되는 것은, 스스로였지만.
“겁 없는 꼬맹이.”
저렇게 또박또박 그의 앞에서 기죽지 않은 채 제 할 말을 다 하는 클로드가 썩 마음에 든다는 것이.
그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나도 조만간 저 꼴이 되겠군.’
그것만은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벤야민은 그 뒤로도 종종 연구실을 찾아오는 클로드를 기다리게 되었다.
어느 날은 홀로 찾아오기도 하고 어느 날은 스승과 함께 오기도 했지만.
클로드가 홀로 찾아왔을 때는 어김없이 벤야민과 투닥투닥거리기 일쑤였고, 승리는 언제나 어린 클로드의 차지였다.
* * *
그때 에단이 제이드와 함께 연구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라? 여기 있습니까?”
사라를 찾는 목소리에 그녀는 약병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정식 예복을 갖춰 입은 에단이 연구실로 들어서자 어두웠던 실내에 환한 빛이 들어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사용인들은 에단이 저렇게 예복을 입은 모습은 화가를 불러 초상화를 남겨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는데, 그 의견을 사라는 적극 지지했다.
“아, 공작님, 저 여기 있어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에단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에단을 발견한 클로드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클로드는 사라의 품에서 내려와 그에게 쪼르르 달려가며 두 팔을 뻗었다.
에단은 자연스럽게 그런 아이를 안아 들었고 클로드 또한 편안하게 그의 품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던 사라 또한 에단의 앞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황궁에서 사람이 왔다고 하던데. 지금 응접실에 계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아, 사라가 함께 가 주었으면 해서 왔습니다.”
에단은 천천히 연구실을 훑어보았다.
그의 진득한 시선이 벨루나에게 닿았다가 이내 저 멀리 더 뒤로 물러설 곳 없는 구석에 박혀 있는 벤야민에게로 향했다.
“…….”
그 모습만 봐도 어떤 상황인지 바로 파악한 에단은 잘했다는 듯이 클로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히히.”
클로드는 그런 에단의 손바닥에 머리를 비비며 뿌듯하게 웃었다.
그 보기 좋은 광경 속에서 오직 제이드만이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황궁에서 2황자를 보냈습니다. 폐하께서 밀런 소백작님을 입궁시키라고 했답니다.”
“저를요?”
“예, 아무래도 밀런 소백작님의 제…….”
제이드는 고개를 뒤로 돌려 그를 싸늘하게 바라보는 에단의 시선을 느끼고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는 흠흠,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밀런 소백작님께서 가 봐야 할 문제라는 걸 황제도 깨달은 듯합니다.”
“……알았어요.”
황실에서 반응을 보일 정도라면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사라는 이 일이 올리븐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빠르게 눈치챌 수 있었다.
“사라가 원하지 않는다면 2황자는 굳이 보지 않아도 좋습니다.”
“아니에요, 저도 무슨 일인지 파악해야겠어요.”
사라는 손가락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에단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방해가 되진 않겠지요?”
“물론이에요.”
사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단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사라를 에스코트하겠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어쩐지 제자들의 앞에서 조금 낯부끄러운 기분을 느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잠시 다녀올게, 괜찮겠니?”
“네. 오실 때까지 알아 놓겠습니다.”
벨루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뒤를 돌아 저 멀리 있는 벤야민을 바라보았다.
그는 에단의 손을 잡고 있는 사라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벤야민도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벨루나의 말에 사라는 살포시 웃으며 답했다.
“부탁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