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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112화 (112/190)

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12화

에단은 기분 좋게 발목을 까딱이다가 낮게 가라앉은 일리오르의 얼굴을 보며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지금 지나치게 흥분하신 듯합니다. 하지만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지금 이 시점에서 밀런 소백작을 입궁시킬 순 없습니다.”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낮은 목소리에는 묘한 힘이 깃들어 있어서,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명령을 내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는 귀족들 모두가 알톤 영지에 대해 알게 된 마당에 사라가 그 일과 엮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전부 차단하려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1황자가 알톤 영지로 내려간 것이 사라와 관련 있다 보니 귀족들의 관심사도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

황제의 명을 수행해야 하는 일리오르로서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에단의 생각과 다를 바 없어서, 사라가 주목받게 되는 상황만은 피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그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고는 말했다.

“폐하께서는 한 번 내린 명을 쉽게 거두지 않으신다는 걸, 공작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나.”

“그 고집을 꺾게 만드는 것이 제가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일리오르는 작게 숨을 삼키며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 그는 이 제국에서 가장 유력한 황위 계승 후보였지만, 황제가 살아 있는 한 암브로시아 공작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반절도 휘두르지 못할 것이다.

그는 황제의 눈치나 보며 그 장단에 맞춰야 하는 입장이니 말이다.

그것을 가장 먼저 깨달았기에 1황자가 그렇게 입에 거품을 물고 암브로시아에 집착했었던 것일까.

“내가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 보면 어떻겠는가.”

“적당한 명분이라뇨?”

내심 황제와 한 번쯤 이 문제에 관해 상의하고 싶었던 사라는 관심을 보이며 일리오르를 바라보았다.

귀를 쫑긋하는 사라의 모습에 까딱이던 에단의 발목이 뚝 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황후께 부탁드려 초대장을 보내도록 하지.”

“아, 그러고 보니 이제 곧 황후께서 티룸을 개방하실 때가 왔군요.”

일리오르의 말에 사라는 작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맘때쯤에 황후는 황후 궁의 티룸을 개방하곤 했다.

보통은 황후의 외척이나 그해에 사교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레이디를 초대하곤 했는데, 황후 궁의 티룸에 초대받을 수 있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황후께서 초대해 주시기만 한다면 아무도 제가 폐하의 부름을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겠지요.”

그도 그럴 것이 황제와 황후는 대놓고 사이가 좋지 않았다.

황후의 초대에 응한 사라가 황제를 알현하고 갈 것이라곤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을 것이다.

“…….”

에단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하지만 황후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텐데요. 폐하께서 원하시는 건 뭐든 훼방을 놓아야 직성이 풀리시지 않습니까.”

일리오르는 에단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라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내가 설득을 해 보아야지. 밀런 소백작만 괜찮다면 말이야.”

“저는 괜찮아요. 제국의 신하 된 몸으로 폐하께서 제게 질책하실 것이 있다면 달게 받아야지요.”

“밀런 소백작…….”

일리오르는 기꺼이 황제의 진노를 받아 내겠다는 사라의 의연한 모습을 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기어코 그녀를 황제의 앞에 데려다 놓아야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번 일은 내가 신세를 졌으니 곧 갚을 날이 있을 거야.”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전하.”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은 일리오르의 말은 또다시 사라의 봄바람 같은 거절에 잘려 나갔다.

미약하게 얼굴을 굳히는 일리오르를 뒤로하고 사라는 에단을 바라보며 물었다.

“함께 가 주실 수 있을까요, 공작님?”

“……물론입니다.”

에단은 미간을 좁히면서도 결국은 그녀의 뜻대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제야 사라는 안심했다는 듯 눈을 접어 사르르 웃어 보였다.

“공작님께서 같이 가 주신다면 안심이에요.”

“외출할 때는 나와 동행하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아, 맞다. 그랬었죠? 다행이다.”

일리오르는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라와 에단을 빤히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단란하고 돈독한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에서 풍기고 있었다.

그때 에단의 눈동자가 스치듯이 일리오르를 향했다. 그러더니 훗, 하고 작게 웃으며 그는 시선을 거두었다.

일리오르는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생각했다.

‘내가 드디어 미친 건가.’

분명 협상을 잘 끝냈는데, 그것이 왜 거슬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 * *

일리오르가 어쩐지 축 가라앉은 채 암브로시아 공작저를 떠나고, 사라와 에단은 둘만 남겨진 응접실에서 서로 마주 본 채 팽팽하게 의견을 주고받았다.

“괜찮겠습니까? 황제는 분명 알톤 영지에 당신을 보내려 할 겁니다.”

1황자에 대한 걱정으로 황제의 머릿속은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알톤 영지의 상황에 대해 알아채자마자 사라를 찾는 것만 봐도 짐작이 가능했다.

지금 당장 사라에게 1황자를 구해 오라는 공식적인 명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황제는 모든 인내심을 쏟아붓고 있는 상태일 것이다.

사라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괜찮아요. 제가 가지 않으면 누가 가겠어요.”

“위험합니다.”

사라는 아주 오래전 황제와 거래를 했다.

그녀는 그저 사라 밀런이라는 이름을 지키고자 했고, 황제는 그것에 협조하는 대신 그녀의 힘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러니 이번 일만큼은 적극적으로 황제의 뜻에 따라 주어야만 했다.

앞으로 클로드의 유모 노릇을 평안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이번 일은 올리븐의 짓이 분명해요. 그러니 어차피 제가 가 봐야 하는 문제가 맞아요.”

“……사라.”

“뭘 염려하시는지 알아요. 그렇지만 제 제자예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내가 가르쳤어요. 그 아이가 마법을 구동하는 방식은 제가 가장 잘 알아요.”

사라는 물러설 수 없다는 것처럼 단호한 얼굴을 하고선 에단을 바라보았다.

아직 그에게 말하지 못했지만, 올리븐은 흑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수백 년 전 전쟁과도 같은 역사 속에서 존재했던 흑마법은 이제 마탑에 기록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것이었다.

그것에 손을 뻗은 것으로도 모자라 흑마법에 매료된 마법사들을 이끌고 있는 올리븐을 이대로 두고 볼 순 없었다.

흑마법은 그 존재만으로도 모든 대륙의 공적이 될 수 있었다.

“가만 안 둘 거예요, 내가.”

스산한 사라의 목소리에선 은은한 분노가 묻어 나왔다.

조용하게 말아 쥔 주먹에서는 푸르른 마력이 스며 나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

에단은 사라가 암브로시아에 온 이후로 미소가 사라진 그녀의 얼굴을 처음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찌푸려진 사라의 미간을 엄지로 살살 펴 주었다.

그제야 자신이 인상을 팍 쓰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사라는 두 뺨을 붉혔다.

“사라.”

“네.”

“내게 맡겨 달라고 해도, 당신은 기어코 그리로 가겠지.”

“……네. 그럴 거예요.”

“그렇다면 나도 가겠습니다.”

“알톤 영지까지요?”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사라에게 에단은 작게 웃어 주며 말을 이었다.

“외출은 함께하기로 했으니까.”

“그거야, 황궁까지 함께 가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한걸요.”

사라는 고개를 내저으며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제자가 저지른 일 때문에 에단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에단 암브로시아 공작은 이 크롬벨 제국에서 황제보다도 더 바쁜 남자였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를 일에 신경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까지고 암브로시아에 도움이 되는,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 폐를 끼치게 되는 사람이 아니라.

하지만 이어지는 에단의 말에 사라는 말을 잇지 못하였다.

“내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

에단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사라의 손을 잡았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굳어 버린 그녀의 손을 이끌어 제 뺨에 가져다 대며 에단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모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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