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14화
집무실을 나서며 문을 닫는 사라의 얼굴은 터질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닫힌 문에 등을 기댄 사라는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그때 사라와 에단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제이드가 환한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밀런 소백작님! 말씀은 잘 나누셨습니까?”
“네? 아, 네…….”
사라는 그런 제이드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어딘가 멍해 보이는 모습에 제이드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음? 열이 좀 나는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의사를 부를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사라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삐걱거리는 걸음을 애써 옮겼다.
“……왜 저러시지?”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제이드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눈치가 비교적 부족한 제이드는 그대로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지만 아까부터 집무실 밖에 서 있던 베론과 론다는 서로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어떻게 생각해, 론다?”
“지금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게 내 생각일 거야.”
멀어지는 사라의 뒷모습을 보던 베론이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론다 또한 베론의 어깨에 제 손을 얹으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눈치챈 그 둘은 미묘하게 달라진 사라의 표정 또한 놓치지 않았다.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쌍둥이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됐어.”
“됐지.”
“거의 다 됐어.”
“맞아. 다 됐어.”
두 사람은 서로 손바닥을 맞부딪치며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잠시 감격에 취해 있던 론다는 그제야 번쩍 고개를 들며 물었다.
“내가 뒤따라가 볼까?”
“아니야, 잠시 혼자서 생각할 시간을 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
베론의 대답에 론다는 곰곰이 고민해 보았다.
이럴 때 옆에서 적절한 조언을 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진 않을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참으로 복잡한 것이라서 남이 보았을 때는 훤히 보이지만 스스로의 마음은 잘 모를 때가 많으니 말이다.
“가만히 있다가 밀런 소백작님의 생각이 이상한 곳으로 튀면 어떡해.”
“현명하신 분이니까 본인의 마음은 본인이 잘 알고 계시지 않을까.”
베론의 말에 론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저런……. 베론, 너 연애 안 해 봤지?”
“뭐? 그럼 넌 해 봤어?”
“해 봤지.”
그녀의 대답에 베론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는 배신감에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않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뭐라고? 언제? 어떤 놈이었는데?”
“비밀이야.”
론다는 코웃음을 치며 등을 돌려 사라가 간 방향으로 걸어갔다.
“론다,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해.”
“됐거든.”
등 뒤에서 들리는 베론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 * *
방으로 돌아온 사라는 격렬하게 뛰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손바닥으로 그녀가 느끼고 있는 격동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떡해…….”
달아올랐던 얼굴에서는 화끈한 열기가 계속해서 느껴지고 있었다.
머릿속에선 에단 암브로시아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것을 반복했다.
그녀는 결국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문에 등을 기댄 채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잘생겨서 그런가? 얼굴 때문인가?”
사라는 두 뺨을 손으로 감싸 쥐며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에단 암브로시아. 그 해로운 얼굴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대체 제게 어떤 마법을 걸었길래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겠느냔 말이다.
“나와 함께 보낼 시간을 생각해 달라는 게 무슨 말이야.”
사라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으로 허벅지를 퍽퍽 때렸다.
방금 전 에단이 말했던 모든 말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뱅글뱅글 돌며 어지럽게 만들었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슨 의미지? 이게 무슨…….”
자신을 바라보던 에단의 눈빛, 부드럽게 손을 마주 잡던 크고 단단한 손, 그의 뺨에 닿은 손바닥에서 느껴졌던 감촉까지.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고, 손바닥엔 그가 남긴 온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그녀는 언제부터 자신이 에단 암브로시아에게 휘둘리기 시작했는지 생각해 보려 애썼다.
‘걱정했습니다, 사라.’
‘사라.’
그래. 생각해 보면 그가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마다 그랬던 것도 같았다.
심장에 미묘하게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던 것도 그렇고.
클로드의 유모로서 암브로시아에 충실할 수 있도록 그저 조금 친해지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공작님이 내 이름을 불러 주는 게 너무 좋아.’
그의 입술 사이로 그녀의 이름이 머금어졌다가 새어 나오는 그 울림을 사라는 아주 좋아했다.
에단 암브로시아는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선 그녀의 기분을 쉽게 오르내리게 할 수 있는 남자였다.
“이건 유죄야.”
명백한 유죄였다. 가만히 있던 사람의 마음을 쥐고 흔든 죄. 아주 질이 나쁜.
사라는 호언장담할 수 있었다.
제국의 어느 여인을 데려와도 에단 암브로시아가 그 얼굴로 저렇게 말한다면 곧장 마음을 다 꺼내 내어 주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그건 사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두근거리며 뛰는 심장을 꾹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해, 당신은.’
언젠가 에단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무언가 깨달은 것이 있다며 사라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었다.
사라는 그 말을 에단에게 되돌려주고 싶어졌다.
“공작님이야말로 책임지란 말이에요…….”
듣기 좋은 저음의 단단한 목소리로 마치 그녀가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듯이 말하는 건 반칙이었다.
에단이 그녀를 향해 진심으로 웃어 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사라는 정말 나와 클로드에게 기적과도 같은 사람이군요.’
그때를 떠올린 사라는 무릎을 끌어안고 그 속에 얼굴을 묻었다.
“어쩜 사람이 그래. 어떻게 그렇게 웃으면서 그런 말을 해.”
귀족다운 예의를 갖추고 매너 좋게 웃는 것이 아니라, 에단 암브로시아 그 자체로서 웃는 모습을 처음 봤다고 느꼈던 순간이었다.
한번 그렇게 웃는 얼굴을 보고 나니 사라는 어느샌가 에단의 입가에 작게나마 미소가 머물고 가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 그를 빤히 보는 습관이 생겼다.
눈이 마주치면 잠시 눈썹을 까딱이다가, 이내 뭉근하게 풀리는 입술 사이로 사라, 하고 부른다.
그러면 이제 어렵지 않게 살며시 올라가는 에단의 입꼬리를 볼 수 있었는데, 그녀는 그게 정말 좋았다.
그럴 때마다 사라의 심장도 불규칙하게 뛰곤 했다.
‘그러니까 이건…….’
어느샌가 그의 입가에 미소가 머무는 순간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뿌듯하게 느껴졌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결국 사라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
이건 사랑이었다.
“…….”
자각하고 나니 에단의 앞에서 보였던 마냥 해맑았던 스스로의 모습들이 하나둘씩 스쳐 지나갔다.
제국 최고의 교양을 갖춘 레이디라고 한때 이름을 날렸던 모습은 암브로시아에선 보여 주지 않았다.
클로드와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고, 에단에게 물을 끼얹지를 않나, 그녀를 보호해 주겠다는 에단의 성의를 저버리고 그의 앞에서 도망을 치기까지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에단의 앞에서 너무 제멋대로 굴던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왜 그랬을까!”
사라는 결국 얼굴을 두 손에 묻은 채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자각하자마자 굉장한 걸 깨달아 버린 느낌이었다.
‘틀림없는 짝사랑이야, 이건.’
에단이 절대 그런 모습들을 보고 그녀를 좋아해 줄 리 없었다.
여태까지 그의 호의에 기대서 제멋대로 굴기만 했었던 과거가 이토록 후회가 될 줄이야.
“얌전히 좀 있을걸…….”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고 땅을 치며 후회했다.
자꾸만 에단의 앞에서 마냥 해맑게 웃으며 이런저런 사고를 쳤던 것만 기억이 났다.
그리고 언제나 그것을 그가 수습해 줬다는 것도 함께 떠올랐다.
‘그래도 공작님은 언제나 친절하셨는데…….’
물론 대마법사인 사라에게 암브로시아는 큰 빚을 졌다.
그래서 에단은 아마 끝까지 사라에게 친절할 것이다.
클로드 또한 그녀를 좋아해 주고 있으니까.
하지만, 만약에 에단이 그녀가 대마법사라서, 암브로시아에 필요한 존재라서 그런 호의를 보여 줬다고 한다면 너무 슬퍼질 것만 같았다.
“짝사랑이라는 게 다 그렇지 뭐.”
사라는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힘없이 터덜터덜한 발걸음으로 침대에 가 푹, 하고 엎어졌다.
만약에 그가 그저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만큼 자상했던 거라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에 벌써부터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았다.
“…….”
그렇게 이불에 얼굴을 묻은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사라는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얼굴을 한 채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희고 여린 손에 힘을 잔뜩 주어 주먹을 꽉 쥔 뒤 스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덮칠까?”