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11화
연구실을 빠져나와 응접실로 향하면서 에단은 품에 안고 있던 클로드를 제이드에게 안겨 주었다.
“곧 낮잠 시간이니 조금 쉬는 게 좋겠구나.”
“네, 아버지.”
클로드는 눈치 빠르게 자신이 빠져 주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를 보며 에단은 다시 한번 클로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혼자 두게 되어 미안하다는 뜻이 담긴 손길이었다.
클로드는 그것을 눈치채고 기분 좋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따가 같이 저녁 먹을 수 있는 거죠?”
“그래. 네가 좋아하는 것들로 준비하라고 일러두마.”
“와아!”
클로드는 보상처럼 주어진 아버지와의 저녁 식사를 기대하며 두 뺨을 붉혔다.
통통한 볼살에 오르는 붉은 기가 참 예뻐서 사라 또한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럼 이따가 봐요, 클로드 님. 푹 자고 일어나면 제가 곁에 있을 거예요.”
“응, 잘 다녀와.”
클로드는 사라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해 주며 제이드에게 좀 더 편하게 기댔다.
에단의 말처럼 곧 낮잠 시간이라 약간 노곤해졌기 때문이었다.
“아!”
그때였다. 제이드의 품에서 눈을 감으려던 클로드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휙 하고 스쳐 지나갔다.
‘황궁에서 2황자를 보냈습니다.’
아까 연구실에서 들었던 말이었다.
클로드는 2황자라는 말에 황궁 파티 때 보았던 일리오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클로드의 경계 대상이었다.
“유모.”
“네?”
“조심해야 해.”
“뭐가요?”
“그냥!”
클로드는 의뭉스럽게 웃으며 에단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받은 에단은 잠시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다 이내 아, 하고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네!”
클로드는 그제야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인 뒤 눈을 감았다.
사라는 자신만 빼고 두 부자 사이에 무언가 비밀이 생겼다는 걸 눈치챘다.
“뭐가? 뭐가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죠.”
하지만 에단은 끝내 말해 주지 않은 채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사라는 그 부드러운 손길에 이끌려 가면서도 입을 삐죽 내밀었다.
‘치사하게 정말.’
소외감이 느껴졌다.
* * *
일리오르는 한껏 긴장한 어깨에 힘을 빼려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를 반복하는 그는 누가 봐도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이내 사라가 응접실 문을 열고 나타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밀런 소백작!”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일리오르의 눈에 웃으며 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사라의 모습이 느리게 박혔다.
살며시 올라가는 입꼬리와 다정하게 풀어지는 눈매를 가만히 보던 일리오르는 열리지 않는 입을 힘겹게 열어 말했다.
“몸은, 괜찮은 건가?”
“일전에 암브로시아에 방문하시어 제 모습을 보고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보셨던 것과 같습니다.”
“……그렇군.”
사라는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는 양 말했다.
생기 넘치게 반짝이는 얼굴은 그날 피를 토하며 쓰러졌던 사라와는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누가 보아도 건강한 모습이었지만, 일리오르는 무언가 아쉬움에 말을 끌었다.
“몸에 좋은 약재를 가져왔는데…….”
“이미 충분히 회복하였으니 괜찮습니다, 전하.”
사라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그의 호의를 끊어 내었다.
별거 아닌 것이었지만 거절당하는 느낌에 일리오르는 움찔 몸을 떨었다.
“밀런 소백작이 그러하다면 다행인 거겠지.”
“예, 그러니 편히 대해 주세요.”
“그리하지.”
일리오르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얼굴로 다른 할 말을 찾으려 노력했다.
마치 이곳에 온 목적보다 사라와 한마디라도 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에단은 가늘게 뜬 눈으로 일리오르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바쁘신 분이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전하.”
“아, 그렇지.”
에단의 말에 일리오르는 그제야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한 듯했다.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알톤 영지에 알 수 없는 장막 같은 것이 생겨났는데, 사람은 물론이고 동식물도 그 장막을 통과할 수 없다더군.”
일리오르의 말에 사라는 적당히 미간을 좁히며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일전에 에단에게 미리 이야기를 들은 상태라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일리오르의 입을 통해 다시 듣게 되니 마음이 심란했다.
그녀는 일단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일리오르에게 되물었다.
“알톤 영지라면 1황자님이 있는 곳일 텐데……, 지금 1황자님과 황실 사이에 연락은 되는 건가요?”
“전혀 모르는 실정이네. 형님의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으니 폐하께서 어찌나 노발대발하시던지.”
일리오르는 씁쓸한 목소리로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 형제를 향한 걱정과 안타까움은 일절 묻어 나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인데 폐하께서 왜 밀런 소백작을 찾으시는 건지는 나도 모르겠네. 그러니 솔직하게 말해 줬으면 해.”
“무엇을요?”
“밀런 소백작, 혹시 이 일과 연관이 있는 건가?”
“…….”
일리오르의 말에 사라는 잠시 머릿속에 떠오르는 초록빛 머리카락을 애써 지워 냈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자 에단이 사라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앉아서 이야기하죠.”
“아.”
에단의 말에 사라는 자신이 아직도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일리오르도 마찬가지였는지 얼굴을 굳히며 미간을 좁혔다.
‘레이디에게 자리조차 권하지 않았다니. 젠장.’
그는 에단에게 선수를 빼앗긴 것 같은 기분에 입술을 깨물었다.
일리오르의 시선은 에단의 손을 잡고 자리에 앉는 사라에게 박혀 좀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일리오르 전하께서도 앉으시지요.”
“알겠네.”
에단의 권유에 그는 겨우 사라에게서 시선을 뗄 수 있었다.
그런 일리오르를 보며 에단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었다.
‘같잖군.’
일리오르의 시선은 너무나 노골적이었다.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보면 의도하지 않았어도 그 안에 담긴 마음을 눈치채기 쉬워진다.
그리고 그것은 곧 부담이 될 것이다.
“…….”
에단은 힐긋 사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2황자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 입꼬리의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간 사라를 보아 왔던 에단은 그녀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읽을 수 있었다.
‘역시나 부담스러워하고 있어.’
에단은 그런 사라의 얼굴에 만족해하며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아까부터 불쾌하게 꼬이던 속이 이제야 좀 가라앉았다.
“만약 밀런 소백작이 이 일과 연관이 있다면 분명 골치가 아파질 텐데, 폐하께서 찾으시는 짐작 가는 이유가 있나?”
“없습니다.”
사라는 복잡한 머릿속을 감추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일리오르는 조금 안심했는지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저 1황자님께서 그곳으로 가게 된 원인 중 하나가 저로 인해 비롯된 것이었으니, 폐하께서 제게 노하신 게 아닐까 추측할 뿐입니다.”
“……그러한가. 과연 폐하께서 그리 여기실 수도 있겠군.”
일리오르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사라의 말대로 황제가 알톤 영지에 가 있는 1황자에 대한 책임을 그녀에게 지우려고 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밀런 백작가는 현재 칩거 중이지만, 황위 계승에 있어서 1황자를 반대하는 쪽이었기에 황제가 이번 기회에 손을 뻗으려는 생각일 수도 있었다.
“과연 암브로시아 공작이 그대를 내어 주지 않을 만도 해.”
일리오르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암브로시아 공작을 보았다.
에단 암브로시아는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대처했다.
그는 암브로시아 공자의 몸이 좋지 않으니 유모인 사라 밀런 또한 외부 활동을 할 수 없다고 공식적으로 못을 박아 놓았다.
그렇기에 황제 또한 사교계 시즌이 아닐 때에 밀런 소백작을 공식적으로 부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 2황자인 일리오르를 보낸 것이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언제든 도울 테니, 말해 봐. 내가 무얼 하면 좋겠는가.”
2황자의 말에 사라는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해했다.
이번 일에서 굳이 2황자가 그녀를 도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요?”
“……?”
“왜 저를 도우려 하시나요.”
사라의 물음에 일리오르는 말문이 막힌 것처럼 잠시 동안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녀는 잠시 일리오르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이내 웃는 낯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배려에 감사드리지만, 저는 암브로시아의 그늘 아래에서 충분히 평안하답니다. 2황자님의 다정한 배려는 다음으로 기약하도록 하지요.”
“……그러한가.”
참으로 다정하면서도 단호한 거절이었다. 일리오르의 얼굴이 절로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그와 반대로 에단의 눈가는 기분 좋다는 듯 부드럽게 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